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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丹野의 깃털펜/시집『내가붉었던것처럼당신도붉다』

수련이 지고 난 뒤, 마침내 찾아온 '황홀'

by 丹野 2019. 8. 13.




김경성 詩集 『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


 

[해설]

수련이 지고 난 뒤, 마침내 찾아온 '황홀'

박성현 (시인)

 

 

 

‘수련’, 그 은밀한 매혹의 시작

 

 

     가까이, 손이 닿을 듯한 거리에 수련이 있다. 연못에 뿌리를 내리고 짙은 어둠을 끌어올리는데, 수련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빛과 주변의 온갖 소리들을 흡수하면서 허공을 향해 자신을 활짝 연다. 그리고 수련은 해독되지 않은 고대의 문자처럼 내면으로 침잠한 채 우리를 바라본다. 회화적이며 음악적이고 때로는 암시와 상징으로 가득 찬 수련이 있고, 또한 세계를 압축하듯 피어 있는 수련이 있다.

     그런데 ‘수련이 있다’라는 이 사태를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수련이 피고 지기까지의 그 경이로움에 대해 우리의 언어는 과연 충분히 형용할 수 있을까. 이성복 시인이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라 부른, 이 자명한 불가능성에 대해 우리는 그 어떤 문장으로도 확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는 언어를 질료로 한다는 1차적 사실로 인해 시인은 그 숙명적 좌절에 직면해야만 한다. 요컨대, 수련이 피고 지기까지의 시간들과 ‘피어-있음’에 수반되는 모든 가능성과 비밀들의 언어적 형상은 비록 ‘실패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마주치고 극복해야만 하는 필연적 고통이라는 것.

     다시 수련이 여기에 있다.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하고 필연적인 형상이다. 넓고 두툼한 이파리에서 긴 꽃대가 뻗어 나오고 꽃봉오리가 맺히며 순간의 힘으로 꽃잎을 열 때도, 수련은 자신의 인상과 몸짓, 영혼을 조금씩 밀어내며 우리가 ‘수련’이라 부르는 것을 온전히 표현한다. “빗방울 소리에 밤새 뒤척거리던 수련이 몸 여는 시간”조차 “물큰한 향기 내뿜는 매실의 사리가 나무 아래 그득”한 황홀이다.(「연곡사 동부도」). 만지면 사라질 듯 부드러우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색을 바꾼다. 습지에 햇살이 가득하면 투명하다 못해 분홍빛이 감돌고, 구름이 잔뜩 낀 날에는 머리를 휘어감은 빛을 한꺼번에 풀어버리기도 한다. 물론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밤의 침묵과 고립, 냉소조차도 수련이다.

     이처럼 수련이 가진 모든 육체의 결들은 바로 수련의 ‘표현’이다. 그리고 시인만이 그 ‘표현’을 ‘언어-그림’으로서 농밀하게 그려낼 수 있다. 수련은 시인을 향하고, 시인은 귀를 열어 수련의 말을 듣는다. 다시 말하자. 시인과 수련의 운명적 만남, 혹은 필연적 관계 맺기라 부를 수 있는 이 사태가 ‘표현’이란 단어의 직접적 의미로써, ‘세계’는 시인의 언어를 통해 새롭게 나타난다. ‘시인’이란, 수련의 향취와 색깔, 그리고 옅은 안개에도 기울어지는 꽃잎의 한없이 가벼운 무게와 바람이 비켜간 자리에 남은 미세한 기울기를 보면서 끊임없이 그 언어적 가능성을 타진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닌가. 이른바 은밀한 매혹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세계의 내적 표현 혹은 ‘발자국’이 만들어낸 상형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 시인에게 다가오는가. 다시 말해, 세계는 시인의 사유에 어떤 흔적을 남기며, 시인의 삶을 이끌어 가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오직 시인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며, 또한 그가 살아가는 생생한 현재 속에만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수련을 표현하는 것은 ‘나’와 ‘수련’의 현재적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 세계내의 주체와 타자들이 가질 수 있는 (혹은 가져야만 하는) 삶의 의미를 충분히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단독의 개별 세계’에서, 무수한 개체들이 뒤섞이고 스며들며 서로 상관하는 ‘관계적이고 총체적인 세계’로의 도약을 가능하게 만드는 신비롭고 충만한 언어의 소유자다. 이를테면, “부리가 둥글어서 한 호흡만으로도 바람을 다 들이킨다//날개가 없어 날지 못하는 해국/수평선의 소실점에 가닿을 수 있는 것은 향기뿐이라고/부리 속에 향 주머니를 넣어두었다”(「해국」)라며 ‘해국’을 ‘날개가 없는 새’로 환치해 꽃이 필연적으로 짙은 향기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역설하거나, “붉은 눈을 먹은 새들이 부리를 씻는 것을 보았다//나뭇가지를 태우며 솟아오르는 태양의 중심을 향하여 날아가는 직박구리의 몸이 물들면서 팥배나무의 눈이 새의 몸속으로 들어갔다”(「팥배나무」)라며 ‘팥배나무 열매’와 ‘눈’을 등치해 생명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또한 “발아래로 흘러가는 나무와 길은 끝이 없는 길이어서 수만 번씩 제 몸의 비늘을 흔들어야 했다”(「나무 속으로 들어간 물고기」)라며 ‘나무’와 ‘물고기’의 실존이 다르지 않음을 묘파한다.

