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산 평론집 『소수자의 시 읽기』
시인의 윤리와 소수자로서의 시인
시인은 아이러니한 존재이다. 쉽게 말해 불량함이 윤리가 되는 존재이다. 세상의 가치에 반하고 질서에 순응하지 않으며 권력이 쳐 놓은 질서를 애써 거부하는 불량함을 통해 삶과 세상을 성찰하는 윤리를 실천한다. 비윤리 또는 탈윤리가 윤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가치에 순응하고 규범화된 윤리를 맹종하는 시인은 비윤리적이라 단언할 수 있다. 더러 그러한 시인들이, 기존의 가치관에 안주하며 위안을 느끼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거나 권력의 시혜를 얻어 안락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규범의 강요에 신음하고 있을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속박을 외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비윤리적이고 반도덕적이라 할 수 있다.
종교적 교의를 설파하고 정치적 이념을 선전하여 사람들에게 꿈을 갖게 하는 것은 시인의 윤리가 아니다. 그것은 시인이 갖지 못한 또는 시인이 이미 버리고자 한 권력의 역할이다. 시가 권력에 복무할 때 시인은 타락한다. 시인이 아무리 숭고한 종교적 교의나 정의로운 정치적 이념을 전파하더라도 그때 시인은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라 권력의 입이 된다. 시인은 권력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에 불량하게 대들고, 그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들의 꿈을 대신하는 사람이다. 시는 자유의 다른 말이다. 때문에,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한 시와 시인은 비윤리적이다.
이런 자유와 윤리를 실천하기 위해 시인은 소수자여야 한다. 시인은 사회적 기득권의 혜택과 지배적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각종 지배 권력을 통해 요구하는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여기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해 상상할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인 ‘소수자의 시 읽기’는 이런 의미에서 붙여졌다.
사실 ‘소수자의 시 읽기’는 모호성을 가진 비문이다. 세 가지의 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소수자의 언어인 시를 읽는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시인 중 소수자 시인의 시를 읽는다는 뜻이다. 필자의 얘기를 빌리면, 마지막으로 소수자로서 필자 자신이 시를 읽는다는 뜻을 가지기도 한다. 이 책의 제목 ‘소수자의 시 읽기’라는 말은 이 세 가지 의미를 모두 포괄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시인들은 모두 아직 문단에 이름이 크게 알려진 시인들이 아니다. 아직 활동이 미미한 신진 그룹에 속해 있거나, 오래 시를 써 왔음에도 숨어서 활동해 온 시인들이다(물론 이들 중에는 이미 대세 시인으로 자리잡은 경우도 더러 있다). 필자는 대세에서 벗어나 마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이 시인들의 시에, 우리 시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움은 그들에게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시인들을 다루고 그들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역시 소수자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소수자’라는 세 가지 의미를 집약하면서, 필자의 무한한 시와 시인에 관한 성찰과 사랑의 여정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제1부 소수자의 시 읽기
1. 시인은 무엇을?
- 김경성, 사윤수, 송승언 시인의 시들
들어가며
시인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사하는 사람이 아니다. 희망을 주기 위해 사람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들을 따르게 하는 것은 시인들의 역할이 아니라 정치가의 역할이다. 하지만 이런 희망이 크게 실현된 적은 별로 없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이 희망을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로 만들어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이용할 뿐이다.
시인은 위안을 주는 사람도 아니다. 사람들의 정신적 상처를 위로하고 사라진 삶의 지표를 새롭게 세워주는 역할은 시인이 아니라 종교인이나 때로 ‘국민 멘토’라 일컬어지기도 하는 몇몇 도덕군자들의 몫이다. 이들 역시 현실적인 삶의 고통과 사회적인 모순에서 오는 인간 간의 갈등을 해결할 수는 없다. 단지 이 모든 문제를 개인의 차원에서 잠시 잊게 만들어 줄 뿐이다.
