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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가을 시편 모음 / 나호열

by 丹野 2009. 6. 16.

 사진 / p r a h a

 

 

가을 시편 모음 / 나호열

 

 

 

가을 / 나호열

 

 

툭……

여기

저기

목숨 내놓는 소리

가득한데

나는 배가 부르다

 

 

 

 

 

 

 

 

 

시월을 추억함 / 나호열

 

   

서러운 나이 그 숨찬 마루턱에서

서서 입적(入寂)한 소나무를 바라본다

길 밖에 길이 있어

산비탈을 구르는 노을은 여기저기 몸을 남긴다

생(生)이란 그저 신(神)이 버린 낙서처럼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풀꽃이었을까

하염없이 고개를 꺾는 죄스런 보습

아니야아니야 머리 흔들 때마다

우루루 쏟아져 나오는 검은 씨앗들

타버린 눈물로 땅 위에 내려앉을 때

가야할 집 막막하구나

그렇다 그대 앞에 설 때 말하지 못하고

몸 뒤채며 서성이는 것

몇 백 년 울리는 것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었던가

향기(香氣)를 버리고 빛깔을 버리고

잎을 버리는 나이

텅 빈 기억 속으로

혼자 가는 발자국 소리 가득하구나


  

 

 

 

 

다시 시월을 추억함 /  나호열

 

 

먼 길을 돌아 벼랑 앞에 선 사람아 아느냐,

험한 비탈 비스듬히 발목을 묻은 나무들의 올곧은 마음을                               

왜 서로 기대지 않고 왜 서로 어루만지지 않고 왜 서로 바라보지 않고

그저 그렇게 하염없이 멈추어 서 있기로 하였는지

묶였다 풀려지는 바람 같은 그 손길, 그 구름, 그 날의 장대비

화상(火傷)이 되어 꽃이 피고 잎들이 무성했다

한숨 같은 정적의 향기(香氣) 어쩔 수 없이 단풍(丹楓)들기도 하였지만

먼 길을 돌아 벼랑 앞에 선 사람아 아느냐,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비스듬히 세상을 잡은 나무들의 추억(追憶)을,

온 몸 푸른 상채기. 흘러가는 세월만큼

가슴에 긋는 비수 한 자루 어디 있느냐

 

 

 

 

산사에서 / 나호열

 

풍경소리에도 자그맣게 흔들리는
달빛이
걸음을 옮기고 있다

천 년을 내내 눈 떠 있는
석불의 입술은
앞산 나무들을 흔드는
바람이 되고
싸락거리는 소리
반야심경을 읊으며
냇물로 흘러간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갈림길에서 흔들리는
그믐의 달빛

두드릴수록
허물어져 내리는
육신의 모서리를
가을벌레 울음으로 잦고 있는
투명한 목숨줄
달빛을 타오르고 있다

 

 

 

 

 

내원암 가는 길 / 나호열

 

 

   몸에서 모과 향기가 나네 큰 길 벗어나 한참을 걸어도 욕계는 끝나지 
않고 익숙해진 문과 헛된 이름들 그 사이를 지나는 몸만 무거워지네. 
숲을 물고 뼈까지 파랗게 시린 하늘에 음각되는 산새.
  어디를 둘러보아도 모과나무는 없다. 썩어가면서도 깨물고 싶은 그 향
기, 먼 길 미련 버리지 못할 때 다리부터 풀리는 것이 우리네 그리움이지. 
가파른 백팔 계단 어질하게 즈려밟으니 풍경소리 떨어져 내리는 내원암 
앞마당. 이제사 그대 마음 언저리에 와 닿았구나 정상을 탐내는 이들을 
위하여 이쯤 댓돌 위에 주저앉아 가을을 읽는다. 처음부터 모과나무는 없
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내 몸 속에 숨어든 모과는 어디에서 스며든 것일까

 

 

 

 

 

 山幕산막 /  나호열

영양에서 봉화장 가는 군내버스 쉬엄쉬엄 일월산 고개 
턱에 그예 펄썩 주저앉는다 무임승차한 해는 봉화 쪽으 
로 서둘러 기울고 주막 여주인은 방금 소주 한 병을 딴 
다. 에따 나도 한 잔 주쇼,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 내려갈
란다. 서둘러 山菊이 화장을 지우고 31번 국도도 따라서 
파장이다.
   뒤죽박죽 제멋대로,그래도 편안히 몸 내어주는 산막에 
가을만 저 홀로 슬프다

 

 

 

 

 

 

 

가을 편지 / 나호열

 

 