     이것이 김경성 시인이 등단 이후 지속적으로 추구한 시작詩作의 바탕이자 근본이며, 시인이 집약한 언어의 광휘들이다. 그는 무한히 펼쳐져 있는 사물들의 관계 속으로 스며들어, 그것의 오래된 습속을 단절시키고 균열을 낸다. 그가 마침내 엮어낸『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는 시인이 세계와 대면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감각의 실존이며 세계의 내적 표현이자 울음이고 통각이다.

 

 

어떤 나무는

절구통이 되고

또 다른 나무는 절구공이가 되어

서로 몸을 짓찧으면서 살아간다

 

몸을 내어주는 밑동이나

몸을 두드리는 우듬지나

제 속의 울림을 듣는 것은 똑같다

  

몸이 갈라지도록, 제 속이 더 깊게 파이도록

서로의 몸속을 아프게 드나든다


- 「따뜻한 황홀」부분

 

 

     생활세계에서 ‘이름’은 사물의 본질을 드러낼 때가 많다. 우리가 대상을 ‘절구통’이나 ‘절구공이’로 부를 때는 그것의 사용과 기능을 염두에 둔 것이며, 두 개의 서로 다른 이름은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을 분별하는 척도라는 것이다.‘-통’과 ‘-공이’라는 접미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는 담고, 다른 하나는 잘게 부수는 전혀 다른 사물을 본다. 그러나 시인은 특이하게도 ‘이름’에 함축된 공통의 척도를 읽는다. 그는 “몸을 내어주는 밑동이나/몸을 두드리는 우듬지나/제 속의 울림을 듣는 것은 똑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무슨 이유일까.

     시인이 보는 것은 “몸이 갈라지도록, 제 속이 더 깊이 파이도록/서로의 몸속을 아프게 드나”드는 ‘나무’라는 한 몸이다. 그것이 비록 사용과 기능에 따라 다른 이름을 부여받았고, 또한 다른 사물로 변용되었지만 애초에 그것들은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절구통’과 ‘절구공이’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나무’와 ‘물고기’, ‘해국’과 ‘날개 없는 새’등 시인이 감각할 수 있는 모든 대상에 적용된다. “동박새의 부리에 칼을 꽂아서/동백꽃의 심장을 핥으면/온몸을 던져/바닥에서 다시 꽃으로 피어나”(「숯」)는 생명의 맹렬한 순환같은.

