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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꽃잎 外 4편 / 복효근

by 丹野 2009. 3. 30.

 

 

 

꽃잎 外 4편

 

 복효근

 

 

국물이 뜨거워지자

입을 쩍 벌린 바지락 속살에

다시 옆걸음으로 기어서 나올 것 같은

새끼손톱만한 어린 게가 묻어 있다

 

제 집으로 알고 기어든 어린 게의 행방을 고자질하지 않으려

바지락은 마지막까지 입을 꼭 다물었겠지

뜨거운 국물이 제 입을 열어젖히려 하자

속살 더 깊이 어린 게를 품었을 거야

비릿한 양수의 냄새 속으로 유영해 들어가려는

어린 게를 다독이며

꼭 다문 복화술로 자장가라도 불렀을라나

이쯤이면 좋겠어 한소끔 꿈이라도 꿀래

어린 게의 잠투정이 잦아들자

지난밤 바다의 사연을 다 읽어 보라는 듯

바지락을 책표지를 활짝 펼쳐 보인다

책갈피에 끼어 놓은 꽃잎 같이

앞발 하나 다치지 않은 어린 게의 홍조

 

바지락이 흘렸을 눈물 같은 것으로

한 대접 바다가 짜다

 

 

 

 

 

페이스메이커

 

복효근

 

 

아무르 강에서 순천만까지

기러기가 먼 하늘 날 때

새들의 간격은

뒤에 오는 새의 양력(揚力)을 돕는 거리만큼이라 한다

 

지쳤다 싶으면

조금 앞선 거리에서

빠르다 싶으면 조금 뒤처져서

 

그러나

새는 사랑한다고

어깨를 겯거나

대신 날아 주진 않는다

 

그렇게 행로와 비행법을 가르치고

몇은 시화호에서

또 몇은 금강하구언에서 내렸다

 

너 더 멀리 난다고 해서 서운하지 않다고

내 역할은 여기까지였으니

나는 여기서 월계수에 물 주고 있으마고

별들이 새들의 눈망울로 뜨는 초저녁

모두가 이겼다는 듯이

한 무리 기러기 떼 V자를 그리며 날고 있다

 

 

 

 

 

 

카오스

 

복효근

 

 

베이징의 노랑나비 날갯짓이

남태평양의 허리케인을 일으킨단다

 

- 웃기는 얘기다

 

에뤼시크톤은 신의 부재를 증명하려고

대지의 버금여신이자 곡식의 으뜸신인

데메테르 신전 앞의 참나무를 무참히 잘랐다가

허기에 시달리는 벌을 받았다

 

-신화는 신화일 따름이다

 

대숲의 참나무 두 그루를 한마디 진언도 없이

기계톱으로 자르다가

나는 무릎을 여섯 바늘이에 꿰맸다

 

-미신 따위는 믿지 않는다

그저 그렇다는 애기다

 

 

 

 

 

정면

 

복효근 

 

 

어둠 속 귀뚜라미는

울음소리 나는 쪽이 정면이다

 

꽃은

지는 쪽이 정면이다

외면했던 모든 것이 정면이었다

그러니까

사랑의 정면은......,

 

 

 

 

 

 

 

꽃자리

 

복효근

 

꽃이 지기로 아직도 아플 땐가

끓던 피 다 잠든 줄 알았는데

오늘은 비바람 갠 자리

나뒹구는 꽃잎들로 내 앙가슴 한켠이 소금창고만 같아라

비바람 속에 져 내린 내 청춘이 저처럼 아득하여

수취거부 소인 찍힌 우표 같은

꽃잎 한 장 들고 발걸음 멈출 적에

누가 있어 이 아픔 증거할 것인가

져 버린 꽃잎이야 어쩌면

빨리 버렸으면 더욱 좋았을 동정 같은 것이라고

애써 무심하려 하지만

없는 그 누가 발목을 후려잡는가

꽃이 져야 열매가 맺는다는 이치로도

다 덮지 못하는 아픔은 있어

아픔은 있어

꽃자리 수습하다가 맺힌 혹덩어리 그것을

열매라 씨앗이라 부르지만

이만큼의 반환점에 서면

증권도 아닌 수표도 아닌

더더욱 면죄부도 아닌 꽃잎 한 장 들고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길을

계엄군  같은 세월은 꽃잎 즈려밟고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