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앉아도 될까요
김재근
너는 아프다
아픈 너를 보며
같이 우울해야 할까
혼자 즐거워도 될까
처음 걷는 사막처럼
처음 듣는 빗소리처럼
어디서부터 불행인지 몰라
어디서 멈추어야 할지 몰랐다
너를 위한 식탁
창문은 비를 그렸고
빗소리가 징검다리를 건널 때까지
접시에 담길 때까지
그늘이 맑아질 때까지
고요가 주인인 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 너를 위한 식탁
촛불은 타오르고
촛불 위를 서성대는 그림자
너를 밝히는 시간
너를 기다리는 시간
시간을 함께 나누려면 얼마나 더 멀어져야 할까
너를 처음 읽는 것 같아
헤아릴수록 빗소리 늘어나는데
너는 오늘의 불안인가
식탁은 불멸인가
수프는 저을수록 흐려지고
빗소리에 눈동자가 잠길 때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너를 위한 식탁
너를 본 적 없어
너를 부를 수 없다
우리를 증명하는 우리의 봉인된 불행
미래에서 미래로 다시 오늘의 불안으로
너를 지울 수 없어
너를 잊을 수 없다
너를 인정해야 할까
불행이 너라면
우리가 불행이라면
같이 앉아도 될까요
여기밖에 없어서요
여름의 발들
김재근
풀벌레의 잠속에서 여름은 시작되었다
바람을 놓친 풍향계의 느낌으로
떠오르는 잎사귀
체온은 느려진다
몸속에서 흐르는 고요
고요가 다다를 때쯤
여름은 시간 너머로 몸을 데려갔다
고요를 입는 시간
고요를 점멸하는 시간
시간 너머를 걷기 위해 몸을 벗는다
고사목 사이 벗어놓은
숲을 떠도는 죽은 새들의 발들
바람이 짙어지면 누구도 숲을 빠져나올 수 없겠지
귓속이 뜨거워
여름을 알게 되듯
미로 속으로 미아가 찾아들 듯
몸은 잊기로 한다
밤이 오래 머무르면
그림자는 몰래 몸을 건너와 자신의 식은 발을 보여 주었다
낮과 밤이 부르는 착각
한낮의 태양이 그림자를 용서하듯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환청처럼
죽은 새는 언제나 저녁을 낳고
풀벌레의 잠속으로 여름은 발자국을 옮겨 놓았다
헤라(HERA)
김재근
누구나 고아가 되는 멕시코만灣 구름 아래 드는 흰 바람, 파도에 휩쓸리는 데킬라와 시끄러운 취기, 자신의 이름은 잊는다
처음부터 물고기였는지 모른다
숨 쉴 수 없는
여기니까
구름은 떠오른다
혼자니까
파도에 떠밀려 온 그림자가 벗어둔 붉은 아가미
바라본다
해변에 펄럭이는 파도 소리
귀를 잃은 태생의 무늬
오늘은 어떤 얼굴을 가질까
오늘은 어떤 표정을 가져야 할까
왔던 길을 다시 오르는 뱀장어처럼 취한 강을 거슬러
누가 길을 잃은 지도 모른 채 신발을 잊듯
그림자를 잃고
저녁을 태우는 태양
누구도 두 번 울 수는 없겠지
한 번은 어쩔 수 없지만
해변을 걷는 물새가 남긴 발자국
목이 말라 선인장은 멈추는데
누구도 물속 아가미가 자신을 찌르는 가시인 줄 몰라
뜬 눈으로 잠드는 물고기
물속에 녹을 수 있을까
입김으로 구름이 미끄러진다
물속을 떠도는 영혼 같은
지느러미
비가 온다
울다가 죽은 그림자 빗속에서 오래 본다
무늬를 위한 시간
김재근
잠이 가물가물 할 때
누군가 날 보고 있다는 느낌
그럴 때 살며시 눈을 뜨면 천정의 무늬는 가만히 내려와
내 곁에 눕는다
눈과 눈 사이에도
말할 수 없는 적막이 있어
한 눈이 다른 눈 속으로
자신의 무늬를 찾아 헤매는 밤
어떤 무늬는 내 방을 몰래 다녀간 사람이 흘린 그림자 같기도 하고
혼자 있을 때 손톱이 까매지도록 만지는 그늘 같기도 하다
