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르바 2019년 봄호)
어느 이름 모를 은자隱者의 눈에서 타오르는, 황혼의 모든 저녁
박 성 현
모질어야 마음을 담아낼 수 있는 문장이 있다. 비로소 모질어져야, 삶의 칼날을 무디게 하고 소진하며 한없이 부드럽게 내려앉을 수 있는 문장이 여기에 있다. 상처 위에 또 상처를 내고, 그 상흔이 또 다른 상흔에 덮이고 굳어질 때까지 견디고 견딘 후에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문장이, 그 가혹한 기록이 우리의 눈앞에 있다.
그 엄숙하고 도도하며 치열한 문장들은 모든 저녁과 황혼이 한꺼번에 쏟아내는 피의 언어이고 사유와 감각이, 육체와 영혼이 상응하며 서로 스며드는 몰아(沒我)의 언어다. 이 문장들은 끝도 없이 쏟아지는 ‘별에 대한 질문’ 혹은 한반도에서 시작해 인도차이나반도까지 이르러 깊게 뿌리를 내린 ‘침묵의 검은 포말들’일 것이다. “이름도 모르는 어느 은자隱者의 눈”(「달이 녹는다」)과 같을 것이다. 모질어져야 마음을 담아낼 수 있다는 말은 “한꺼번에 무너지는 토성土城이 되어/ 상처가 상처를 핥아주는 밤// 붉은 방에 번지는 주술사의 말들”(「붉은 방에 번지는 무늬」)과 같은 불가항력의 삶을 표상한다.
그러므로 김경성의 시는 바로 모질어지고 견뎌야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 운명에 대한 기록이자 모든 대상과의 일치를 통해 불가해한 감정이입을 실현하는 통찰의 과정이다. 상처가 상처에 닿아 짓무르고 아물기를 반복하는 혹독하고 잔인한 내력이 그의 문장을 떠돌고 있는 것. 이 천형이야말로 시인이 시를 쓸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이유다. “갈기가 흔들릴 때마다 약속처럼/ 나도 흔들린다// 물 밖은 위험해/ 솟구쳐 오르는 욕망을 물방울 하나로 누르며/ 멀리 나가고 싶은 마음마저 내려놓”(「검정말」)는 삶의 고질적인 풍화를 홀로, 고스란히 감내하는 것으로써 그의 시는 스스로를 완성해 간다.
이처럼 그의 시는 격리된 자의 수동적인 쓸쓸함이 아니라 자발적인 고립을 택한 자의 능동적인 고독에서 비롯된다. ‘사랑’이 모든 언어에 앞선 단락(短絡)이듯(파스칼 키냐르), 시인이 선택한 이 고독 또한 모든 언어와 이해에 내재하면서 동시에 초월하는 단락이다. 그는 ‘고독-속-에서’ 쓴다, 아니 문신을 새기듯 고독 그 자체를 써내려 간다.
*
엄밀한 의미에서 시는 시인이 바라보고 듣고 촉지(觸知)하는 모든 감각에 대한 대칭으로서 존재한다. 세계를 조망하고 형상하는 언어가 예술작품으로 승화되는 것은, 마치 흙과 도자(陶磁)가 서로를 응시하고 끌어당기는 이 매혹적인 대칭을 통해서다. 언어는 시로 축조되고, 축조됨과 동시에 세계를 내면화하기 때문에, 시의 대칭성은 세계의 모든 사태들을 가시화하고 가로지르며 보이지 않은 심연까지 확연히 일으켜 세운다는 것이다.
