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처럼 낙타처럼 안개처럼
김 삼 주(경원전문대학 문창과 교수)
■달팽이와 우체통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으로 있는가, 어떻게 있는가. 이런 해묵은 물음들이 나호열 시인의 시와 함께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시대가 첨단 과학의 틀 안에 놓여 있으면서도 교회며 사찰 그리고 무슨 생소한 이름의 사원들이 날로 늘어만 가는 현상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과학의 발달과 신앙의 확산이라는 모순 현상이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하나씩 하나씩, 생명의 비의는 그 주변부가 밝혀져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안하다. 과학자들이 생명은 신의 몫이 아니라고 역설해도 우리는 불안하다. 무엇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그 해묵은 물음으로 되돌아가게 하는가. 나호열 시인의 이번 시 작업은 그런 물음의 근원을 파헤쳐 보여 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 시대 속의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아가 진정한 삶의 길을 모색하게 한다.
우리는 어디에, 어떻게, 무엇으로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시인의 대답은 ‘달팽이’와 ‘우체통’과 ‘개’라는 객관적 상관물들의 비유로 제시된다.
그러면 먼저 이 시대를 신기루를 쫓는 사람, 노숙하는 사람들의 세상으로 풍자한 시 ‘달팽이’를 읽어 보자.
한때는 달팽이를 비웃은 그런 날들이 있었지
세상은 핑글거리며 돌아가고 있는데
그렇게 느린 걸음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겠나 하고
집 속에 틀어박혀 공상이나 일삼는 철학자처럼
머리 속 황무지를 개간하는 노동이 무슨 필요 있느냐고
그러나 어느 날 자급자족 되지 않는 세상에 찬 바람 불어
밥 굶고 신문지 이불 삼아 노숙하는 사람이 나임을 알았을 때
발 부르트도록 걸어왔던 그 길이 신기루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록 구부리고 토끼잠을 잘지언정 달팽이 네가 부러웠다
집은 갈수록 멀어지고 겨울은 끝내 떠나가지 않을 듯 싶었다
-‘달팽이’ 전문
이 시는 비웃음과 부러워함이라는 대립적 정서의 마주침에 의하여 전개된다. ‘나’는 ‘달팽이’를 비웃고 또 부러워한다. 비웃는 까닭은 첫째 ‘달팽이’가 느리기 때문이다. 단순히 느리다는 이유만으로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핑글거리며 돌아가고 있는데/그렇게 느린 걸음으로” 그 빠른 세상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는 자본주의 시대이고, 자본주의의 핵인 부의 창출은 속도와 직결돼 있다. 남보다 빠르고, 남보다 앞서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시속 백이십 킬로미터를 허용하는 시대에 달팽이 걸음처럼 느린 차를 누가 사겠는가. 주문만 하면 원하는 떡을 집으로 배달해 주는 시대에 디딜방앗간을 누가 이용하겠는가. 그러기에 속도를 추종하는 일은 이미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미덕 중의 하나로 자리잡고 말았다. 달팽이처럼 길을 가는 것은 어리석다. 아니, 시대에 뒤떨어진 짓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는 자에게 달팽이는 비웃음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나’가 달팽이를 비웃는 두 번째 이유는 달팽이가 “집 속에 틀어박혀 공상이나 일삼는 철학자처럼/머리 속 황무지를 개간하는 노동”에 골몰하기 때문이다. 속도의 시대에 “머리 속 황무지를 개간하는 노동”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이성을 갈다듬는다거나 정신의 깊이를 더해 가는 일은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행동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나보다 남의 생각과 행동을 살피기에 민첩해야 한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앞질러야 하고 흐름의 방향을 읽는 데 재빨라야 한다. 그래야 돈과 명예가 자기 것이 된다. 이런 판에 “머리 속 황무지를 개간하는 노동”이 어찌 비웃음의 대상이 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달팽이를 부러워한다. 왜냐하면 ‘나’는 자신이 추종하던 자본주의의 허망한 실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자급자족이 되지 않는 세상에 찬 바람 불어”에서와 같이 자본주의의 핏줄인 돈줄이 막혀 버렸을 때 ‘나’는 명예와 부 대신 노숙의 신세로 전락해 버린다. “무작정 우회도로를 지나고 있다는 느낌/신기루를 지나 또 다른 신기루를 향하여/걷고 또 걸으며 꽃 피우는 하루”(‘거울 앞에서’)처럼 “핑글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세상이 신기루투성이임을 ‘나’는 뼈저리게 체험한다. 그래서 ‘나’는 달팽이를 부러워한다. 달팽이를 부러워한다는 것은 ‘느림’과 ‘머리 속 황무지 개간’을 긍정하는 것, 속도를 벗어나려는 것이리라. 속도의 경쟁은 끝이 없으므로, 속도의 경쟁에서 영원한 승자가 되는 길은 속도를 벗어나는 일이므로, 그 길만이 온전한 ‘나’로서 ‘집’을 갖고, 일가를 이루고, 평안히 겨울의 시대를 지낼 수 있으므로.