     여기서 시인은 더 강렬하고 더 깊은 경험을 하게 되는데, 세계는 이미 만들어진 것의 총체가 아니라 만들어 져야 할 것들의 총체라는 자각도 함께 수반된다. 이 경험은 일종의 밀교密敎적 비의와도 같아서, 그는 “수많은 방을 들인 한쪽 가지가 흔들린다/흔들림은 수위가 있는 늪이다. 오래전 바람과 밀교를 하며/그 늪에 빠져본 적 있다/구름을 접어서 만든 허공의 계단을 올라가면/그곳에는 흔들리는 생이 있다/느릅나무가 내어주는 잎에 소라 속 같은 방을 만들고 알을 낳았다/나무는 제 몸속에서 끈적한 혀를 꺼내어 알을 감싸주고/산란의 시간은 눈부셨다”(「느릅나무 방」)고 고백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서 산통은 온전히 시인의 감각을 향한다. 셀 수 없을 만큼 무한하고, 그렇기 때문에 모호하고 불가해한 세계에서 시인은 자신이 ‘세계’의 기획자이며, 동시에 세계의 의미와 목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

 

 

백사장에 흩어져 있는 새들의 말과 책 속에서 흘러나온

말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졌다

저릿한 말들이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오! 온몸 가득히 느껴지는 오르가즘

화라락 불붙듯이 한꺼번에 서고를 덮쳐는 해일

속수무책이다


-「오래된 서고」부분

 

 

     “백사장에 흩어져 있는 새들의 말”이란 아무래도 새들이 자신의 온몸을 눌러 찍은 ‘발자국’일 것이다. 그 ‘발자국’은 각각의 새들이 축적한 경험의 함축이며, 자신을 표현하는 의지이자 언어다. 하늘로 솟구칠 때의 놀라운 비행력과 허공에 멈춰 있을 때의 부력도 내재한다. 가벼운 깃털 사이에 스며드는 부드러운 햇살과 스산한 바람, 그리고 새들의 시선에 스며든 원근도 있다. 새들의 발자국은 밤을 열고 닫으며 적극적인 부재를 산출한다. 의외로 새의 ‘발자국’은 중력에서 가장 먼 언어다. 찍히자마자 사라지고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새들은 모래사장에 내려앉아 새하얗게 다가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순간 날아올라 허공을 찢는다. 이것이 시인이 “백사장에 흩어져 있는 새들의 말”에서 읽은 것이다.

     그런데 그는 “책 속에서 흘러나온/말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진다. 발자국의 상형을 (인간의) 문자/언어로 등치하는 일종의 주술 같은 것인데, 그가 이러한 행위를 통해 느끼고 받아들이는 ‘말’들은 아주 사소한 형태라 하더라도 ‘사물의 있음’이라는 놀라운 사태를 담아내고 있다. “내 안에서 살포시 머리를 내미는 씨앗 한 톨/어느 틈에 온몸을 휘감더니 비로소 새들이 날아가는 쪽으로 몸을 튼다”(「천 마리 새떼가 날아올랐다」)라는 문장에 나타난 것처럼 문자화된 ‘상형’이란 이미 또 하나의 ‘생명’(씨앗)이어서 ‘나’를 먹이로 삼고 스스로의 지향을 결정한다는 것. 그는 말들을 어루만짐으로써 세계를 기획하는 자로 도약한다.

     이 사태를 깨닫는 순간, 시인의 손바닥에는 ‘저릿한 말들’이 스며들며 온몸을 관통하는 오르가즘을 만들어낸다. “화라락 불붙듯이 한꺼번에 서고를 덮치는 해일”로 다가오는 속수무책으로 감전되는 ‘말들’의 힘!

 

 

 

‘유목’의 지도를 걷다

 

 

     김경성 시인은 언어의 촉수에 상당히 민감하다. 그의 반응속도는 대상의 나타남과 거의 동일한데, 대상의 이름을 통해 내면의 깊이를 가늠하며, 또한 그 이름들이 가진 ‘공통 척도’(랑시에르)를 통해 세계를 재구성한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이름들은 시적으로 촘촘하게 얽힌 대상의 본질은 물론 그것들의 상징적 관계와 현실적 나타남의 비가시적 충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매개로 작용하며, 세계를 개별의 집합체가 아닌 전체 혹은 내적 공동체로써 변용시킨다.