당신의 뜨락에 이름모를 풀꽃 찾아왔는지요
눈길 이슥한 먼 발치에서
촛불 떨어지듯 그렇게 당신을 바라보는 꽃

어느날 당신이 뜨락에 내려오시면
이미 가을은 깊어
당신은 편지를 읽으시겠는지요

머무를 수 없는 바람이 보낸
당신을 맴도는 소리죽인 발자국과
까만 눈동자 같은 씨앗들이
눈물로 가만가만 환해지겠는지요

뭐라고 하던가요
작은 씨앗들은
그냥 당신의 가슴에 묻어 두세요
상처는 웃는다 라고
기억해 주세요

당신의 뜨락에 또 얼마마한 적막이 가득한지요

 

 

 

 

 

 

가을 편지 1 / 나호열

 

그대 생각에 가을이 깊었습니다
숨지지 못하고 물들어 가는
저 나뭇잎같이
가만히
그대 마음 가는 길에
야윈 달이 뜹니다


 

 

 

가을 편지 ·2 / 나호열

구월
바닷가에 써 놓은 나의 이름이
파도에 쓸려 지워지는 동안

구월
아무도 모르게
산에서는 낙엽이 진다

잊혀진 얼굴
잊혀진 이름
한아름 터지게 가슴에 안고

구월
밀물처럼 와서
창 하나를 맑게 닦아 놓고
간다

 

 

 

가을이 가고, 그도 가고 / 나호열

 

거리의 끝에서 조등이 걸어온다
하나, 둘, 셋 가슴을 훤하게 비워두고
어둠한 밤길 태우는 종이 냄새
살아 있는 사람만이 울 수 있다
울면서 후르륵 라면을 먹고
울면서 담배를 태울 수 있다
죽음은 죽은 이의 것
왁자지껄한 이 세상의 안부가
자욱한 향불에 가려 가물거린다
어색한 조문객들이 서투르게
서로의 그늘진 얼굴을 숨긴채
무관심하게 떨어지는 나뭇잎을 밟는다
울지 않는 나뭇잎을,
더 세계 밟으면서
저 언덕밑의 조등들,
하늘에 매달린 조등들을
점자로 읽어내고 있다
문장이 되지 않는 몇 줄의 바람을,
남루로 흔들리는 한 생애를,

 

 

 

 

가을 나무에게 / 나호열

 

울지 말아라
지난해 움텄던 자리에
다시 새 잎이 돋고
슬픔 위에
따스한 손으로
다시 슬픔이 얹힌다

갈 곳 없는 산새가 버린
먼 하늘
세상을 가득 채운
수식어가
하나 둘
떨어진다

 

 

 

 

가을을 향해 1 / 나호열

 

 

삼십 촉 전등만큼
어두워지고 있다
단물이 든
빛나던 웃음
시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툭툭 떨어지는 입맛일 때
승전의 환희보다
차라리 한방울 눈물을 사랑하는
깊은 눈맞춤

종소리는 낮게
이 세상을 빠져나가고
어디에도 닿지 못했던
길들이 되돌아온다

미납으로 떨어지는 목숨의
용서하는 몸짓을
어두워지는 가을이
말갛게 씻기고 있었다

 

  

 

 

가을을 향해 2 / 나호열

 

누가 숨어 있는지
싸리비자락 쓸리는 소리가
무너지고
또 무너지고 있다

가까운 듯
먼 풍경 속에서
지우개 같은
가을이 올 때

툭 
투욱
끊어지는 현

세상은 부서진 악기처럼
한 층
또 한 층
낮은 음계 속으로
울음소리 들리다
깊어져갔다

 

   

 

 

 

가을을 향해 3 / 나호열

 

조율이 되지 않는다
슬픔은

백자 수반에 서성거리는
꽃의 그림자

문 닫히는 소리가
낮은 도음으로
울려왔다

조용하였다

 

 

 

가을 청문회 / 나호열

 

조금 더러운 사람이
많이 더러운 사람을 야단칩니다
좀더 깨끗해질 수 없냐고

못생긴 사람이
좀더 못난 사람을 비웃습니다
좀더 아름다워질 수 없냐고,

오글오글 떠드는 모습이
우물 안의 개구리 같습니다

 

 

 