사람들 사이에 오래 서 있으나
누구를 기다리는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 그는 보이지 않는다
속에 무엇이 있나 하고 궁금해하는
따뜻한 손은 찾아보기 힘들다
쓰다 버린 폐지
구겨버린 전단지
휴지와 담배꽁초
쉬임없이 매일 생산되는
버려야 할 것들
그 누구도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다
기다림이 익고
그리움이 물들고
눈물이 포도주가 되는 그 시간을
기다리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 우체통이
어느 날 이름을 바꾼다
사람들 사이에 쓰레기통이
섬처럼 떠 있을 뿐
-‘우체통이 그립다’ 전문
속도가 우상이 되어 버린 시대의 ‘우체통’은 위의 시에서처럼 버려진 구시대의 유물에 다름아니다. 우체통은 “쉬임없이 매일 생산되는 버려야 할 것들”로 채워지는 쓰레기통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과 마음을 담은 편지는 그 안에 없다. 속도를 위하여 더 빨리 마음을 전하고, 더 빨리 대답을 듣고, 더 빨리 결정하기 위해서는 온라인을 이용하면 그뿐, 이 속도의 시대에 번거롭고 더딘 우편을 누가 굳이 사용하겠는가. 시인은 이처럼 기능을 상실해 가는 우체통을 통해 시대의 단면을 해부한다.
우체통은 사실 온라인 이전 우리들의 마음속에 그리움과 기다림의 한 표상으로 자리잡혀 왔었다. 우체통을 보면 누군가를 생각하고 울적해지곤 했던 것이 엊그제 일처럼 애잔한 추억으로 남아있으니 말이다. 그 우체통이 쓰레기통이 되어 “섬처럼 떠 있다”는 것은 우리 시대에 진정한 그리움과 기다림의 정서가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다림이 익고/그리움이 물들고/눈물이 포도주가 되는 그 시간을/기다리지 않는다”라고 시인이 안타까와하듯 속도라는 자본주의 가치 척도에 압도된 우리들은 그리워함과 기다림의 소중함마저 속도에 빼앗겨 버린 것이다.
기계의 속도 이편과 저편에는 상품이 있다. 그러나 기다림의 이편과 저편에는 사람이 있다. 그리움과 기다림을 속도로서 해결할 때, 그 이편과 저편에 있는 우리는 한 개의 빵이나 한 켤레의 신발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결국 우리는 우체통이 “섬처럼 떠 있듯” 세상에 제 각기 홀로 떠 있는 섬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또 우리는 그렇게 끌려가고 있다. 나호열 시인은 그런 이 시대를 “개 같은 날” 이라고 야유한다. 시 ‘개 같은 날의 오후’에서 개는 안락을 위하여 “정해진 시간의 용변과/금욕을 강요받는 소량의 식사/공원에 갈 때는 천천히 걸어/적당히 꼬리 칠 줄 알고/두려움을 감추며/위엄 있게 짖는 법”을 배운다. 어디 그뿐인가. “바닥에 꿈이라고 쓰여진 물그릇에/머리를 처박을 때마다 그는 문맹이면서/그는 꿈을 배운다.” 그리하여 개는 안락을 얻지만 야성을 잃는다.