시인은 또한 쾌락과 오락을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TV만 켜면 쏟아지는 대중문화에서 훨씬 많이 또 자극적인 형태로 제공해 준다. 하지만 그것으로 진정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쾌락과 오락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만들고 결국 우리를 거기에 길들여지도록 할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시인은 뭐 하는 사람들이고 시는 도대체 무엇에 소용되는 것일까? 여기에 다룰 신진 시인들이 이 점에 대답해 준다. 그만큼 이들의 시는 진지하다는 말이기도 하고 이들의 시가 보여준 언어사용과 시적 주제가 탄탄하고 깊이가 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1. 오래된 것들에 대하여
김경성의 시는 한 마디로 속도에 대한 저항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속도가 지배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유행과 하루가 멀다고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상품, 이런 변하는 세상에서 오래된 것들은 낡은 것이 되고 사라지고 무시되어야 할 것이 되고 만다. 오죽 하면 “변해야 산다.”라는 말까지 나오겠는가? 하지만 잠시 뒤로 물러서 누구를 위한 변화를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김경성의 시는 바로 이런 질문을 던져준다.
백 년이 넘는 시간이 폭설에 무너졌다 생살이 찢기어지고 뼈마디가 툭툭 부러졌다
중심을 잡아주는 뿌리는 지층 속의 기운을 받아들였던 곳
우지끈 부러질 때, 울음의 파문은 바깥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거북이 등 같은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다
…(중략)…
상처에 고여있는 나무의 울음이 출렁이고
내 안에서 자라는 울음의 나무는 숲이 되어서
심하게 흔들린다
- 「울음의 바깥」 부분
시인은 태풍에 부러진 나뭇가지를 보고 아픔을 느끼고 있다. 백 년이 넘은 나무가 한순간의 태풍에 무너졌다는 것은 급격한 변화의 하나다. 세월에 세상의 모든 것이 바뀌듯이 오래된 나무가 부러지고 무너지고 때로 고사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변화의 한 과정일 뿐이다. 그런데 시인은 왜 이런 변화에 이토록 “내 안에서 자라는 울음”이라고 할 정도로 슬퍼하고 있을까? 그것은 이 변화가 주체를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심하게 흔들린다”라고 표현했듯이 나무는 뿌리로 중심을 잡고 큰 가지로 하늘을 떠받드는 나무의 본성은 점차 사라져 갈 운명에 처하리라는 것을 시인은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서고의 열쇠를 잃어버렸다
바다에 빠트린 열쇠를 찾으려면 아침을 기다려야 한다
초승달이 바닷물에 옅은 빛을 내려놓을 때 바다는 초승달 빛만큼의 길을 물 위에 그려놓았다
새벽안개가 바다 안쪽까지 감싸 안은 팔을 풀어놓자 거짓말처럼 서고의 문이 열렸다 누군가 읽다가 접어놓고 간 책을 펼치니 흠뻑 젖어있다
별들이 사산한 불가사리가 책꽂이 아래에 떨어져 있다 무엇을 움켜쥐고 있었는지 불가사리의 다섯 손가락이 아직도 구부러져 있다
끝이 아니라고 잠시 뒤돌아 나가는 썰물의 끝자락을 움켜쥐었지만 나는 끝내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습한 서고에 앉아서 읽지 못하는 상형문자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툭 하고 어깨를 치고 가는 바람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주저앉아
한 생애를 다 보낼 것만 같았던 봄날이었다
- 「오래된 서고」 부분
시인은 바다를 오래된 서고로 비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많은 것들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순환과 그 속에서 수 억 년을 지내며 만들어진 온갖 자연물들이 만들어 놓은 흔적들은 그 어떤 책보다도 풍부한 정보와 역사를 담고 있기에 그것이 서고라는 시인의 비유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시인은 그 서고가 오래되었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는 이 오래된 것들을 잊고 지내고 있으므로 시인은 그것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정보에 목말라 한다. 오래된 것들은 이미 시효를 상실했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무엇인가가 우리를 좀 더 발전시켜 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지러울 정도로 속도를 추구한다. 하지만 시인은 오래된 바다에서 그곳의 오래된 언어를 찾고자 한다. 거기에 우리가 보지 못한 진실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시인 역시 그 오래된 언어 속에 완전히 빠져들지 못한다. “툭 하고 어깨를 치고 가는 바람” 즉 현실의 저항이 있기 때문이다.