가을 病 / 나호열



그예 불덩이같은 짐승을 산으로 놓아 보냈습니다
허물을 벗어던지고 맞이하는 이 병은
애꿎은 산 하나만 태우고 맙니다
두 눈 부릅떠도 보이지 않던 길
붉게 혼자 물들어 
떨어지지 않는 가슴을 지나
먼 마을로 내려 갑니다
불길 그 자리에 놓아 두고
흩뿌리는 찬 비도 그 자리에 놓아 두고
침묵을 껴 입는 나무들이
풍경소리를 내며 
온몸을 젖게 합니다
산이 제 몸을 비워내기 위하여
북 울리듯 큰 이름 부르기위하여
몸을 뒤척일 때 마다
가을은 한층 깊어갑니다
결국 나는 몇 장의 바람을 
더 묶어 놓았을 뿐 입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고
귀로 들을 수 없고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겨우 완성 했을 뿐 입니다 

 

 

 

 

가을 음악회 / 나호열

 

 

열 네 살인가 다섯인가 그 때 부터 시작된 가을이 여태 계속되고 있어요
 집은 불타고 말없이 종적 감추신 아버지 아직도 소식 주시지 않고
 그 해 가을 학교 강당에서는 음악회가 열렸어요
 브라스밴드가 경쾌한 페르시안 마켓을 연주할 때
 맨 뒷자리 높은 곳에서 큰 북을 둥둥 울렸던 것이 바로 나였어요
 가보지 않은 페르시아의 시장과 이국인들의 활기찬 발걸음
 인생의기쁨과 즐거움을 노래하듯이
 가볍게 햇살을 퉁겨내듯이
 한 손으로 북을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마지막 장단을 골라내었을 때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를 내는 것이었어요
 그 다음 차례는 독창이었는데 그 연주자도 바로 나였어요
 오가며 그 집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띨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자리에 서졌습니다
 불 타 버린 우리집,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다시는 그 집에 갈 수 없어
 평생을 마음 속에서 서성거린 그 집 앞을
 왜 나의목소리는 그렇게 슬퍼질 수 밖에 없었는지요
 아까보다 더 큰 환호는 왜 스산한 귀뚜라미 울음으로 내게 들려 왔는지요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형제들과 함께 즐겁게 언덕길을 내려갔는데요
 지금까지 그렇게 큰 무대에 서 본 적도 없었는데요
 우리 엄마는요 그 시간에 술시중 드는 주모였는데요
 젓가락 두드리며 창가 부르는 색시들 닥달하는 주모였는데요
 지금도 그 가을 밤은 끝나지 않고 페르시안 마켓과 그 집 앞과
 귀뚜라미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와 윙윙대는 바람소리만
 완성되지 않은 악보에 헝크러져 있는데요

 

 

 

 

 

가을 호수 / 나호열

 



이제 
가을 호수가 되었습니다

그리움의 들 물길이
외로움의 날 물길보다
깊어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없습니다

길이 없어
흰 구름만이 철새처럼 
발자국을 남기고
눈도 씻고 가는 곳
당신의 얼굴
가득히 담아
바람은 가끔
물결을 일렁이게 하지만
당신이 놓아준
작은 숨결들을
속으로만 키우는 기쁨입니다
 
나 
이제
가을 호수가 되었습니다
당신만을 비추는
손바닥만한
거울이 되었습니다

 

 

 

  

한 시간의 가을  / 나호열


환청이 심하다 
한 시간만 기다릴꺼야 
물 흐르는 소리 
낮게 땅거미 내리는 목소리가 
도처에 덫을 놓는다 
어디쯤인지 
한 시간 안에 나는 
얼만큼 갈 수 있는 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테라스인지 
정적이 깊은 숲 속의 오두막인지 
벌써 날은 저물어 가는데 
고개 마루는 멀고 또 멀다 
터벅거리며 걷다가 
뛰기 시작한다 
푸른 잎들은 붉은 세월 속을 통과하면서 
무게를 버리고 
온몸은 허공으로 휘어질 듯 팽팽해진다 
이윽고 나는 새가 되기로 한다 
벌거숭이로는 걸을 수 없어 
봄이 오기 전까지 
하늘에 머무르는 나무가 되기로 한다

 

 

 

 

 

가을의 기도  / 나호열


그래서는 안되는데 그만 

그 열매를 삼켜버렸다 

눈물은 안으로 잠길수록 

단단하게 여무는 씨앗 

오래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여 

내가 그대의 몸으로 들어가 

흙이 되고 

그 흙이 다시 움터오를 그 날까지 

이 햇볕 짱짱한 외로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시월의 장미 / 나호열

 

고고하다

시월의 장미

시들어 버리지는 않겠다

기다렸다는 듯이 

찬 바람을 맞으며

뚝뚝 떨구어내는

선혈

붉음이 사라지고

장미꽃이 남는다

 

내 너를 위하여

담배를 피어주마

야윈 네 가시를 안아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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