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문> 2007년 가을호 특집에서
*현대시에 나타난 섹슈얼리티 sexuality
- 여성시를 중심으로
나호열
1.
예술, 특히 문학에 있어서의 성 性에 관련된 담론은 이야기를 들추어내는 순간 부터 추문에 휩싸이게 된다. 아무리 배제하려고 해도 성에 관한 한 인간이 만들어낸 여러 도구들이 달려들어 아귀다툼을 하는 형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생물학, 의학, 사회학, 법률 등등의 여러 잣대들이 성을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디 그 뿐인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성 性을 이야기할 때에도 어느 경우에는 sex, 즉 성행위 그 자체로 한정하는가 하면 좀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섹슈얼리티 sexuality로 고쳐 생각하기도 함으로써 막연한 오해의 증폭을 가져 오기도 하는 것이다.
푸코의 『성의 역사』1권 역자 서문에서도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데 요약한 다음의 글들은 관점에 따라 성에 대한 문제의 출발점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줄 것이다. 『쁘띠 로베르 』사전에는 섹슈얼리티를 “성본능과 그것의 만족에 관계된 행동들의 총체” 로 정의하고 있으며 『라루스 대백과 사전에는 생물학에서는 “생물계에서 관찰할 수 있는 성적이거나 성에 연결된 현상들의 총체”로 심리학이나 성과학에서는 “성적 만족의 다양한 양태들 전체”이며 정신분석학에서는 “성적 충동들이 뚫고 지나가는 영역”이라고 정의하고 있다고 적시한다. 그래서 다시 요약을 한다면 섹슈얼리티는 성적 행동, 성적인 현상, 성욕 또는 성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성본능, 성욕 그 자체를 부인하거나 죄악시하는 사람은 없다. 분명 그것은 인간다움의 한 표징일 뿐만 아니라 존재 확인의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에서 性은 그 자체로 찬미의 대상이거나 영생의 중요한 통로로 인식되는 경우보다는 마땅히 억압되어야 하고 그 억압의 강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온갖 추악한 혐의를 덧붙여 관습화하는 행위에 익숙해져 왔다
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간의 우열의 의식(지금은 참을 수 없는 우스꽝스러운 우화에 불과한)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지는 목적과 수단 (종족 보존과 생식의 문제)으로서의 관계로서 오랫동안 그 권능과 위의가 굳건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오늘 왜 우리는 성의 문제를 예술의 영역에서 다시 다루려 하는가? 한 올 남김없이 다 까발리고 난 뒤에는 진정한 화평이, 정신과 육체라는 이분적 사유의 사슬이, 남성과 여성의 평등성이 오기라도 하는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술영역에서의 성은 찬미 그 자체가 아니면 찬미의 대상으로, 아니면 보다 정치적이고 사회학적인 측면에서의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자주 언급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 글의 목적은 후자의 입장에서. 오늘날의 여성 시인들의 시에 나타난 성 의식을 추적하고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데 있다.
2.
성을 다룰 때 첫 번째 걸리는 암초는 외설의 문제이다. 멀리 나갈 것도 없이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도 외설로 촉발된 표현의 자유가 심심치 않게 문제시되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우스꽝스러운 일이지만, 한 사회가 지니고 있는 통제적 권위의 농도에 따라 관용과 처벌의 척도가 급격히 변화해 왔음을 유의해볼 필요가 있다. 어느 선 까지가 에로 영화이고 어디서부터 포르노인가? 춘화에 불과했던 김홍도의 그림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춘화인가? 야동이 판치는 세상에 누드화는 어디까지 예술인가? 사실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고, 열린 사고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아이러닉하게도 누더기처럼 너덜해진 이성이라는 근대의 추종자이거나 아니면 사회의 정글화를 묵인하는 존재들이다. 한 마디로 인간이란 어떤 조건하에서도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개체로 인식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은 길들여질 수 없는 야성의 총체이므로 어떻게 하든 통제의 울타리 안에 인간을 가둬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류가 존재한다. 그들은 법과 윤리의 쌍검을 들고 교화 敎化의 전선에 나서는 자들이다. 이 들 또한 이성이라는 유령의 광신도들이다. 예술가들은 이성의 문제에 있어 이런 양 집단과는 태생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칸트 식으로 말한다면 이성은 원심력의 궤도를 벗어난 상상력의 우주이며, 이 상상력이야말로 예술가들의 게토이다. 더군다나 문학, 더 좁게 언어의 압축과 생략을 도구로 하는 시의 영역에서 외설의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될 지뢰밭이다. 이 말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어휘의 직접적 기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엄밀히 말해서 한 대상 - 지시체-에 대한 언표는 자의적 恣意的이고 그 기표는 끊임없이 기의에서 미끌어지는 것이지만, 기표가 일으키는 파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이런 점 때문에 시에서의 성의 담론은 매우 조심스럽고 방어적이다. 이에 대한 고사 하나를 소개해 보겠다.