     때문에 우리는 그의 문장을 ‘항상 주어진’ 세계 속에서 사물들을 (사물자체를 통해) 새롭게 발견해내는 직관이자, 사물들이 함축하는 모든 가능성들을 발현시킬 수 있는 내적 에너지로 말할 수 있다. 세계는 시인의 언어를 통해 비로소 태어나고 또한 의지와 표상을 가지며 자신의 본질을 향해 한 발 더 나아간다는 것. “먼 바다까지 끌고 나가서/부서지도록 던져놓아도 다시 제 속으로 들어와 새살이 돋게 하는/기억들과 손끝에서 왈칵 꽃이 피게 하는/달큰한 추억의 시간/어느 것하나 내 것 아닌 것이 없다”(「풀등」)고 고백하는 시인의 손끝은 이미 세계를 과감하게 괄호 쳐버린 에포케, 곧 ‘방법적 회의’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는 이러한 통찰의 방법적 실편을 ‘유목’이라는 정착할 수 없음을 통해 만들어낸다.

     시인에게 (세계를 향한) 괄호 치기는 ‘유목’과 동일하다. 그의 여정은 머나 먼 아프리카로부터 시작해 아시아와 한반도의 굽이를 돈다. “세렝게티의 밤은 밀림 속 롯지에/전기가 끊기는 밤 열두 시에 시작된다”로 시작하는「세렝게티의 말[言]」은 광활한 초원에서 경험한 법열法悅이고, “흰 옷 입고 빙하기를 건너온 당신/조금씩 제 몸을 녹여 써 나가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젖은 말들/야크의 몸속에서 첫말이 되어 몽클거린다”(「야크의 눈물」)라는 백미의 문장은 종교적 신비까지 엿보인다. 특히「목기미해변에 닻을 내리다」와「섬진강의 봄」「해인사 장경판」「삼층석탑」「추전역」「노고단 가는 길」「비봉리 환목주丸木主」등은 그가 유목을 통해 발견한 한반도의 섬세한 내면이라 할 정도다. 그는 “더는 발자국을 남기지 못하는 편자를 벗고/맨발로 달려가는 목마의 햇길이 수평을 긋고 있다”(「바다로 간 목마」)와 같이 스스로를 ‘유목하는 자’로 표상한다.

 

 

꼬리지느러미 오른편에 앉았다

한 번씩 몸을 비틀 때마다

오른쪽으로 기울여지는 아가미 속으로

산길 꾸러미가 흘러들어 갔다

검은 길은 등지느러미를 따라 흘러가고

물박달나무는 제 몸의 비늘을 벗겨서 속 깊을 그렸다

마치 다하지 못한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연필심이 제 몸의 뼈대가 된 추전역

이따금 제 밑줄 긋고 가는 물고기가 없다면

문장을 이어나가지 못할 것이다

4B연필로 그어놓은 산길 위에 산란하는 물고기 떼

배지느러미에 말간 알을 가득 안고 바다 쪽으로 흘러 갔다

  

당신의 옆줄에 기대어서 내 생도 저물어간다


-「추전역」전문

 

 

     시인은 추전杻田이라 불리는 강원도 태백시를 관통하는 오래된 역사驛舍를 향한다. 가방에는 니콘과 망원렌즈, 그리고 몇 개의 35㎜필름이 있다. 보는 것은 ‘눈’의 작용이라 할 수 없지만, 이 ‘눈’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자신만의 고유한 시선을 가질 수 없다. 카메라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피사체에 닿는 ‘보는 자’의 숨결이고, 그 ‘숨결’이 흩어지며 피사체의 몸을 읽는 행위다. 그는 ‘추전’이란 이름의 유래를 읽고 ‘싸리밭골’의 뚜렷한 질감을 상상한다. 여전히 칼바람은 낮고 넓게 흩어져 있다.

     ‘추전’이란 이름은 싸리밭골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해발 855m에 위치해 있다. 한여름에도 두터운 옷을 입어야 할 정도로 기온이 낮다고 하니 이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표정에는 드문드문 얼음이 박혀 있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상영이 끝난 극장처럼 추전역이 숨죽여 있고 그는 “미처 다하지 못한 말들이” 남은 무대를 바라본다. 셔터에 손이 닿자 시간은 정지한다.

