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울대를 두드리며 신기루처럼 오는 이 / 김경성
속성을 잃어버린 것들도 긴 시간 끝으로 가서 보면 처음의 마음이 남아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입술의 지문은 지워지고 밀물과 썰물의 주름을 타며 인도차이나반도 눈썹 끝에 올라가 있다. 모란문찻사발, 뿌리가 없는 그는 바닷속에 노숙할 집을 지으며 가끔 바다의 등지느러미에 올라가서 별이 되고 싶었으나 바닷속 둥근달로 떠 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맨발로 보낸 몇 달 동안 내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들이 지금도 참파꽃처럼 흔들린다.
새벽하늘이 빛을 바다에 내려놓는 시간이면 집을 나섰다. 간조의 시간이 오면 상어의 눈과 입이 그려져 있는 목선이 물고기를 가득 싣고 들어온다. 양동이를 든 사람들이 줄지어 바다로 들어가서 바구니 모양의 작은 배를 노 저으며 목선에서 물고기를 담아낸다. 백사장에 쏟아놓은 물고기 속에는 유난히 비늘이 반짝이는 물고기가 많았었다. 뿔이 여러 개 있는 소라, 나사무늬긴고동, 표범무늬소라 등 처음 보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물자락에 닿는 것 마냥 마음이 흔들렸다.
하루 이틀 사흘 한 달 두 달 그렇게 습관처럼 가다가 바다 끄트머리에 걸리고 만 나는 어느 순간 뱃사람들과도 익숙하게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간단한 인사만 주고받았으나 그 마음 알겠다고 목선을 수리하는 동안, 배에서 나온 바닷물 먹은 나무를 보여주기고 하고, 페인트가 벗겨져서 붉거나 푸른색이 오묘하게 보이는 활처럼 휘어진 목선의 그림자가 내 발등에 내려앉기도 했다. 그렇게 가고 또 간 후에서야 조금씩 시가 말을 걸어왔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가다듬지 않으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시의 그림자들, 모든 순간순간 깨어있을 때, 습자지에 물이 스미듯 그렇게 왔다. 새벽 사막을 맨발로 걷고, 티베트 하늘호수, 아프리카 작은 호수, 카스피 해, 카리브 해, 어디에서나 맨발로 들어가서 말할 수 없는 어떤 교감의 순간이 오면, 시는 그때 뜨거운 몸으로 왔다.
인도차이나 반도 폭염에 타버릴 것 같아도 가고 또 가고 설마 죽기야 하겠느냐고 닿았던 그 바다 모래 속에 달처럼 떠 있던 모란문찻사발 하나,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 머물렀던 시간의 흔적인지 나침판도 없이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다. 바닷가에 목단이 그렇게 피어 있었다.
어떤 시 창작 교본처럼 시가 써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내가 그 대상 속에 온전하게 들어가 깊게 침잠하면서 그 대상이 온전하게 내 속으로 들어와서 하나가 되었을 때, 시는 깊은 호흡으로 한 자 한 자 내게로 왔다. 시는 익숙해진 대상을 자세히 오래 관찰하면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폐사지에는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존재하고 숨 쉬고 있는가, 그을음 가득한 주춧돌 위에 오래 앉아 있어 보면 몸을 뚫고 올라오는 불의 뜨거움이 있고, 베어진 나무의 그루터기를 보면 그 나무의 전생이 보기도 하고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살았던 새들의 날갯짓이 보이기도 한다.
