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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깻대를 베는 시간 / 고영민

by 丹野 2009. 2. 21.

 

 

 

 

 

   깻대를 베는 시간

   고영민

   깻대는 이슬이 걷히기 전에 베는 법
   잘 벼린 낫으로 비스듬히 스윽, 당겨 베는 법이라고 당

신은 말했네
   무정한 생각이 일기 전
   밤이 다 가시기 전, 명백한 낮빛이 다 오기 전
   조금 애처롭게
   슬픔의 자리를 옮겨놓듯 천천히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

   아침밥을 먹기 전의 시간
   곤한 숨소리가 남아있어 세상이 아직은 순정해져 있을 때
쓸쓸하게 낫에 베이는 깻대여
   하지만 이슬은 사라지고 마는 것
   깻대를 베는 것은 어쩜 내 안에 와 있는 당신을 가르는

것과 같아서
   가만히 와서 가만히 가는 것을 일부러 가르는 것과 같

아서
   터지는 슬픔 같은 것이어서

   깻대는 마음 축축하게 베는 것이라고 당신은 말했네
   이 밭에 첫 모를 옮길 때를 생각하며
   그늘 속에 잠든 당신을 탁탁탁 두드려 털 때를 생각하며
   싸락싸락 깨알이 바닥에 쏟아질 때를 생각하며
   덜 아프게 덜 아프게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

   아침 햇살이 큰 수레를 끌고와 비로소 한 계절 가만히

저물다 간 것들을 옮겨 싣고
   깻대를 베는 것은
   여기 있는 나와 저만큼의 당신 같은 것이어서
   베인 깻대를 묶어 밭가에 세워두는 일은
   이슬이 걷히기 전,
   꼭 그 때에 해야 하는 것이라 당신은 간곡히 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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