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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세상과 세상 사이

시인으로 세상을 건너다

by 丹野 2007. 12. 11.

 

 

                    시인으로 세상을 건너다

                     - 영감이 찾아와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영감을 얻기 위해서 시를 쓴다

                                                          

 

                                                                                         나호열 ( 시인)

 


1.

  12월이다. 지금 내 얼굴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것은 창틈으로 새어나오는 북풍이다. 예전 같으면 잽싸게 창틈을 테이프나 창호지로 막아 버렸을텐데 올해에는 왠지 그럴 마음이 들어서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감기가 떨어지지 않고 새우잠을 자기 일쑤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바람이 몰고 오는 찬 기운을 외면하고 싶지 않다. 쓸데없는 오기인줄 몰라도 올 겨울은 창틈을 막지 않고 버텨 볼 생각인 것이다. 추위를 이겨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 한기를 내 몸으로 껴안아주고 싶기 때문이다. 껴안고 껴안아서 그 한기를 내 몸에 오래 기억시키고 싶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마음은 克己나 정신의 단련 같은 공력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고통에 가까운 기억을 내쫓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놓아주려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시를 써보고 싶다고 무작정 상경 식의 보따리 마음을 가진 지 35년, 동인지 활동을 통하여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지 27년, 하여튼 이 세상에 살면서 지금까지 立志를 버리지 않은 것이 있다면 오로지 시 쓰는 일 하나였으니 스스로 가엾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시는 언제나 내 삶의 전면으로 달려드는 창틈의 바람이었다. 때로는 그 바람을 막으려 애쓰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을 이겨보려고 무진 애를 쓰기도 하였으나 나는 시 라는 괴물을 이겨보려고 한 적도 없고 그것을 내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므로 언제나 팽팽하게 나와 긴장감을 지닌 채 내 영혼 속에 살아 숨 쉬는 그리움과 같은 것이었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그러나 이 말은 약간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이기에  부연 설명이 필요할 듯싶다. 이 그리움은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 아니라 生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나 근원에 대한 질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워서 시를 쓰고 외로워서 시를 쓰고 세상이 아름다워서 찬미하고, 세상이 더럽고 어두워서 비판의 칼날로 시를 벼리는 것이었다면 애시당초 시와 나와는 인연이 없었을 것이다.

   

  예술의 숙명이 그러하지만 시도 평온한 일상의 뒷면을 들춰보거나 평범 속에 가리워진 불안을 노래하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아름다운 꽃’이나 ‘노래하는 새’를 부정하고 ‘꽃이 피는 이유’와 목청을 돋우는 새의‘ 신호해독’에 더 눈길을 준다. 갈수록 부조리해지고 해체되어가고 있는 세계에서 시인인 ‘나’는 불안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증언해야 하는 억압에 시달린다... (중략) ‘否定’과 ‘낯설음’을 통과하지 않는 시들은 그 절실함에서 격이 떨어진다. 부정을 통한, 부정을 넘어서고 난 후의 평화와 안락을 노래하는 시는 시인과 더불어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섣부른 달관과 자연에 대한 찬미는 시의 한 덕목인 ‘眞正性’과 ‘상상력의 총화’를 놓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내가 「삶의 증명 또는 반성으로서의 시」(西岸詩, 2006)에서 이야기한 위와 같은 내용도 오늘에 있어서도 흔들림이 없는 나의 ‘시의 기준점’이다.


2.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에 시창작교실이 문을 연지 올해로 10 년째에 접어든다. 그래서 올해 12월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뜻이 깊다. 지난 10 년 동안 시에서의 진정성과 상상력의 발화라는 큰 주제를 놓고 함께 자리를 마주했던 문우들의 얼굴을 쉽게 지울 수 없다. 이미 시인이 되어서 강의에 참여했던 사람들, 시인이 되기를 열망하며 강의실 문을 두드리던 사람들, 인연이 닿으면 만나고 인연이 다하면 떠나갔지만 나에게 남는 아쉬움은 그들과 함께 좀 더 세밀하게 삶과 시의 秘意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야 했다는 점이다. 이 아쉬움은 또한 작품집 『오래된 시계』에 참여한 시인들과의 만남에도 느껴지는 감회이다. 이 글을 詩評에 대신하는 이유는 일방적으로 내가 ‘가르치는 사람’ 이 아니라 ‘함께 시를 공유하고 께우쳐 가는 사람’이라는 자각이 참으로 귀하기 때문이다. 시와 시인에 등급을 매기는 세상에서 “좋은 시는 등급이 없고 나쁜 시만 존재한다”는 나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 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오래된 시계』에 작품을 낸 시인들에게서 나는 영감을 얻고 교훈을 얻으며 심한 질책을 듣기도 한다. 그 영감과 교훈과 질책은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맺어진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관문은 ‘어떻게 좋은 시를 쓸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나쁜 시를 쓰지 않을 것이냐?’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다 보니 또 어쩔 수 없이 회피하고 싶은 ‘시란 무엇이냐?’하는 질문에 다다른 것은 아닌 지 모르겠다.


3.