여기서 김경성 시인 특유의 놀라운 기질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그는 대상을 보되, 대상이 시작된 시원과 그 ‘너머’를 본다. 시원이 시작되기 전의 너머에 고이 접혀 있는 주름들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그럼으로써 시원은 다시 현재가 되고 미래를 끌어당기는 시선 곧 ‘바라봄’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그는 귀퉁이의 이가 빠지고 온몸이 흙투성이 되도록 상처가 나고 금이 갔던 내력은 물론, 살아 있음으로 하여 침묵해야만 했던 은밀한 공포와 결핍, 그리고 대상이 시인을 향해 촉발했던 여유로운 웃음까지 살피면서 시원의 이러한 ‘가능성의 세계’를 가늠한다. 시원과 그 너머를 향한 시선은 ‘시’라는 절대적 언어예술을 통해 대상의 모든 시간을 관통하며, 시인과 대상이 서로를 감각하고 스며들며 각인했던 온갖 사태들을 대칭한다.
속성을 잃어버린 것들도 긴 시간 끝으로 가서 보면 처음의 마음이 남아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입술의 지문은 지워지고
밀물과 썰물의 주름을 타며
인도차이나반도 눈썹 끝에 올라가 있다
뿌리가 없는 그는 바닷속에 노숙할 집을 지으며
가끔 바다의 등지느러미에 올라가서 별이 되고 싶었으나
바닷속 둥근달로 떠 있다
찻잎을 담고 차향을 머금었던 몸으로 따개비를 끌어안았지만
세상 밖으로 나가는 일은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날아가는 새들의 부리만큼이나
단호하게 닿을 수 없는 뜨거움이었다
모란꽃에 붙은 따개비의 가계는 꽃잎 번지듯 천천히 몸을 불려 가고
닻을 내린 목선木船의 휘어진 선미에도 오를 수 없는 아득함
그 누구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오직 우물 같은 몸 안에 바다를 담아놓고
수평선의 본선이 되고 싶을 뿐
찻사발 모란꽃에서 날갯짓하는 나비 위에
휘어진 실금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
— 「모란문 찻사발과 바다」 전문
시인은 아주 오래되어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모란문 찻사발’을 보고 있다. ‘휘어진 실금’을 따라 미세한 공기가 흐른다. 손끝으로 건드리면 대숲을 지나는 맑은 바람소리가 날 듯하지만, 시간의 무게는 어찌할 수 없다. 투명한 햇살도 찻사발에 닿으면 오래 묵은 시간 속으로 급격히 빨려 들어간다. 모호하고 어두우며 고요하다. 차라리 적멸이라 말해야 할까.
그는 찻물을 따르고 찻잎이 느리고 부드럽게 펼쳐지는 모습을 본다. 찻사발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입술의 지문은 지워지고/ 밀물과 썰물의 주름을 타며/ 인도차이나반도 눈썹 끝에 올라가 있”는데, “찻잎을 담고 차향을 머금었던 몸으로 따개비를 끌어안았지만/ 세상 밖으로 나가는 일은/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날아가는 새들의 부리만큼이나/ 단호하게 닿을 수 없는 뜨거움”인 것이다. “당신은 안녕하신가/ 안부를 묻는 듯”(「검정말」)한 격리와 고립의 주문(呪文)도 찻사발을 에둘러 단단히 박혀 있다.
그러나 “누구라도 들어와서 내밀한 속을 들여다볼 수 있게/ 온몸을 구부려서 둥근 방을 만들”(「붉은 방에 번지는 무늬」)던 ‘찻사발’은 자신이 영글었던 최초의 시간, 1,000℃가 넘는 불가마의 그 뜨거움을 기억할 것이다. 압사될 듯 옥죄는 불의 기운이 온몸을 휘감는 동안, 매끄럽게 빚어진 흙이 도자(陶瓷)로 변형되고 이월되며 전이되는 맹렬한 최초와 “속성을 잃어버린 것들도 긴 시간 끝으로 가서 보면 처음의 마음이 남아있다”는 찰나와 영원의 분할이 대상과 시인 사이에 존재한다.