야성이란 개에게 있어서 본성에 다름아니다. 그런데 그 본성을 잃은 개는 ‘안락’하다. “쇼파에 등을 기대고 끈끈한 눈빛으로 서로를 핥아” 주는 삶을 누릴 수 있다. 자아라는 개성을 잃은 채 상류사회의 규범을 연습하고, 자아의 꿈이 아닌 강요된 꿈을 이루는 것, 시인은 그것을 ‘개’의 삶이라 야유한다. 그러면서 시인은 “나는 개처럼 살고 싶다/혀를 끌끌 차면서/사람으로 살기가 너무 어렵다”라고 시대적 풍조 속에 개성을 지닌 자아로서의 삶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자조적인 어조로 술회하고 있다.
우리는 어디에, 어떻게, 무엇으로 있는가. 나호열 시인이 시적 형상화를 통해 보여주는 대답은 통렬하고 날카롭다. ‘달팽이’ 같은 삶 너머에 있는 속도의 시대에, 쓰레기통이 되어버린 우체통과 같이 그리움도 기다림도 속도에 묻혀 버린 시대에, 속도의 가치가 정하는 상류사회에 편입하기 위하여 우리는 스스로를 개처럼 길들이고 있다. 영원히 그 꿈을 이루지 못할지도 모르는 시대의 노숙자로서.
■화병과 낙타
우리는 앞에서 시인이 ‘개’ 같은 시대를 말하면서 “사람으로 살기가 너무 어렵다”고 술회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사람이란 어떤 존재일까. 어떻게 살아야 하기에 사람으로 살기가 너무 어려운 것일까.
시 ‘화병花甁’은 이 의문에 대한 시인의 생각이 잘 녹아 있는 한 작품으로 보인다.
결국은 시들어 버리는 꽃을 꽂기 위해
내공은 속을 텅 비워 버리는 연습인 것이다
주둥이가 깨지고 몸이 금가고
그렇게 살다가 깨끗이 버려지는 것이다
結跏趺坐하고 장작불 고열 속에서
기꺼이 그대의 가슴속에서 열반한 내 사랑
청자도 아니고 백자도 아니고
때깔도 곱지 못한 이 삶은
오롯이 당신에게서 태어난 것이다
아직도 들끓는 피
아직도 너끈히 나무 한 그루 키워낼 수 있는
부푼 공기도
그대가 불어 넣어준 들숨이다
아! 바다를 넘고 산을 넘어서
그대의 가슴에 다시 돌아가기 위하여
풀씨보다 더 가볍게 모래로 부서지려는
한 남자의 내공
-‘화병’ 전문
먼저, 이 시에서 탄생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읽어 보자. 얼핏 보아 ‘결가부좌’나 ‘열반’ 등의 말 때문에 시인이 말하는 탄생과 죽음을 불교적 생사관에 기대어 읽을 수도 있다. 딴은 그의 시에서 가끔 그런 시어들을 만나기도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대의 가슴속에서 열반한 내 사랑”이라는 대목이 그런 생각을 지워 버린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내 사랑”은 다음 행의 “이 삶”과 나란히 놓임으로서 구문 구조상 은유 관계에 놓이게 되므로 사랑의 의미는 ‘나’의 탄생으로 볼 수 있는데, 불가의 생사관에서는 탄생과 죽음이 타자에 의하여 결정되기보다는 자아의 인업因業에 의거하여 전생과 내세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결가부좌”나 “열반” 등의 시어를 구사한 것은 시적 자아의 객관적 상관물로서 화병이 생성되는 과정을 불가적 이미지를 빌어 형상화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흙으로 빚은 화병이 고열의 가마 속에서 구워짐으로써 하나의 도구로서 화병이 됨을, 사랑으로 살아갈 인간으로 의미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도구로서의 ‘화병’, 그것은 생의 의의를 타고난다. 시인이 “그대의 가슴속에서 열반한 내 사랑”이라고 말하듯 화병은 사랑이라는 생의 의의를 지니고 태어난다. “결국은 시들어 버리는 꽃”이지만 화병은 꽃을 담아야 하는 운명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화병은 나날이 마모돼 간다. “주둥이가 깨지고 몸이 금가고” 그렇게 낡아가다가 깨끗이 버려진다.