  시라는 언어적 둥지를 틀고자 하는 인간의 뿌리깊고 억제할 수 없는 보편적 충동과 그렇게 튼 둥지에서 인간이 근원적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원인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언어는 인간이 존재의 진리와 만나 그것을 말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매체이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을 존재로부터 소외시키는 근본적 원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언어의 그물망에서 빠져나가고, 언어의 그릇에서 새어나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과 인식이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아무리 먹어도 배가 채워지지 않는 탄타루스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타루스의 식욕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인은 언어로 잡히지 않는 것을 잡고자 하는 욕망을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이며, 시는 언어를 통해서 언어로는 잡히지 않는 무엇이 잠정적으로나마 행복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적 둥지이다.


 박이문이 「시의 개념과 시적 둥지」(『시와 시학』2007년 겨울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시인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표현의 욕구를 가진 존재이며, 시는 사전적 정의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세계의 양상을 바로 그 언어를 통하여 포착하는 행위로 규정할 때  앞 서 이야기한 삶의 진정성과 상상력의 총화가 사실은 부귀영화를 좇는 궤적의 이탈로서의 超克이 아니고 언어가 지닌 한계를 벗어나서 뭉게구름처럼 영혼 속에 자리잡은 관념의 실체를 표현하려는 몸부림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체득한 자가 아니며 시는 구름처럼, 바람처럼 흘러가는 사유의 양상을 손에 넣으려는 과정에 다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이기 전에 몇 가지 떨어버려야할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먼저 시는, 시인은, 입신양명의 도구가 아니며 득도의 과정이 아니라는 생각을 굳게 가져야 할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과정에 어찌 ‘관계’가 개입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좋은 경로를 통해서 입문을 하고 유력한 스승과 도반을 갖는 것이 이 세상에 얻는 후한 덕이 될 것임에는 틀림이 없겠으나 시도, 시인이라는 그럴듯한 칭호도 사실은 우리가 걸치고 있는 옷과도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시인은 자기 둥지가 없다


남의 둥지에 알을 낳고 떠나야 한다


독자여, 마음을 빌려주게


빌려주는 둥지가 없다면 뻐꾸기 알은 어디에서 죽어야 하나


혹여 둥지를 빌려주는 마음이 있다면

자기 새끼인 듯 잘 키워주게

   

 김승희 시인의 「시인과 뻐꾸기」라는 시의 전문이다. 시인은 뻐꾸기와 같은 존재이다. 남의 둥지, 즉 독자의 영혼에 시를 부려놓고 자기는 빠져버리는 존재. 독자가 없다면 뻐꾸기 알 같은 시는 부화되지 못할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다. 내 것이지만 남에게 의탁하지 않으면 온전하게 새가 될 수 없는 자신의 시에 대해서 우리는 거만하고 오만한 자세를 고쳐 세워야 하지 않을까.


4.


 ‘좋은 시’와 ‘나쁜 시’의 구분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최소한 나쁜 시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될 것이다. 자기가 쓴 시의 威儀를 스스로 세우고 치열한 사유의 과정을 보여주지 못한 채 巧言令色하는 시류에 따르는 그 지점이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분명하게 나쁜 시를 골라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좋은 시를 가려내는 일은 난감하다. 더구나 시에 등급을 낙인처럼 찍는 일은 더더욱 가당하지 않다. 수 백 개가 넘는 문학상이 범람하는 세상에서 분명히 권위 있는 상이 우뚝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조명 받는 시와 시인들에게 주눅들 필요도 없고 절망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그런 우열의 판가름 방식은 상대적이고 현세적이며 따라서 전체를 포섭할 수 없는 부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어떤 기준으로 찾아낼 수 있는가? 唐의 미인은 양귀비이고 이집트의 미인은 클레오파트라지만 미인의 기준은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지 않은가?

 뻐꾸기로 비유된 시인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된다면 시인은 다만 ‘씨를 뿌리는 자’일 뿐이며 결코 ‘열매를 거두는 자’가 아니라는 말로 위안을 하자. 내가 뿌리고 내가 거두지 않지만 그 씨를 뿌리는 마음이 열매를 거두는 자, 즉 독자의 마음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 될 것인가! 요즈음 나는 시를 쓰는 일보다 시를 쓰는 마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기울이고 있다. 살면 살수록 나이가 들면 들수록 많아지는 것은 이 세상에는 내가 찾아야 할 아름다움 것들, 눈에 띄지 않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에 대해서 나는 너무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들, 그런 가치들은 내 곁에 있으면서도 아주 멀리 있는 듯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내 눈이 어둡기 때문이다. 태생적으로 눈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세상의 헛것에 내 눈이 너무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고 너무 밝은 것에 현혹되어서 어둠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걸음도 느리지만 앞으로는 더욱 걸음을 늦추어 한껏 휘어지고 구부러져서 세상을 걸어가려고 한다. 시인이기에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되기 위하여 나는 오늘도 미완성의 시를 쓴다. 찬 바람이 얼굴에 부딪치고 앞 서 가는 노시인의 휜 어깨가 쿨럭거린다.

  

사람들은 땅을 사서 값진 과목들을 심을 때

나는 책을 사서 몇 줄의 시를 썼다


세상을 보는 내 눈은 항상 더디고

사물을 향한 내 예감은 늘 빗나갔다


그래서 한평생 내가 누린 건 무명과 빈곤이지만

그래서 또한 내가 얻은 건 자유와 평온이다


                             임보 시인의 「바보이력서」 마지막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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