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
김경성
스무엿새 동안 살았던 집의 벽과 천장에는 수없이 많은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길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뜨거움 같은 것이었다
별들이 돌아눕는 새벽이면 그늘 떨구는 종려나무도 긴 이파리로 길을 풀어내며
어둠에 묻혀 있던 것들을 하나씩 불러냈다
여러 갈래의 길이 몸을 풀 때마다 숲에서는 새들이 날아올랐다
작은 방에서 퍼져 나오는 수많은 길 중의 하나를 움켜쥔 채
중심에서 벗어난 길을 이야기하는 당신의 어깨가 붉다
길 끝에 피어있는 꽃을 꺾으려고 얼마나 오랫동안 걷고 또 걸었던가
수없이 많은 물의 집이 세워졌다가 스러졌다
내 안에 들어온 것은 시든 꽃 뿐이었는가
젖무덤을 파고 잘 여문 꽃씨를 꺼내 든다
황홀경의 우물을 빠져나올 때 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지금 붉다
어미 새는 제 깃털을 뽑아서 조롱 속에 방을 들였다
둥근 방을 빠져나와서
길의 파편 위에 모로 누워있는 어린 새,
꿈틀꿈틀
꿈 튼다
-『 시와미학 』2013년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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