2.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큰 믿음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될 수 있고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다는 인간의 욕망을 누군가 끊임없이 부추긴다. 이 부추김으로 사람들은 물건을 만들고 돈을 벌고 또 소비한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까? 사윤수 시인은 이를 의심한다.
눈은 내리지 않았다 마른 나무에 휘감아 놓은 루미나리에가 나무에게 빛나는 축복인지 뜨거운 사슬인지, 내가 그것을 보는지 그 무수한 불의 눈이 나를 보는지 유행이 지난 인식론의 입구에서 나는 잠시 헤매었다
…(중략)…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의 주소는 어디인가 내 기다림은 성탄이나 눈(雪)이 아니다 암묵적인 합의의 신호와 숫자들, 지금은 503번 버스를 기다린다 다른 등번호를 달고 누가 먼저 달려와 준다면 나는 기다림의 대상을 바꿀 수 있을까 겨울이 봄날 같으면 축복인지 난감한 일인지 어룽거리는 햇살 속에 진눈깨비 흩날린다 버스는 오지 않고 여기, 늙은 눈물이 시큰거리는 겨울 오후
- 「겨울 미로」 부분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고 인식하는 주체를 스스로 반성한다는 것은 인식론이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이 시에서 “유행이 지난”이란 수식어를 붙인 것처럼 이미 사람들의 관심 밖이다. 나는 이미 내가 가진 것으로 규정되어 있고 내 존재의 의미는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따라 만들어진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위의 인용한 두 번째 연에서처럼 모든 것이 숫자로 설명된다. 사물의 본질이나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가 없다. 나의 모든 것은 내가 아닌 숫자에 의해 모두 규정되고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스스로 의미를 갖는 내가 아니라 숫자로 규정된 나, 즉 연봉의 액수, 아파트의 평수, 차의 배기량으로 규정된 나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런 현대사회에 사는 인간들은 누구나 없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자신이 어쩔 수 없는 거대한 힘을 마주하는 숭고를 경험하게 된다. 시인은 그런 경험을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누구에게 바치는 옷 한 벌이
이토록 크고 높은가
찬란한 스테인드글라스
아득한 고딕 궁륭 아래
모두 죄인이거나 천국에 가까워지려거나
이 불편한 인간의 자리
병을 주고 약을 파네
그대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신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처음 그대가 살던 그곳으로 돌아가라.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치 않다. 빨리 떠나거라.
- 「쾰른 대성당」 전문
물론 이 시는 쾰른 대성당을 본 숭고한 광경을 노래한 작품이다. 하지만 이 쾰른 대성당은 우리 시대 도처에 존재한다. 내가 살 수 없는 고급 아파트,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좋은 직장, 내가 가볼 수 없는 고급 호텔이 모두 쾰른 대성당이다. 도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앞에서 항상 얼쩡거리며 살고 있다. 시인은 거기에 대고 “빨리 떠나거라”라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인용해서 우리를 나무라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떠나지 못한다. 성당에 가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자본의 힘 앞에서 얼쩡거려야 우리의 모든 욕망이 충족되어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모두들 바벨의 탑을 쌓고 또 기어오른다. 현대사회의 거대한 욕망과 그 욕망의 조직화는 우리를 어쩔 수 없는 무력감으로 이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우리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헛된 환상을 심어주어 이 무력감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겪는 모든 좌절과 그 상처는 그래서 생긴다. 사윤수 시인은 숭고의 경험을 통해 이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좌절은 겸손과 아량으로 변화한다. 그게 바로 “그대가 살던 그곳”인지 모를 일이다.
3. 비어 있는 것들에 대하여
세상이 변화할수록 사라질 운명을 타고난 것들은 늘어나게 된다. 우리가 바로 어제까지 썼던 기계는 이미 낡은 것이 되고 우리가 방금까지 신봉했던 사상은 낡은 것이 되기에 십상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이 모든 것들이 파괴되고 소멸해가는 폐허이기도 하다. 송승언 시인은 바로 이것을 ‘빈터’라는 말로 비유하고 있다.
