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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아다지오 칸타빌레 外

by 丹野 2009. 6. 21.

 

  

 

아다지오 칸타빌레 外/ 나호열

 

 

 

아다지오 칸타빌레 / 나호열

 

 

돌부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자주 넘어졌다
너무 멀리 내다보고 걸으면 안돼
그리고 너무 빨리 내달려서도 안돼
나는 속으로 다짐을 하면서
멀리 내다보지도 않으면서
너무 빨리 달리지도 않았다
어느 날 나의 발이 내려앉고
나의 발이 평발임을 알게 되었을 때
오래 걸을 수 없기에
빨리 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 앞에서 오래 걸을 수도
빨리 달릴 수도 없는 나는 느리게
느리게 이곳에 당도했던 것이다
이미 꽃이 떨어져버린 나무 아래서
누군가 열매를 거두어 간 텅 빈 들판 앞에서
이제 나는 내 앞을 빨리 지나가는 음악을 듣는다
느리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인가
아름다운 것들은 느린 걸음을 가진 것인가
느리게 걸어온 까닭에
나는 빨리 지나가는 음악을 만날 수 있었던 것
긴 손과 긴 머리카락을 가진 음악의 눈망울은
왜 또 그렇게 그렁그렁한가
아다지오와 칸타빌레가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강물의 악보가 얼마나 단순한가를 생각한다
강물의 음표들을 들어올리는 새들의 비상과
건반 위로 내려앉는 노을의 화음이
모두 다 평발임을 깊이 생각한다

 

 

 

 

 

눅눅하다 / 나호열

 

 

세월은 빠르게 가고 추억은 느리게 온다

마치 깊은 산에서 잃어버린 메아리처럼

밑창이 닳은 얼굴로 내 앞에 앉는다

혼자 듣는 음악이 식고

혼자 마시는 차가 흘러간다

느리게 낡아가는 웃음을

새장 속에서 꺼내도 날아갈 줄 모른다

어느 사람에게 추억은 사막을 펼쳐 놓거나

깊고 눅눅한 숲을 읽는 것이리라

나에게 남은 생은 잃어버린 낙타를 타거나

나무 이름을 다시 외우는 일이 되리라

 

 

 

 

 

 

 

 

 불꽃 / 나호열

 

꽃은 이미 졌는데

허공은 허공으로 남았는데

두 손으로 빛의 그림자를 담고 있는데

문득

한순간 다가왔던 눈부심이

분수와 폭포의 내세였음을

아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

 

 

 

  

 

 

조롱 받는 새 / 나호열

 

 

슬퍼도 울고

기뻐도 울고

노래해도 운다고

조롱받는다

 

조롱 속에서 사람들이

조롱 밖의 새에게

한 움큼의 모이와

물을 준다

 

너에게도 자유가 있어야 할 텐데

 

 

 

 

 

 

 

저녁 부석사 / 나호열

 

 

무량수전 지붕부터 어둠이 내려앉아

안양루 아랫도리까지 적셔질 때까지만 생각하자

참고 참았다가 끝내 웅얼거리며 돌아서버린

첫사랑 고백 같은 저 종소리가

도솔천으로 올라갈 떄까지만 생각하자

어지러이 휘어돌던 길들 불러 모아

노을 비단 한필로 감아올리는 그떄까지만 생각하자

아, 이제 어디로 가지?

 

 

 

 

 

 

 

세상이 밝았다 / 나호열

 

 

내가 떠나온 곳을 향하여

미친 듯이 되돌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등진 곳을 향하여

허기진 채로 되돌아가는 나

이 거대한 허물 속에

껍데기 속에

우리는 무정란의 꿈을 낳는다

나란히 눕자

꿈은 잠들지 않으면 찾아오지 않는다

나란히 누워

죽은 듯이 잠들자

잠들 듯이 죽어버리자

우리는 날카로운 비명을 듣는다

유리창 깨지는 소리를

무엇인가가 뛰쳐나오는 황급한

발자국 소리를

세상이 밝았다고 표현한다

허물뿐인 껍데기뿐인 세상에

꿈은 깨지기 위해

무섭게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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