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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丹野의 깃털펜/김경성 - 근작시

유리의 방 / 김경성

by 丹野 2019. 6. 21.





유리의 방


김경성

 

새벽이면 흰 등으로 벽을 밀고 있다

처음부터 없었던 나무는 기다려도 보이지 않는다

웅크리고 뒤척이며 시간을 태운다

밖으로 나와 하루 동안 먹었던 비밀을 배설하고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가 눈을 닫는다

 

눈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밤과 낮이 아날로그시계처럼 돌아간다

 

비밀은 발설하지 않을 때 비밀이 되지 않지만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알 때에 비로소 비밀이 된다 발설하지 말라는 말은 불문일 뿐 유리 벽 안에 보이는 흰 등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유리의 방에서 자라는 장수풍뎅이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어

허물을 벗고 뾰족한 뿔을 머리에 꽂으니

참나무 숲도 깊어지고

 

뿔과 날개를 키우며 우화를 끝낸 장수풍뎅이도

비밀인 채로 숲으로 갔다

 

또 한 번의 우화를 꿈꾸는가

유리의 방에 다시 흰 등이 보이기 시작했다

 



- 계간 <시현실> 2019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