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북
박지웅
뼈도 살도 아닌 불그레한 것이 가을볕에 나서 마르고 있다
작은 돌조차 비켜가지 못하는 몸을 지그시 말고 장미줄지렁이는 반지가 되려나 보다
아무도 끼지 않은 반지가 되려고 한 번도 버려지지 않은 반지가 되려고 그을린 활자들이 바닥난 힘으로 환생하는 길바닥
그러고 보니 느린 우체통 속 광야에서 가을을 보낼 내 편지도 바닥이라는 생각
하북 바닥이 장미줄지렁이에게 세상 꼭대기이듯 편지는 높고 쓸쓸한 나의 바닥이라서 가을비 긋고 정인에게 가는 내 갈필의 바깥은 속이 다 비치는 행간이라서
당신이 맑은 종아리를 걷고 저리 건너가고 이리 건너오는가
하북, 하북 입안에 넣고 숨결처럼 발음하면 길고 부드러운 나뭇잎이 생기는 걸 아는지
햇살의 흰 종소리가 잎에 묻었다가 바닥에 이르는 꿈을 꾸는지
볕 좋은 날의 약속이 되려고 나온 붉은 반지와 나는 이리 그윽해져 비켜서고 비켜 가지 못하고
웹진 님Nim - 2024년 9월호 Vol.39-박지웅
박지웅 시인
2004년《시와사상》으로 등단.
시집『너의 반은 꽃이다』『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나비가면』,
산문집『당신은 시를 쓰세요, 나는 고양이 밥을 줄 테니』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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