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좀체 뜨지 않네
뭍에서도 물에서도 허우적거리네
나는 왜 혜성처럼 뜨지 못할까
별세계에도 물세계에도
이 지상의 낮은 변죽에도
나는 없네
그때 뜰걸 그랬나? 사랑하는 경아로,
가슴에 A자 하나 품고
인생 한바퀴 뒤집어 볼 걸 그랬나
뭇 가슴에 냉소의 불을 질러볼까
높이 떠오른 그대들이여
그대는 몇 그램의 살과 뼈인가
몇 리터의 물과 기름인가
내 속의 회전하는 욕망의 퍼즐
켜켜이 퇴적된 막막한 생의 집
무거워
조용히 가라앉는 의식을 집전하고 있네
- 윤준경 「뜨지 못하는 자의 변명」
욕망 혹은 내면풍경
시인에게 시쓰기란 무엇인가. 자기만족인가, 아니면 타자와의 소통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욕망의 다른 표현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의 표현인가. 시를 욕망하는 것이 시인의 욕망과 상충하게 될 때, 우리는 시인의 시말운동이 가진 시적 함수를 어떻게 평가하여야 하는가. 고은처럼 시말의 정신성이 시인의 정신성과 상호 상충할 때, 우리는 시말을 시인과 별개의 것으로 평가하여야 하는가. 타락한 정신성과 물욕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시를 써내려간다면, 그것은 어떤 운명을 타고난 것인가. 전혀 곱다고 말할 수 없는 고은처럼 시인의 인품과 시말의 정신성은 일치할 수 없는 별개의 사태인가. 시가 영혼의 형식이라 할 때 타락한 영혼이 아름다운 시를 창작해낸다면 그것은 하나의 모순이 아닌가.
윤준경의 시 「뜨지 못하는 자의 변명」은 시의 위의와 시인의 욕망을 동시적으로 떠올리게 만드는 수작에 해당하는데, 그것은 떠오른 자와 좀체 뜨지 못하는 자 사이를 응시하면서 시의 본질을 묻게 만든다. 시말이 상호 대립되는 욕망과 삶 그리고 의식을 헤집으면서 나(시인 자신)를 문제 삼을 때, 또는 떠오른 자들의 존재론적 정체성을 문제 삼을 때, 시는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나(시인 자신)인가, 그대(뜬 시인)인가 혹은 독자의 뇌리 속인가. 묵묵히 자기길 가기. 좀체 뜨지 않는 자신을 부여안고 가기. 내가 없는 나를 위무하면서 자신의 길가기. 시의 길이란 고독한 의식의 집전 속에서 무거운 생의 집을 건져 올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뜬 시인이 되고 싶은 욕망이 없지 않으나, 찬란한 혜성처럼 떠올라 지지 않는 별이 되고 싶은 충동이 없지 않으나, 어찌 그것이 시인의 임무이고 시말이 펼쳐내는 운명의 언어이겠는가.
회한. 못 다 이룬 꿈. 냉소. 무거워지는 삶. 뜨지 못하는 자는 변명하지 않는다. 뜨지 못하는 자는 조용히 자기를 정관한다. 뜨지 못하는 자는 의식의 집전 속에 나를 본다. 그래! 욕망이 펼쳐내는 허망한 퍼즐 그리고 허우적임. 그래! 높이 떠오른 자들의 위선과 교만. 생은 결코 가볍게 뜨지 않는다. 생은 결코 가벼워서 안 된다. 생은 무겁게 퇴적된 존재의 집이다. 하여 생은 욕망하는 의식 밑으로 잠행해 들어가 자신의 존재론적 정체성을 투명하게 집전하게 된다. 아름답지 아니한가! 뜨지 못하는 자의 삶이, 기쁘지 아니한가! 무거운 존재감을 견디어내는 시인의 삶이.
윤준경의 「뜨지 못하는 자의 변명」은 진짜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다. 다만 가슴 시리게 시인의 임무를 충실하게 실현시켜가는 아름다운 영혼만을, 시인의 존재론적 무게만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숭고하지 아니한가! 윤준경 시인의 시적 태도가. 가슴이 뭉클해지게 만들지 아니하는가! 뜨지 못한 자의 아름다운 변명이. 그러한 시적 태도가 진짜 시인의 위의가 아니겠는가! 의식을 무겁게 집전하는 시인의 태도가.
김석준(시인·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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