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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가로수 옆에 가을이 머뭇거리는 사이 / 한영수

by 丹野 2025. 2. 9.


가로수 잎에 가을이 머뭇거리는 사이

   한영수



시내버스를 탔다 뜬금없이
광화문에서 정릉 가는 길을 붙잡아
경복궁을 지나고
뒤로 뒤로
환기미술관을 지나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시린 별 같은 것이나
생각하면서 눈은 맑아
의자처럼 앉아서 아무 생각도 안하면서
때가 되면 버스는
나를 종점에 내려놓으리니
어디만큼 왔나
얼마를 더 가야 하나
낯선 거리
두리번거리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저절로
시간의 버스는
모가지가 무거운 계절의 종점에
나를 내려놓으리니
햇님유치원 산장설비 청수약국 같은
쓸데없는 간판이나 찬찬히 읽으면서
저기 떨어지는 해처럼
한 줄 남은 영혼의 눈썹이나
높아 외로운 봉우리에 그려보면서
북한산 자락을 에돌고 돌아 아직
가을이 가로수 잎에 머뭇거리는 사이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1970년 뉴욕전.


               —《미래서정 13호》 202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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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수 / 전북 남원 출생. 2010년 《서정시학》으로 등단. 시집 『케냐의 장미』 『꽃의 좌표』 『눈송이에 방을 들였다』 『피어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