이처럼 시인은 화병을 통하여 인간의 실존을 투시한다. 인간은 사랑을 담는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나 “결국은 시들어 버리는 꽃”으로서 허무를 수없이 가슴에 안다가 스스로도 “깨어져 버려지는” 허무에 귀착한다는 것을 시인은 화병에서 보고 있다. 하지만 시인은 허무의식에 함몰되지 않는다. “아직도 들끓는 피/아직도 너끈히 나무 한 그루 키워낼 수 있는 부푼 공기”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삶에의 강한 의지를 보여 준다. 왜 화병으로서 시적 자아는 깨지고 금갈 것을 알면서 “들끓는 피”와 “부푼 공기”를 앞세우는가. 그것은 “풀씨보다 더 가볍게 모래로 부서지려는” 노력이며, “그대의 가슴에 다시 돌아가기” 위한 소망의 발현이다. 그대의 가슴이란 흙이요, 어머니, 다시 말하면 위대한 어머니로서 대지에게로 귀의하려는 의지인 것이다.
그 의지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시인은 내공의 수련이라 말한다. 화병은 비어 있으므로 그 빈 속을 생명을 키워내는 “부푼 공기”로 채우는 일,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수행이고 “무릎 꿇는 일”이다.
자신을 함부로 팽개치지 않는 사람은
자동세탁기를 믿지 않는다
성급하게 때와 얼룩을 지우려고
자신의 허물을 빡빡하게 문지르지 않는다
마음으로 때를 지우고
마음으로 얼룩을 지운다
물은 그 때 비로소 내 마음을 데리고
때와 얼룩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빨랫줄에 걸려 있는 어제의 깃발들을 내리고
나는 다시 무릎을 꿇는다
……중략……
본의 아니게 구겨진 내 삶처럼
무늬들의 자리를 되찾기에는 또 한 번의
형벌이 남겨져 있다
쓸데없이 잡힌 시름처럼 주름은
뜨거운 다리미의 눌림 속에 퍼진다
내 살갗이 데이는 것처럼 마음으로 펴지 않으면
어제의 허물은 몇 개의 새로운 주름을 만들어 놓고 만다
-‘수행’ 중에서
종교적 행위에서 무릎을 꿇는 것은 기원이나 사죄의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위의 시 속에서 ‘나’가 무릎 꿇는 일은 사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신을 향하여 하는 행위가 아니라 나를 향해 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앞의 시에서 보았던 ‘내공 갈다듬기’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무릎을 꿇고 빨래를 한다. “마음으로 때를 지우고/마음으로 얼룩을 지운다”와 같이 빨래를 하는 일은 옷에 묻은 때와 얼룩만을 지우는 일이 아니다. 그 때에, 얼룩에 담긴 세상사의 허물까지 지우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때나 얼룩과 함께 마음의 허물이 깨끗이 정화된다. ‘나’는 무릎을 꿇고 다림질을 한다. “쓸데없이 잡힌 시름처럼 주름은/뜨거운 다리미의 눌림 속에 펴진다”와 같이 ‘나’는 허물을 지운 뒤에 남는 ‘시름’을 마저 없앤다. “내 살갗이 데이는” 고통스러운 자기 정화의 과정, 마음의 허물과 시름 벗기가, 빨래로 형상화된 시인의 수행이자 사랑의 삶에로 향하는 내공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발적 의식이 아니라 “평생을 허물을 벗기 위해/오늘도 무릎 꿇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와 같이 끝없는, 처절한 고행인 것이다.
이와 같은 시적 자아의 내공이 수평으로 작용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낙타’를 만난다. 낙타는 시적 자아의 객관적 상관물로서 시인의 비극적 존재 인식과 삶의 의지가 투사되어 있다.