퇴계가 선조 임금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게 될 때 어느 누옥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는데 한 소년이 그에게 찾아와서 물었다. “우리 말에 여자의 소문 小門을 보지라 하고 남자의 양경을 자지라 하니 그 뜻이 무엇입니까?” 퇴계가 대답했다. “여자의 소음은 걸어 다닐 때 감추어진다고 해서 보장지步藏之라 하는 것이고, 남자의 양경은 앉아 있을 때 감춰진다고 해서 좌장지 坐藏之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자 그 소년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여자의 그것을 씁이라고 하고 남자의 그것을 좃이라고 하니 그 뜻은 또 무엇입니까?” 퇴계가 다시 대답했다. “여자는 음기 陰氣라 축축할 습 濕인데 우리 말에 된소리 가 많아 씁이라고 한 것이고 남자는 양기 陽氣라 마를 조 燥를 쓰는데 이 또한 된소리로 좃이 된 것이다.” 퇴계에게 당돌한 질문을 던진 이 소년은 백사 이항복이 다. 더 나아가서 외설의 문제는 퇴계의 다음과 같은 말로 해결되지 않을까 싶다.
모든 사람이 부모에게서 태어날 때 몸의 일부분으로 그것을 타고 났고 글자와 음으로 이름을 지어부르는 것인데, 그 말을 하는 것이 무례가 된다는 말 입니까? 그렇지만 음과 양이 서로 통하는 것을 꺼려하는 까닭에 부인네들이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지만 정당한 마음으로 말할 때에는 백 번을 불러도 거리낄 것이 없는 것'입니다.
3.
외설의 문제와 결부해서 우리는 ‘몸’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전통적으로 인간의 몸은 정신의 짝으로서 하위개념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의 정신작용도 몸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서 나온다!) 이 몸을 더러운 것으로 치부해 버리면 우리의 정신은 더러운 것에서 태어났으므로(원인) 마땅히 더러운 물질(결과)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정신으로부터도 몸으로부터도 추방당하는 꼴( 허무)이 되어 버리고 만다. 어떻게 이 난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까?
인간의 성적 욕망은 동식물의 생식 매커니즘과는 변별되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은 번식만을 위해서 성적 욕망을 현실화 하는 것이 아니라 쾌락이라는 본질적인 관념을 현실화하기 위하여 몸부림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쾌락의 관념 - 몸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기계적이냐(본능적) 아니면 선택과 자유의 의지이냐 하는 것이다.
최근에 정진규는 「몸시」연작을 통해 몸의 ‘기계성’과 정신의 ‘자유’가 어떻게 길항하는가를 탐구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바 이는 인간의 섹슈얼리티를 미학적 측면에서 승화시켜보려는 실험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며 오래 전 강우식은 사행시의 형식을 통해 ‘몸’이 구현하는 에로티시즘의 아름다움을 끈질기게 규명해 왔다. 그런가 하면 오탁번은 항간에 떠도는 Y담을 「굴비」라는 시 로 변형시켜 성의 눈물겨운 정경을 플어내고 있다.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 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 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마 !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 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불렀다
4.
대체적으로 한국 현대시에 있어서 성을 담론화하기 시작한 것은 산업화 시대 이후 여성시인들에 의해서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김준오는 한국 현대시 어디까지 왔나 에서 페미니즘을 수용한 여성시인들을 주목하고 있으며 그들의 성의 담론은 남성 시인들의 의식과는 사뭇 다른 양상임을 지적하고 있다.
80년대 시는 유파를 초월해서 언어가 가장 학대받은 언어 수난의 시대다. 이것을 성의 모순을 테마로 한 페미니즘의 여성시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최승자, 김수경, 김승희, 고정희의 시에서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어조는 가부장적 억압의 산물이라는 인식에서 언어가 매우 토의적일 뿐만 아니라 저주. 악담의 변두리 언어를 서슴없이 사용한다. 90년대 김정란의 「소설을 읽
지 않는 이유, 또는 막가는 나의 시법」이란 시제 그대로 페미니즘 시의 언어 형식은 아버지의 기호 체계적인 전통 문법을 해체시처럼 파괴한다. 이런 페미니즘 문제는 해체주의 세계관이 굴절된 결과임은 물론이다. 자주 과장된 자학의 어조를 수반한 페미니즘 시도 90년대 고통과 타락의 책임을 자아와 세계가 공유하는 고백시로 전개되면서 그 신선한 시적 정직성으로 현대시의 한 변화 조짐을
부각시킨다.