때문에 우리는 “모란꽃에 붙은 따개비의 가계는 꽃잎 번지듯 천천히 몸을 불려 가고/ 닻을 내린 목선木船의 휘어진 선미에도 오를 수 없는 아득함/ 그 누구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까”란 문장을 시인의 욕망과 욕망의 균열을 투사하는 내적 기록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우물 같은 몸 안에 바다를 담아놓고/ 수평선의 본선이 되고 싶을 뿐 // 찻사발 모란꽃에서 날갯짓하는 나비 위에/ 휘어진 실금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마지막 문장에서 시인의 대상을 향한 ‘바라봄’의 밀도와 무게가 얼마만큼 강렬한 것인지 명확히 알게 된다.
*
김경성 시인이 보고, 느끼고 기록하는 것은 시인과 대상 혹은 ‘시’와 ‘세계’의 이러한 대칭이다. 그는 “뿌리가 없는 그는 바닷속에 노숙할 집을 지으며/ 가끔 바다의 등지느러미에 올라가서 별이 되고 싶었으나/ 바닷속 둥근달로 떠 있다”는 문장을 쓰면서, ‘그’의 고독으로 점철된 생활 속에서 바다의 깊은 ‘무저갱’과 ‘노숙할 집’을 마주보게 한다. 그리고 ‘바다의 등지느러미’에 투사되는 ‘별’을 통해 격자로 교차되는 수직과 수평의 접점을 찾아내며, 마지막에는 이를 변증하면서 ‘바다’와 ‘달’의 절대적인 합일, 곧 운명에 내재한 사유와 감각 혹은 육체와 영혼의 몰아(沒我)를 이끌어낸 것이다.
「달이 녹는다」라는 놀랍도록 서정적이고 매혹적인 시도 마찬가지. 「모란문 찻사발과 바다」에서 ‘찻사발’을 「붉은 방에 번지는 무늬」의 ‘둥근 방’으로 치환하고, 여기서 ‘달’과 ‘바다’의 마주봄이라는 은유를 이끌어냈던 것과 동일하게 이 시에서도 시인은 대상에 내재한 고유성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대칭’이라는 감각과 사유의 역동적인 운동을 표상한다.
어둠을 만진 달이 녹는다
점점 묽어지다가 어느 순간 다 녹아서 사라진다
달의 즙이 온 세상에 젖어 들어 탱자나무 가시에도 고이고
숲 깊숙이 들어가서 나무를 휘감고 잎 잎마다 습자지 빛으로 본을 뜬다
달그림자가
미처 닦아내지 못한 나의 눈물을 어루만지며
한마디 말도 없이 방안에 고이는 것을 본 적 있다
오직 어둠 속에서만 일어나는 은밀한 위안
세상의 행간을 연결하는 전봇대의 서늘한 빛마저도 묽게 만들며
잘 벼린 어느 은장도 칼집 속으로 스며들려는지
한여름이면 부풀기도 전에 녹아드는 날이 많아졌다
밤이 지나고 흠뻑 젖어있는 새벽이 오면
지상에서 다시 돋아 오르는 달의 씨앗,
제 몸속에 단단하게 뭉쳐두었던 즙을 꺼내
이름도 모르는 어느 은자隱者의 눈 속으로 들어가
천천히 느리게 차오른다
— 「달이 녹는다」 전문
저녁을 삼키고 비로소 밤이 온다. 태양이 사라진 자리에, 그 빛의 여백을 간직한 한 무리의 달이 박혀 있다. 달은 어둠 속에서 고요할 뿐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둠의 집요한 온기에 서서히 녹는다. 마치 대상에 몰입하고 자신을 전혀 돌보지 않는 자들처럼 달은 “점점 묽어지다가 어느 순간 다 녹아서 사라”지는 것. 시인은 녹아내린 달의 흔적을 살피지만, 그 흔적이란 검은 유화에 덧칠된 검정 같을 뿐이다. 그렇게 달이 ‘있던’ 자리에는 풀냄새 같은 멀고도 진하며 모호한 빛이 남아 흐르고 있다.
