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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丹野의 깃털펜/시집『와온』

잊혀진 사벌국

by 丹野 2020. 9. 15.

병풍산성 / p r a h a

 

 

잊혀진 사벌국

 

김경성

 

 

  생강나무꽃 향기 으깨어져서 길을 막는다 찔레 무더기 옷깃을 잡아당기며 쉬었다 가라고 한다 한 번도 닿은 적 없는 잊혀진 사벌국으로 가는 병풍산성 길, 몸 펼쳐서 길을 들어 올리고 있는 늙은 조선 버드나무 제 몸속에 깊은 우물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다

 

  버드나무의 자궁으로 들어가 앉으니 꿈결인 듯 노루 한 마리 저만치 달아나고 도굴꾼이 파헤쳐 놓은 여러 기의 고분 근처 그대의 지문이 묻은 그릇 조각과 항아리 조각 제 모습 드러낸다 몇 개 떨어져 있는 꿩 깃털은 매의 발톱 흔적이니 아직도 이곳은 사벌국의 시대 그보다 더 아득한 시간으로 되돌려놓고 누군가 시간의 그물에 걸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깨어진 기왓장이 아니어도 포개어진 흔적에 걸려서 햇빛 기울어지는 고분으로 들어갔다 무너진 석벽의 틈으로 새어나오는 바람의 출처는 어디이고 누군가 있었던 흔적 하나 없는 것은 왜 그렇게 서러운지 고분의 천정 뚫린 구멍으로 보이는 낙동강이 아득하다

 

  보이는 듯 보이지 않게 지층 속으로 가라앉은 사벌국, 오랜 시간 멈추지 않고 부는 바람 앞에 병풍 산성 길 켜켜이 드러나고 있다

 

  바람도 시간도 모두 강물 속으로 들어가 얼굴 내밀지 않는다, 고요하게 흘러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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