낙타를 보면 슬프다
사막을 건너가며
입안 가득 피 흘리며
거친 풀을 먹는다는 것이
사막에서 태어나서
사막에서 죽는다는 것이
며칠이고 사막을 건너가며
제 몸 속에 무거운 물을 지고
목마름을 이기는 것이
낙타를 보면 못 생겨서 슬프고
등위로 솟은 혹을 보면 슬프다
낙타가 나를 본다
낙타가 이상한 낙타를 보고 웃는다
내장된 그리움으로
삶의 사막을 건너가는 것이
얼마나 기쁘냐
갈증을 견뎌내는
오아시스를 향한 눈빛이
얼마나 맑으냐
그래서 나는
낙타의 낙타가 되었다
-‘낙타에 관한 질문’ 전문
이 시에서 ‘나’는 “낙타를 보면 슬프다”라고 심경을 표백한다. 그 까닭은 낙타의 숙명에서 비롯된다. “사막에서 태어나서/사막에서 죽는다는 것”이 낙타의 숙명이다. 그러나 낙타는 자신의 숙명을 거역하지 않는다. “입안 가득 피 흘리며 거친 풀을 먹고” “ 제 몸 속에 무거운 물을 지고 목마름을 이기면서” “사막을 건넌다.” 이 고통스러운 삶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무릎 꿇는 일”(‘수행’)이, 내면을 정화하는 일이, 평생을 멈추지 않듯 낙타의 고행 또한 평생 동안 지속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적 자아는 낙타에게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내장된 그리움으로 삶의 사막을 건너가는, 오아시스를 향한 눈빛으로 갈증을 견뎌내는” 낙타와 ‘나’, 그래서 시적 자아는 “낙타의 낙타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내장된 그리움” 또는 “오아시스를 향한 눈빛”은 힘을 지닌다. 삶의 사막을 건너는 힘, 오랜 갈증을 견디는 힘을 지닌다. 말하자면 그것은 생의 의지라 할 수 있다. 시 ‘화병’에서처럼 “그대의 가슴에 다시 돌아가기 위하여 풀씨보다 더 가볍게 모래로 부서지려는 한 남자의 내공”이라 단언하는 의지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나호열 시인은 인간 존재 또는 생명의 비극성을 긍정하고, 그 비극성을 삶의 힘으로 전이해 가는 생의 의지를 ‘화병’을 통해, ‘낙타’를 통해 극명하게 형상화해 낸다.
또한 시적 자아의 내공이 수직으로 작용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가로등’과 마주친다. “오늘도 나는 차렷 자세로 그대를 향하여 선다/일몰부터 일출까지/나무가 되어 본다/꽃이 되어 본다” 라고 생명의지를 표백하는 이 시에는 ‘뿌리 없음’과 ‘뿌리 있음’의 갈등이 노정되어 있다. 아니 뿌리 없는 상황에서 뿌리를 갈망한다. 무생명, 인공의 세계에서 생명, 자연의 세계를 갈망한다. “하루살이들은 맹렬히/나무도 아닌/꽃도 아닌/불빛 속으로” 몸을 던지는 ‘가로등’은 나무이고자 한다, 또 꽃이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한때는 나무인 줄 알았다/온몸에 깃발을 내걸고/새들을 품으며/높이 솟아오를 줄 알았다/한때는 꽃인 줄 알았다/어둠을 밝히는 이 몸짓이/ 향기와 씨앗을 가득 품어/ 벌과 나비의 꿈인 줄 알았다“라고 가로등이 술회하는 세계는 인공의 전율이 아닌 생명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시적 자아의 간절한 소망인 것이다.
생명의 세계는 나무처럼 꽃처럼 또 저 낙타처럼 모두가 제가 태어난 자리에서 저에게 주어진 생을 긍정하며 살아간다. 이른바 생명의 질서, 우주의 질서 속에서 자기 존재를 구현한다. 거기는 “핑글거리며 돌아가는” (‘달팽이’) 세상이 아니다. “신기루를 쫓다가 찬 바람 불어 노숙하는” (‘달팽이’) 세상이 아니다.
그래서 시인은 말한다, “살아 있는 동안 푸른 하늘을 경배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절벽’)라고.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는 담쟁이나 나팔꽃처럼 ‘절벽’으로서 숙명을 긍정하고 극복하는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거부하지 않고 절벽을 오름으로써, 또 마침내 꽃을 피움으로써, 저 ‘낙타’의 “오아시스를 향한 눈빛”처럼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이렇게 낙타가 사막을 가듯, 나팔꽃이 수직의 벽을 기어오르듯, 생명의 질서, 자연의 질서에 따라 생의 의지를 실현해 나가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우주적 질서에 순응하며 사는 생은 아름다운 것이다.