시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 시는 스스로 걸어서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열고 마음 안에 수많은 것들 들여놓았을 때, 아주 얇은 사이로 스며드는 것이다. 나는 가끔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뜨거움이 화락 몸을 훑고 지나가면 시가 써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본다는 것, 과연 얼마나 많은 것을 세밀하게 볼 수 있을까? 카메라를 들고나가면 세밀하게 볼 수 있는 망원렌즈 안 가져간 것이 후회되고, 망원렌즈 일 때면 모든 풍경을 한꺼번에 다 담을 수 있는 광각렌즈가 필요해진다. 우리는 한 번에 모든 것들 다 볼 수는 없다. 한 행 한 행 읽을 수밖에 없듯이, 세밀하게만 본다고 그것을 과연 다 봤다고 할 수 있을까?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전에 전체 풍경을 보고 그다음 시야를 점점 더 좁혀나가면서 아주 세밀한 부분에 셔터를 누른다. 시도 마찬가지다. 시 한 편에 모든 것들 다 담을 수는 없는 일, 어떤 주제 하나를 가지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시를 쓸 때는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누군가 불러주는 것처럼 써나가게 되고, 어떤 공식대로 시가 써지지는 않는다. 많은 것들을 체험하면서 느꼈던 것이 내면에 가득 차 있을 때, 상상력도 풍부해지고 자신만의 독특한 시어로 시를 쓸 수 있다.
음악, 미술, 영화, 무용, 역사, 소설, 시집, 문화, 여행 등 많은 것들을 깊이 탐구해나가는 것이 자신만의 시창고를 짓는 일인 것 같다. 무엇이든 한번 시작하면 끊임없이 해야 조금 알 수 있을 정도이니 배움의 끝이 없다는 말이 실감 난다.
무엇에 미쳐야 한다. 한때는 꽃살문에 빠져서 새벽 버스를 타고 절집을 찾아다녔었다. 절집에 가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꽃살문만 보였으니, 종일 찍은 사진이 모두 꽃살문 일 때도 있었다. 또 혼자 걷기에 몰입해서 제주 올레길이며 도성 길, 한강 길 등을 쉼 없이 걷기도 했다. 내가 파놓은 함정에 내가 빠져버린 것이다. 무엇에 미친다는 것은 좋은 일이나, 맹목으로 빠져드는 일이 나에게 독인 줄 몰랐었다. 그렇게 자기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 깊이 공부를 하다 보면 내가 아는 것을 시에 표현하고 싶어서 설명을 덧붙이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내가 공부해서 수 백 번의 퇴고를 거쳐 발표한 시는 내 만족에 끝나지만, 덧칠하지 않고 덤덤하게 꼭 필요한 언어로만 쓴 시는 편하게 읽히는 시가 된다.
내 시의 독자는 오로지 나 혼자 뿐이라는 생각으로 시를 쓰고 퇴고가 끝나면 소리 내어 읽어본다. 휴대폰에 녹음을 해놓고 생각날 때마다 들으며 되새김질한다. 오직 나만의 소소한 방식이다.
펜더믹 시대에 우리 모두가 고립되었다. 그 이전부터 어쩌면 나는 나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철저하게 나를 내 마음의 방에 가둬두었다, 날아가는 새들과 나무와 바람과 하늘과 구름, 빗방울은 볼 수 있게 커다란 창문이 있는 방, 그래도 숨 쉴 창문을 만들어 준 것이 내가 나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몸을 둥글게 말아서 깊숙이 더 깊숙이 소라의 방 속으로 들어가 말문을 닫는 것, 그 이후에 사라진 말속에서 생각의 새순이 돋아날 것이라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새들의 소리를 듣고, 해 뜨는 시간과 해 저무는 시간을 읽을 수 있는 소리의 습성을 배우며, 더 많이 외로워지고 더 많이 고독해지고 속으로 울음을 삼키는 법을 연습하고 있다.
너무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워서 슬프다. 피어있는 꽃보다 지는 꽃이 더 아름답다. 바다에서 폐허로 폐허에서 사막으로 달려가는 붙잡을 수 없는 바람의 무늬들, 나도 바람이 되어 말할 수 없음을 몸으로 읽어낼 때, 심해어처럼 내 속에서 어떤 무늬들이 출렁거린다.
연민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고요하게 내가 나를 껴안는 시간, 소리도 없이 목울대를 두드리며 시의 첫 행이 신기루처럼 아슴하게 온다. Fata Morgana
- 계간<시와산문> 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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