     결코 이어질 수 없는 두 개의 길이 산의 저편으로 뻗어 있다. 가끔 빛이 산란하면서 능선의 거친 곡선을 원만하게 만들지만, 그림은 요원하다. 그는 낡은 벤치에 앉아 깊은 숨을 들이키며 역사를 구석구석 살피는데, 이상하게도 물고기들이 지나다녔던 흔적이 보인다. 하루에 겨우 두 번 이곳을 지났던 통일호를 물고기로 치환해버린 것이다. “꼬리지느러미 오른편에 앉”는다. 등지느러미를 따라 흘러가는 ‘검은 길’(철로) 너머에 “제 몸의 비늘을 벗겨서 속 길을 그”리는 ‘물박달나무’가 촘촘히 박혀 있다. 기차가 오른쪽으로 굽이 돌 때마다 사람들이 기울어지고, 기울어진 몸을 추스르기 위해 “몸을 비틀 때마다” 기차의 ‘아가미’속으로 길게 “산길 꾸러미가 흘러들어” 왔다가 빠르게 사라진다. 그는 잠시 손을 멈추고 렌즈에 닿은 ‘피사체’의 온도를 살핀다. “이따금 밑줄 긋고 가는 물고기가 없다면” 추전역은 적막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그는 이러한 사태를 “문장을 이어나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표현한다. 추전역을 지나다녔던 수많은 ‘물고기떼’, 지금도 “배지느러미에 말간 알을 가득 안고 바다 쪽으로 흘러”가지 않는가. 그렇게 “당신의 옆줄에 기대어서 내 생도 저물어”가고 있다.

그의 여행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삶의 지향을 새롭게 정립하는 (윤리적) 계기로 작용한다. 그가 추전역에서 마주친 것은 결국 ‘당신’을 향해 한없이 기울어지고 있는 자신의 생이자 “새가 날아갔던 길을 가로질러 산성에 올라섰다/움푹 팬 산성 길의 눈[眼]에/빗물이 고여 그렁거리고/무언가 내 가슴을 뚫고 지나갔는지/가슴 안쪽에도 붉은 길이 생겼다/새들의 길이 내 안으로 흐르고 있었다”(「새들의 길에는 횡단보도가 없다」)라는 사유의 이미지들이다.「등뼈를 어루만지며」도 마찬가지. 그는 “강이 구부러지는 소리”와 “물이 꺾이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 안에 숨어 있는 “그토록 많은 사금파리”를 느끼고, “흐르지 않고/상처의 틈에 고이는 물이/몸 안에서 출렁”거리는 ‘파랑주의보’를 감지한다. “원통전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동백꽃은/웅진전의 덩굴무늬까지 물들어 놓았더라/고요 속에 몸과 마음을 넣으니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무량한 고요의 깊이/내 몸에도 가득히 젖은 꽃이 피어나더라”라는「선암매仙巖梅」의 절창은 또 어떤가. 이런 의미에서 그의 생은 세계의 내면과 그 명경明鏡에 비쳐진 자신을 찾아가는 유목이며, 그것은 시인을 흔들어 깨우는 맑고 팽팽한 ‘마라카스 소리’와 같은 것이다.

 

 

한겨울 날아드는 철새 떼는

전깃줄부터 팽팽하게 맞춘다

봄부터 가을까지 마음 열고 있는 전깃줄을

오동나무 공명판에 걸어놓고

바람으로 연주한다

산조가야금 소리 들판을 가로질러갈 때

저수지의 물결마저 일시 정지하여

제 몸 위에 얼음판을 올려놓고

새들의 그림자까지 다 받아낸다

춤을 추는 산사나무

붉은 열매 후드득 떨어트려서 음표를 그려내고

저수지 큰 북을 두드리는 새떼가

한꺼번에 날아오른다

대숲에서는 마라카스 소리가 비바체로 흘러나온다


-「겨울 시편」전문

 

 

     바람의 기척에 제일 먼저 반응하는 것은 ‘대숲’이다. 수십 개의 현을 팽팽하게 당겨 조율을 마친 피아노처럼 대숲은 손가락의 기울기와 무게, 온도에 따라 미세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작고 단조로운 부저음을 만들 때도 있는데, 대숲이 뿌리부터 바람을 끌어올리는 소리다. 높고 소리는 대나무 전체가 가늘고 긴 이파리를 비비며 만들어내는 소리다. 다급하지 않고 멀리 간다. 대숲은 세계의 목소리를 가장 잘 담아낸 악기라 할 정도로 소리의 골이 깊다.