시인은 달이 사라진 바탕의 미세한 ‘흐름’을 ‘달의 즙’으로 읽는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온 세상에 젖어 들어 탱자나무 가시에도 고이고/ 숲 깊숙이 들어가서 나무를 휘감고 잎 잎마다 습자지 빛으로 본”을 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명징하면서도 모호한 빛의 줄기들은 이미 시인의 눈을 어루만지면서 ‘눈물’로 변형된 상황이다. 자발적 고독을 선택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홀로 고립된 시인의 내면이란 모든 이해와 해석을 거부한다. “문을 뜯어내고/ 창문에 눈目을 얹으니/ 한 사람이 빛 속에 서 있다 // 처음부터 그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양이 울음을 문틈으로 밀어 넣을 때/ 눈먼 그림자만이 온갖 색을 지우며/ 점점 먹빛을 덧칠해가고 // 어떤 말에도 닿을 수 없어 본문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골목을 빠져나가는 바람보다 더 빠르게 잊히는 이방인이 되어/ 낡은 책 표지만 되새김질하는”(「붉은 방에 번지는 무늬」) 순수한 동요와 결핍이다. 그리고 시인은 이 같은 상황을 “오직 어둠 속에서만 일어나는 은밀한 위안”으로 명명하는데, 그것은 찰나이며 단절이자, 영원으로 향하는 유일한 문이다. 언어란, 시인의 입술에 닿아서야 형상과 금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다시 달빛이 눈부시게 흘러내린다. 밤은 오로지 ‘밤’으로만 향하고, 어둠은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달빛이 닿은 자리에는, 샛노란 눈물이 고여 있다. 서늘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을 때마다 상처가 밝게 빛난다. 상처가, 다시 상처를 파고들며 깊은 생채기를 낸다. 극도로 예민한 자만이 이 고독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 달빛이 떨어진 자리마다 다시 달의 나무들이 자란다. “밤이 지나고 흠뻑 젖어있는 새벽이 오면/ 지상에서 다시 돋아 오르는 달의 씨앗”처럼 “제 몸속에 단단하게 뭉쳐두었던 즙을 꺼내/ 이름도 모르는 어느 은자隱者의 눈 속으로 들어가/ 천천히 느리게 차오”르는 것이다. 시인이 고독 속에서 발견하고 일으켜 세웠던 모든 언어들의 성채(城砦)도 그러할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달빛의 언어와 같은 이 ‘고독’에 대해 이렇게 노래한다. “조금 멀리 있을 때 더 잘 보이는 것이라고/ 내가 알던 당신이 낯선 사람이 되어 나를 비켜 갈 때처럼/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연밥 동굴 속에 적막을 묻어”(「잠망경」)두는 것이라고.
호수 밑바닥에 눈동자를 넣어두고
몸 뒤집는 연밥 잠망경에
부들의 깃털 씨앗이 구름새가 되어 앉아있다
잘 짜진 말들이 잠망경에서 발아하여
끝 간 데 없이 번진다
— 「잠망경」 부분
‘고독’이 그러하다면, ‘눈’을 호수 밑바닥에 넣어두어도 될 일이 아닌가. 연밥 잠망경을 통해 바람과 일기와 구름을 읽고, 부유하는 먼지들과 먼지에 묻은 아주 미세한 냄새들을 짚어내도 된다. 내면으로 침잠하는 시인의 망막에 “부들의 깃털 씨앗”이 내려앉고 다시 ‘구름새’가 되어 먼 곳으로 날아가도 좋을 것이다. 어쩌면 바로 그곳에서 시가 발아할 것이고, ‘끝 간 데 없이’ 번질 것이기 때문이다. 모질어야 한다는 말은, 이미 자발적 고독의 다른 말이다. ‘별에 대한 질문’과 ‘침묵의 검은 포말들’이 어느 이름 모를 은자隱者의 눈에서 타오르는, 황혼의 모든 저녁이다. (*)
박성현 시인
2009년 중앙일보 등단.
시집으로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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