웃고 있다 얼굴은 절대 아닌 것들이 빈터에 들어차 있다 빈터에서 그것들이 자라고 있다 그것들이 웃어댄다 그것들이 깔깔거린다 그것들이 일그러진다 그것들이 무너진다 빈터에서
무너진 것들 위로 비가 무너진다 빛이 무너진다 무너진 것들의 형상으로 무너진다 무너진 것들의 그림자가 유령처럼 일어서고자 한다 꽃의 잔상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모두 일어서지는 못하고 모두 사라지지도 못하는 빈터에서
잔해를 헤치고 새로운 꽃이 자란다 늘어뜨린 줄기를 곧추세우려 한다 꽃은 제 이름도 혈통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웃지는 못하고 있다
- 「환희가 금지되었다」 부분
우리는 모두 이 폐허인 빈터 위에서 모든 것을 만든다. 시인은 이를 “꽃이 자란다”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기쁜 일이 아니다. 빈터 위에 뭔가를 만든다는 것은 웃을 일이 아니다. 그것이 아무리 꽃이라 하더라도 빈터를 꽉 채우며 새로운 도시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고 또 만들어가는 빈터는 살아있는 것들의 무덤이기 때문이다. 이를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골길을 걸었어
비가 내리고 있더군
빈터가 있더군
비를 맞는 포크레인이 있더군
큰 구덩이를 파고 있었어
돼지들이 허우적대고 있더군
빠져나오려 애쓰고 있더군
그 위로 검은 흙이 덮이고
시골길을 걷는데
돼지들이 울더군
울다가
그치더군
- 「포크레인」 전문
물론 이 시는 구제역에 걸린 돼지들을 살처분하는 광경을 보고 쓴 작품이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가 사는 땅이 온통 살아있는 것들의 무덤과 폐허 위에 존재한다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역시 빈터에 들어가서 허우적대고 빠져나오지 못하는 돼지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는 사회학적 파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우리가 하는 일 자체가 허무를 만드는 일이다. 무엇인가를 만들고 창조한다고 하는 작업마저도 앞선 것들을 지우고 사라지게 하는 그것들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마는 허무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다음 시를 읽어보면 이를 이해하게 된다.
숲을 탐색했다 숲이 사라졌다
길을 모색했다 또 실패했다
사라진 숲속을 헤매다
물이나 돌을 찾다 보면
그 사이쯤의 늪
물이 없으니 물이 없다 말하고
나무가 없다 말하니 나무가 없는
…(중략)…
흥얼거렸네
어디서 배운 노래인지도 모른 채
어디서 다 본 것들이지
어디서 다 들은 이야기들이지
- 「베테랑」 부분
우리가 숲을 들어가면 숲이 사라진다. 우리가 찾는 것은 사실 없는 것이다. “물이 없으니” “물”이라는 말이 필요하고 그것이 없다고 말을 한다. 반대로 “나무가 없다”고 말을 할 때 나무는 없는 것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무엇을 욕망한다는 것은 그것의 결핍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욕망을 부추기고 또 충족시킬 것 같은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결핍으로 더 많은 욕망의 유혹을 느낀다.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모두 능숙하게 뭔가를 한다. 그래서 모두 베테랑이 되고 마니아가 되어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누군가 만들어 놓은 타인의 욕망 “어디서 다 본 것들”일 뿐이다. 내가 하는 나의 일마저 이제는 그것은 빈 곳을 만드는 허망한 일일 뿐이다. 우리는 결국 빈터를 만드는 베테랑일 뿐이다.
저자 : 황정산
황정산 평론가는 1993년 『창작과비평』으로 평론활동 시작. 2002년 『정신과표현』으로 시 발표. 저서로는 『주변에서 글쓰기』 『쉽게 쓴 문학의 이해』 등이 있다. 현재 종합문예지 『불교문예』와 시전문 문예지 『P.S』의 주간을 맡고 있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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