또 정효구는 「해방 후 50년의 한국 여성시」(시와 시학 1995)에서 “시의 내용상의 변화 중. 소위 페미니즘 이론의 등장 및 여성 운동과 발맞추어서, 여성 시인들이 여성 해방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작품 속에 담아내기 시작하였다는 점을 들어 들어볼 수 있다고 하면서 그 당시를 지배했던 넓은 의미의 민중 의식, 민주 의식, 해방 의식과 같은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시대적 정황은. 여성 시인들로 하여금 여성 시인이기 이전에 한사람의 당당한 인간 시인으로서, 그들 안팎에서 씌어놓은 여성 시인의 부정적 굴레를 벗어나게 만든 중요한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고 설파함으로써 여성시인들이 여성을 억압하는 상징적 기제로서 성의 문제를 표면화했다는 전략이 외설의 문턱을 과감히 넘어섰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제껏 금기시 되었던, 가끔씩 가부장적 사회에서 파격으로 남성 시인들에게 허용되어 왔던 성의 문제는 몇 가지 갈래로 파생되어간다. 첫 번째로는 성에 관련된 어휘의 자유로운 사용 두 번째로는 억압되고 갈취된 성의 폭로 세 번째로는 여성이 스스로 ‘몸’의 미학을 완성하는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겠다. 첫 번째로 앞서 언급했던 바 음란하고 퇴폐적이이서 사용이 억압되었던 단어들을 시에 과감히 차용함으로서 관습의 허무맹랑함을 전도시키는 전략을 말하는데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 최영미는 예전같으면 속으로 감추어 둘 수 밖에 없었던 연애를 여러 번 했다고 고백하면서 (「마지막 섹스의 추억」) 인간적이지 않은 인간들보다는 늘 옆에 있어주고 순종적인 컴퓨터와 사랑하는게 낫겠다고 이렇게 말한다.
아아 컴 - 퓨- 터와 씹할 수 있다면!
-(「Personal Computer」 마지막 부분)
최영미에 비해서 김언희는 더욱 과격하게 성의 성역을 치고 들어가면서 가부장적 권력의 구조를 해체시킨다. 그녀의 시집 『트렁크』를 해설하면서 이승훈은 “끊임없이 떠도는, 흐르는, 멈추고 다시 흐르는,. 집을 찾아 헤매는 욕망이다. 한마디로 앙티 오이디푸스의 세계이다. ...그녀의 시가 보여주는 욕망하는 기계로서의 삶이 나를 매혹시켰기...” 라고 말한다. 그녀는 “모든 애비는 의붓애비”로
몰아 세우면서 “개가죽을 쓰고 오라”고 야유하기도 하는데 (시 「아버지, 아버지」 부분) 그 이유는 그 아버지가 폭압의 상징으로 “아버지의 바다로 가자/ 일렁거리는 저 거대한 물침대에/너를 눕혀주마/ 아버지의 바다에. 널/ 잠재워주마 (「아버지의 자장가」)라고 관습에 기댈 것을 유혹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김언희는 성의 본능을 권력과 힘의 문제로 귀속시키면서 본능의 드러냄을 통해서 왜
곡된 현실을 전복시키려는 또다른 욕망을 분출하고 있다. 이제 성적 욕망은 남성만의 것도 아니고 여성만의 것도 아니며 측량할 수 없는, 럭비공처럼 튀는 자유의지에 다름 아니다. 이제는 밑에 깔렸던 여성의 욕망이 튀어오를 뿐만 아니 라 더럽고 추악하다고 생각되었던 생리적 매커니즘 조차도 미적 현상으로 치환 해 버리는 단계까지 진입한다. 김선우는 여성의 폐경을 여성성의 상실이 아니라
인생의 중요한 깨달음으로 승화시키는 한편 월경이라는 어쩌면 고통일수도 있는 여성의 의식을 저버리지 않는다.
수련 열리다/닫히다/ 열리다/ 닫히다//닷새를 진분홍 꽃잎 열고
닫은 후/초록 연잎 위에 아주 누워 일어나지 않는다 선정에 든 와불
같다//수련의 하루를 당신의 십년이라고 할까/엄마는 쉰살부터 더
는 꽃이 비치지 않았다 했다//피고 지던 팽팽한/적의(赤衣)의 화두마저
걷어버린/당신의 중심에 고인 허공//나는 꽃을 거둔 수련에게 속삭
인다/폐경이라니, 엄마,/완경이야, 완경!
김선우 시 「완경」 전문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욕망하는 존재인 한 평등하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남성에 대한 저항이 아닐 뿐만 아니라 정복 전쟁도 아니다.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 차이의 이해로부터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목표일 것이다. 한국의 여성 시인들은 여류의 칭호로부터 당당한 시인으로 자리매김 하는데 성공했다. 여성시인들은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여성성의 미화에 - 그 자
체로서 - 힘을 기울이는 한편 성 性을 그들의 의식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성역과 비밀과 소도가 인간에게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우리가 시에서 섹슈얼리티를 거론하는 것은 성의 분석과 해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반 세기 전에 암스트롱이 달에 발자국을 남겼다는 것은 달을 정복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달은 여전히 창공에서 빛을 뿌리고 있고 여전히 우리의 영감을 건드리고 있지 않은가. 시대는 바야흐로 유니섹스의 시대이다. 남성의 여성화, 여성의 남성화, 남자다움, 여자다움 등등의 정형화는 어딘지 낡아 보이는 세상에 살고 있다. 오늘의 여성시가 걸어온 길이 또 어느 길을 잡아낼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성에 대한 화두는 분명 남성과 여성간의 상호투쟁을 유발하거나 미추의 이분적인 사고에 얽매이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문정희의 시 「남편」은 분명 따스한 화해의 눈빛일 터....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나호열/1953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했으며,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낙타에 관한 질문]외 8권이 있고. 1991년 시와시학 중견시인상, 2005년 녹색시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인터넷문학신문 발행인, 월간[예술세계]편집주관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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