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論>
이와 같은 경우에 시인은 대상이 자신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만일, 대상이 시인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오게 될까? 詩心이나 詩興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술을 마시거나 음악을 듣거나 여행을 할 것인가? 노련한 낚시꾼은 이무 곳에나 낚싯대를 드리우지 않는다. 자신이 잡고자 하는 어종에 따라서 장소에 따라서 미끼를 선택한다. 시인에게 있어서 시론이란 그런 것이다. 한없이 미끄러져 나가는 이미지와 메시지를 붙잡기 위해서 詩作의 목적과 효용성을 분명히 자각하는 것과, 이미지와 메시지를 포획하기 위한 그물, 즉 언어의 쓰임새를 확고하게 다지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인들은 과거의 시인들에 비해서 높은 대접을 받는 존재가 아니다. 先知者의 역할도, 세상과 삶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증언하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시와 시인의 역할은 다양한 표현 매체의 출현으로 계속 축소되어가고 있으며, 이 추세대로라면 가까운 미래에 문학이라는 장르가 소멸해버릴 것이라는 불길한 전망 앞에 놓여 있는 처지를 놓고 보면 나는 분명 불행한 자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요인 말고도 더 불행한 사태는 시인이 지니고 있는 비극적 성향에 기인한다. 예술의 숙명이 그러하지만, 시도 평온한 일상의 뒷면을 들춰보거나 평범 속에 가리워진 불안을 노래하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아름다운 꽃’ 이나 ‘노래하는 새’를 부정하고 ‘꽃이 피는 이유’와 목청을 돋우는 새의 ‘신호 해독’에 더 눈길을 준다. 갈수록 부조리해지고 해체되어 가고 있는 세계에서 시인인 ‘나’는 불안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증언해야 하는 억압에 시달린다.
나의 시 「벚꽃 축제」에서 벚꽃이 떨어지면서 생화임을 주장하는 까닭은 이 세상이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造花’가 판치는 세계임을 증언하는 것이며,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고/ 나는 그 끝마저도 / 뛰어넘고 싶다” -시 「아침에 전해준 새소리 부분」 -처럼 일차적인 새의 지저귐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모든 생명은 ‘울부짖음’을 내포하고 있다는 자각을 증언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게 되기 때문이다. ‘否定’과 낯설음‘을 통과하지 않은 시들은 그 절실함에서 격이 떨어진다. 부정을 통한, 부정을 넘어서고 난 후의 평화와 안락을 노래하는 시는 시인과 더불어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섣부른 달관과 자연에 대한 찬미는 시의 한 덕목인 眞正性과 ‘상상력의 총화’를 놓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 시대는 분명히 이 시대만이 가지고 있는 傾向性을 지니고 있다. 시인들은 분명히 이 경향성과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경향에 편입되거나 끝까지 자신의 주관과 시대의 흐름과 길항하는 것, 그 모두가 시인에게 주어진 싸움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
'나호열 시인 > 세상과 세상 사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인으로 세상을 건너다 (0) | 2007.12.11 |
---|---|
현대시에 나타난 섹슈얼리티 sexuality / 나호열 (0) | 2007.09.28 |
장자의 꿈, 인간만이 길을 만든다 ― 소고(小考) 나호열론 (0) | 2007.08.06 |
아다지오 칸타빌레 adagio cantabile / 나호열 (0) | 2006.08.08 |
언어에 대한 성찰 (0) | 2006.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