■안개와 붕어빵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으로 살 것인가. 달팽이로서, 화병으로서, 낙타로서, 가로등으로서 지상에 제 길을 가야 하는 우리는 “팽글거리며 돌아가는”(‘달팽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시 ‘붕어빵’은 이 물음에 대하여 의미 있는 화두를 던진다.
저기 거세진 칼바람에 흔들리는 불빛 같은 사내가 서 있다. 천 원 주고 붕어빵 네 개를 거스름으로 받고 나는 절로 배가 부르다. 내력을 알 수 없는 저 사내도 행복하리라 붕어빵 한 마리가 입 속으로 들어간다. 토막잠 자는 경비 아저씨에게 나머지 붕어 세 마리 드리니 그도 행복하다
내 속에는 붕어가 산다. 붕어가 사는 너른 강이 얼어붙은 몸 안에서 꿈틀거린다.
-‘붕어빵’ 중에서
추운 겨울날 ‘나’는 마지막 남은 천 원을 두고 그 용처를 생각한다. ‘버스 두 번을 탈 수 있는, 담배 한 갑을 살 수 있는’ 소액의 돈 천 원을 ‘나’는 어디에 쓸까 고민한다. 그때 우연히 눈에 띄는 붕어빵, ‘나’는 붕어빵을 산다. 붕어빵은 유용하다. 특히 “자급자족이 되지 않는 세상에 찬 바람 불어” (‘달팽이’) 노숙의 신세로 전락한 사람들의 세상에서는 더욱 유용하다. 노릇노릇 익은 빛깔이 주는 따뜻한 느낌이 유용하고 탱탱히 부풀어오른 몸집이 주는 포만감이 유용하다. ‘나’는 그 붕어빵 하나를 먹고 나머지 셋을 “토막잠 자는 경비 아저씨”에게 ‘드린다’. 그도 어쩌면 ‘나’ 같은 노숙의 신세일지도 모른다. “팽글거리며 돌아가는 세상”에서 돌아가는 중심에 끼지 못하고 밀려나 전화부스 같은 작은 경비실에서 낡은 의자에 토막잠을 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가 우리 자신인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나’는 나의 몫보다 많은 붕어빵을 ‘드린다’.
‘나’에게보다 그에게 더 많은 ‘붕어빵’을 ‘드림’으로써 ‘나’의 내면에는 “붕어가 사는 너른 강이 얼어붙은 몸 안에서 꿈틀거린다.” ‘드림’을 통하여 비로소 얼어붙은 몸이 녹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드림’의 행위가 시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공동체적 윤리의식이다. “언제부턴가 안개를 사랑하게 되었어/그 자리에 놓여진 것들 탐내지 않고/손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하고/ 부드럽게 감싸안을 줄 아는 안개를 사랑하게 되었어”(‘안개’)라는 시인의 표백처럼 ‘드림’이란 ‘부드럽게 감싸안음’이다. ‘나’가 ‘경비 아저씨’의 추위를 붕어빵으로 감싸안듯, 우리는 서로를 감싸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속도의 가치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우주적 질서의 세계로, 생명의 질서의 세계로, 이끌어 가는 대안인 것이다.
철학자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읽고 얘기한다는 것은 부담스럽다.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견이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고, 그의 깊은 생각을 좇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우리를 부담스럽게 한다. 그러나 나호열 시인의 시 읽기는 즐겁다. 그는 분명 철학자이면서 시인이지만 어려운 이론으로 설교하지 않는다. 쉬운 말과 부드러운 가락으로, 누구나 생각할 수 있으면서도 무심코 지나쳐 버린 우리네 삶의 아픈 곳을 노래한다. “자신을 위로하지 못하는,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자신과 대화하지 못하는 그런 시를 두려워한다.”(‘서문’)라고 그가 말하듯 그의 시는 자신과의 대화를 넘어 우리에게로 쉽게 다가온다. 그리고 우리가 잊고 사는 생의 진실을 낮은 목소리로 가만가만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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