     대숲만 그런가. 산의 모든 나무들은 이미 ‘마라카스’처럼 세계와 공명하는 ‘악기’다. 주변의 모든 사물과 어우러지며 그 움직임과 방향, 속도를 표현해내는데, 열매가 후드득 떨어지며 내는 소리와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들의 목청과 날갯짓, 바람이 흩뿌려놓은 저수지의 물결과 들판에서 동심원을 그리며 기울어지는 풀의 바스락거림도 담고 있다. 여기서 시인이 주목한 나무는 오동과 산사다. 오동을 두고는 “산조가야금 소리 들판을 가로질러갈 때/저수지의 물결마저 일시 정지하여/제 몸 위에 얼음판을 올려놓고/새들의 그림자까지 다 받아낸다”라며 쓰며, 산사의 격정적인 흔들림에 대해서는 “춤을 추는 산사나무/붉은 열매 후드득 떨어트려서 음표를 그려대고/저수지 큰 북을 두드리는 새떼가/한꺼번에 날아오른다”로 묘파한다.

     마지막에는 ‘대숲’을 등장시키는데, “대숲에서는 마라카스 소리가 비바체로 흘러나온다”라며, 나무들과 세계의 일체를 명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체감은 세계의 소리와 ‘나’와의 이어짐으로 확장된다. 다시 말하자. ‘나’는 대숲과 공명하는 소리를 들음으로써 세계와 하나가 된다. 그것은 “늙은 경첩을 물고 있는 못의 자리”와 같아 “너무 깊어서 녹슬지 앟는 잠”(「녹슬지 않는 잠」)이며, “불길이 지나간 그 속에는 스치기만 해도 전 생애가 흔들리는/간절한 기도”(「느티나무 룽다」)이기도 하다. 또한 “상처에 고여 있는 나무의 울음이 출렁이고/내 안에서 자라는 울음의 나무는 숲이 되어서/심하게 흔들린다”(「울음의 바깥」)는 교감이며 절대적 합일이다.

 

 

 

     다시 천년 뒤에도 ‘수련’은 피고

 

 

     시인의 유목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그는 이 질문에 답을 하듯「삼층석탑」에서 “그리운 것들은 곡선으로 흘러간다. 강물 한 자락 끌어다가/둥글어진 몸돌과 내 몸을 칭칭 감고/천년의 한순간이 되어서/속삭인다/나 여기 있다고/오래 기다렸다고//천년 전 흐르던 여강이 천년을 향하여 흘러 흘러간다”고 쓴다. 이 문장이 암시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천년을 향해 흘러가듯, 그이 유목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지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유목’은 인간이라는 유적 존재에서 각인된 본능이자 숙명이다. 비록 그가 “단지 예감할 뿐, 어디로/흘러가는지 나는 모르겠다/얼마나 오래 허공의 지문을 읽고 있었는지 한쪽 어깨가 저리다//알맞은 햇빛과 물과 바람 그리고 한 줌의 마음이면 괜찮다고 했지만, 움푹 팬 옆구리를 치고 들어오는/견딜 수 없는 것들이 있다”(「산당화 옆 느티나무」)면서 삶을 저어하고 있지만, 그것은 유목의 필연적 고통과 상처일 뿐이다.

