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너는 / 전윤호

by 丹野 2024. 9. 4.

너는

   전윤호



왜군이 독립군의 목을 작두로 자를 때
가족들을 교회에 몰아 놓고 불을 지를 때
지진이 났다고 조선인을 사냥해 죽일 때
사내들은 잡아가 탄을 캐게 하고
처녀들을 잡아가 노리개로 삼을 때
쌀은 다 실어가고 콩깻묵을 먹일 때
무슨 공덕으로
이 땅에 다시 태어나
김구를 죽이고
소녀상을 욕보이고
이 나라의 녹을 받으며 왜놈 편이 되는 게냐
배워서 친일하고
정치해서 친일하고
이 나라 군대 계급장 달고 친일하면
누구에게 칭찬 받고
누구에게 충신이 되는 게냐
홍범도가 만주에서 왜놈들을 무찌를 때
총알 하나 보태지 못한 것들이
유관순이 안중근이 옥에서 죽어갈 때
입도 뻥끗 못한 것들이
무슨 낯으로 지금 이 땅에서
푸닥거리나 하면서
떵떵거리며 사는 게냐



               —월간 《문장 웹진》 2024년 9월호
---------------------
전윤호 / 1964년 강원도 정선 출생. 199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이제 아내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순수의 시대』 『연애소설』 『늦은 인사』 『봄날의 서재』 『슬픔도 깊으면 힘이 세진다』 『밤은 깊고 바다로 가는 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