나는 젖은 아가미를 두고 온 물속 물고기였는지
입을 벌리면 입속에 고인 무늬들은 물비늘 털며 창문을 열고 날아가 버린다 어쩌면 나도,
누군가의 무늬를 그리워하며 영원히 우주를 떠도는 건지
이 방을 서성이는 무늬의 행로는 불을 켜면 놀라 달아났다가
어느 날 불쑥 돌아와 가만히 내 눈에 젖은 먼지 하나를 눕히는 것이다
장마의 방
김재근
여긴 고요해 널 볼 수 없다
메아리가 닿기에
여긴 너무 멀어 몸은 어두워진다
시간의 먼 끝에 두고 온
목소리
하나의 빗소리가 무거워지기 위해
몸은 얼마나 오랜 침묵을 배웅하는지
몸 바깥에서 몸 안을 들여다보는
자신의 눈동자
아직 마주친 적 없어
침묵은 떠나지 않는다
말없이 서로의 몸을 찾아
말없이 서로의 젖은 목을 매는 일
빙하에 스미는 숨소리 같아
잠 속을 떠도는 몽유 같아
몸은 빗소리를 모은다
저녁의 부력
김재근
1
물속 저녁이 어두워지면
거미는 지상으로 내려와
자신의 고독을 찾아 그물을 내린다
미로 속, 미아가 되어
지구의 차가운 물속으로 눈동자를 풀어놓는 것이다
몸이라는 악기
출렁이는 몸속, 물의 음악
북극을 감싸는 오로라의 젖은 메아리처럼
허공에 매달려
시간이 무뎌질 때까지
거미는 스스로를 배웅하는 것이다
2
비행운을 그리며 날아가는 어린 영혼들
어느 물속에서 잠들까
태어나 처음 듣는 울음에 귀가 놀라듯
태어나 처음 보는 눈동자에 눈이 놀라듯
자신에게 숨을 수 없어
거미는 스스로를 허공에 염하는 것이다
3
물속 지느러미보다 느린 저녁이 오고
늦출 수 없는 질문처럼
말할 수 없는 대답처럼
스스로 듣는 거미의 잠
잠 속이 밝아 뜬 눈으로 밤새 눈알을 태우는
몸속 까마득한 열기, 식힐 수 없다
촉수를 뒤덮는 시간, 늦출 수 없다
어떤 부력이 저녁을 떠오르게 할까
허공의 기억만으로 흐려지는
여기는 누구의 행성인지
누구의 무덤 속인지
대답할 수 없기에
체위를 바꾼 기억이 없기에
몸속에 고이는 게 잘못 흘린 양수 같아
매일 젖은 몸을 말리며
매일 젖은 눈을 더듬으며
허공을 깁는 것이다
거미줄에 매달려 식어버린
지구의 저녁, 거미의 울음 같아 만질수록 쓸쓸하다
아흐레 밤에 듣는 화음
김재근
사제의 목소리는 아름다웠다
미사포를 쓴 채 빗소리를 듣는 사람들
누구도 울지 않았고 누구도 무뎌지지 않았다
성호를 그으며 쏟아지는 빗소리
가시 면류관을 쓴 채 사제는 벽화 속을 걸었다
발자국이 너무 느려
제자리인 듯 바람은 불었고
바람을 볼 수 없어
누구도 자신이 벽화라는 걸 알지 못했다
무릎에 고이는 숨소리
누구를 떠올리는 건지
젖은 눈 속을 흰 나비가 오래 날았고
몇 겹의 이명이 귓속을 두드렸다
믿음이 부족한 걸까
얼마나 더 오래 걸어야 할까
걸을수록 멀어지는데
눈동자에 왜 비가 올까
아흐레 밤에는 빗소리가 떠다녔다
높고 깊게
느리게
파이프 오르간이 울고
벽화 속
산 채로 죽은 자 곁에 머무는
빗소리
사제의 죽은 눈
흰 고요
목이 가늘어졌다
누구도 자신의 울음을 들을 수 없어
누구도 자신이 울음이 되어 가는지 몰라
죽어서도 듣는 화음
빗소리
번개가 밤을 밝히자
산 자의 얼굴이 죽은 자보다 어두웠다
ㅡ시집 『같이 앉아도 될까요』(시인의 일요일, 2024)
김재근 / 1966년 부산 출생. 2010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무중력의 화요일』 『같이 앉아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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