     특이한 것은, 그의 유목이 시간을 가역한다는 점이다. 그는 시간조차 유목한다. 그의 시편 곳곳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그는 ‘사백 년 전의 꽃’을 손으로 만지기도 하며, “유적같은 몸에 피어난 만첩홍매/벌들의 소리가 사백 년 고목의 검은 몸속으로 들어가네/몇천 번이나 뒤척거리며 꽃의 무늬를 새겼을까/지금 피어 있는 꽃은 백 년 전의 꽃이 아니고/이백 년 전의 꽃도 아니라네/그보다 더 오래 사백 년 전으로 들어가/몸부림치며 기다리던 꽃”(「길을 잃었네」)을 보며 천년이 여덟 번이나 흘러간 “구름의 환락”(「비봉리 환목주丸木舟」)을 보기도 한다. 뿐만 아니다. 그는 ‘직립의 시간’을 해체하고 “긴 시간 동안 그늘 속에 깃을 치고 가는 바람”(「목제미륵보살반가사유상」)조차 읽어내기도 한다.

     천년 후에도 수련은 피고, 시인은 그 꽃을 바라보며 “물큰한 향기 내뿜는 매실의 사리가 나무 아래 그득”(「연곡사 동부도」)한 황홀을 느낄 것이다.

 

 

수련꽃 다 진 연못이 적막하다


이따금 들여다보고 가는 새들이 아니었다면

원시의 늪일 것 같은 저곳은

식물들이 처음으로 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중생대의 시간을 끌어내어

울컥울컥 꽃이 피어나게 하는

근원을 생각하게 해준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빛의 칼날이 고요를 가르며

제 자리인 양 연못 가득히 들어가 있다

허공은 늘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

  

스치는 바람마저 머물다 가는 물속에

허공의 무덤이 있다


-「허공의 무덤」전문

 

 

     수련이 있다. 가까이, 손에 닿는 곳이다. 평생 연못을 떠나지 못했다. 다만, 이파리를 움켜쥔 햇빛의 무리와 물결을 이루며 흘러가는 바람을 느끼며 세계의 모든 말과 냄새와 흔적을 읽는다. 새들이 날아오는 방향에는 어김없이 구름의 상형이 있으며, 그 모양은 시간에 따라 다르다. 수련은 있고 꽃은 인간의 윤리와 미학과는 전혀 무관한 채 시인을 바라본다. 평생을 유목으로 살아온 시인에게 ‘수련의 있음’은 오히려 부재의 암시다. 그것은 언제나 부재와 함께 존재한다. “말 없음으로 텅 빈 하늘과 텅 빈 암자를 가득히 채워가는/달 속에 있는 듯/점점 부풀어 오르는 달 안을 거니는 듯/고요의 담장을 두르고 높은 곳에 떠 있는”(「화장암華藏菴」) 적막한 암자가 드러하듯, 수련도 “ 다 읽지 못한 앞 페이지의 문장”(「각」)처럼 ‘죽음’과 공존하는 것이다.

     “수련꽃 다 진 연못”은 적막할 뿐이다. 하지만, 그 없음의 내력은 오히려 ‘원시의 늪’에 가까워 “식물들이 처음으로 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중생대의 시간을 끌어내어/울컥울컥 꽃이 피어나게 하는/근원을 생각하게”만든다. 수련을 그 몇 만 년의 시간을 함축하며 다시 천 년 후에도 피고 지는 것이다.

     그때 그는 ‘빛의 칼날’이 한꺼번에 쏟아지며 고요를 가르는 ‘황홀’을 만난다. 삶은 죽음을 이끌고, 죽음은 다시 삶으로 피어오른다. 그것이 그가 유목을 통해 발견한 진실이다. “나를 지탱해주는 내 몸에서 가장 은밀한/엑스레이 사진으로도 보여줄 수 없는/모란꽃잎 두 장을 펼쳐놓은 집”(「내밀한 집」)처럼 은밀하지만, 늘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 ‘허공’을 가르며 “실타래 같은 길을 문 새떼가 내게로 오고 있”(「먼 길」)는 것, “온몸이 물결에 함몰되어 심하게 흔들려본 적 있는 사람만이/그의 몸을 열고 내력을 꺼내볼 수 있”(「시위를 당기다」)겠지만, 삶이라는 “고비 사막에서는 물 흐르듯 몇 마리의 고래가 앞을 나아”(「유목의 시간」)간다. “견고한 체위의 우주 속에서 온전하게 알을 깨고 나온/깃털 푸른 새들이 나무 우듬지에 앉아 바람을 타고 있”(「견고한 체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