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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하북 / 박지웅

by 丹野 2024. 10. 6.
 하북 
 
 박지웅
 
 
 
 
 
 뼈도 살도 아닌 불그레한 것이 가을볕에 나서 마르고 있다 
 
 작은 돌조차 비켜가지 못하는 몸을 지그시 말고 장미줄지렁이는 반지가 되려나 보다
 
 아무도 끼지 않은 반지가 되려고 한 번도 버려지지 않은 반지가 되려고 그을린 활자들이 바닥난 힘으로 환생하는 길바닥
 
 그러고 보니 느린 우체통 속 광야에서 가을을 보낼 내 편지도 바닥이라는 생각 
 
 하북 바닥이 장미줄지렁이에게 세상 꼭대기이듯 편지는 높고 쓸쓸한 나의 바닥이라서 가을비 긋고 정인에게 가는 내 갈필의 바깥은 속이 다 비치는 행간이라서 
 
 당신이 맑은 종아리를 걷고 저리 건너가고 이리 건너오는가  
 
 하북, 하북 입안에 넣고 숨결처럼 발음하면 길고 부드러운 나뭇잎이 생기는 걸 아는지  
 
 햇살의 흰 종소리가 잎에 묻었다가 바닥에 이르는 꿈을 꾸는지 
 
 볕 좋은 날의 약속이 되려고 나온 붉은 반지와 나는 이리 그윽해져 비켜서고 비켜 가지 못하고
 
 

 

웹진 님Nim - 2024년 9월호 Vol.39-박지웅

 

 박지웅 시인
 2004년《시와사상》으로 등단.
 시집『너의 반은 꽃이다』『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나비가면』, 
 산문집『당신은 시를 쓰세요, 나는 고양이 밥을 줄 테니』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