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방에 번지는 무늬
김경성
겹 창문 위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잘라낸다
구부러지지 않고 직선으로 뻗어가는 선은
지워내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가고
문을 뜯어내고
창문에 눈目을 얹으니
한 사람이 빛 속에 서 있다
처음부터 그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양이 울음을 문틈으로 밀어 넣을 때
눈먼 그림자만이 온갖 색을 지우며
점점 먹빛을 덧칠해가고
어떤 말에도 닿을 수 없어 본문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골목을 빠져나가는 바람보다 더 빠르게 잊히는 이방인이 되어
낡은 책 표지만 되새김질하는
누구라도 들어와서 내밀한 속을 들여다볼 수 있게
온몸을 구부려서 둥근 방을 만들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무엇이 될 수 없는 막막함이라니
한꺼번에 무너지는 토성土城이 되어
상처가 상처를 핥아주는 밤
붉은 방에 번지는 주술사의 말들
- 계간 <<미네르바>> 2019년 봄호-신작소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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