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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丹野의 깃털펜/시집『내가붉었던것처럼당신도붉다』

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

by 丹野 2019. 8. 13.

      

     

     

     

    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

    김경성

     

     

    스무엿새 동안 살았던 집의 벽과 천장에는 수없이 많은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길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뜨거움 같은 것이었다

    별들이 돌아눕는 새벽이면 그늘 떨구는 종려나무도 긴 이파리로 길을 풀어내며

    어둠에 묻혀 있던 것들을 하나씩 불러냈다

     

    여러 갈래의 길이 몸을 풀 때마다 숲에서는 새들이 날아올랐다 

    작은 방에서 퍼져 나오는 수많은 길 중의 하나를 움켜쥔 채

    중심에서 벗어난 길을 이야기하는 당신의 어깨가 붉다

     

    길 끝에 피어있는 꽃을 꺾으려고 얼마나 오랫동안 걷고 또 걸었던가

    수없이 많은 물의 집이 세워졌다가 스러졌다

    내 안에 들어온 것은 시든 꽃 뿐이었는가

    젖무덤을 파고 잘 여문 꽃씨를 꺼내 든다

     

    황홀경의 우물을 빠져나올 때 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지금 붉다

     

    어미 새는 제 깃털을 뽑아서 조롱 속에 방을 들였다

    둥근 방을 빠져나와서

    길의 파편 위에 모로 누워있는 어린 새,

    꿈틀꿈틀

    꿈 튼다

     

     

     

     

      

    -『 시와미학 』2013년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