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녹는다
김경성
어둠을 만진 달이 녹는다
점점 묽어지다가 어느 순간 다 녹아서 사라진다
달의 즙이 온 세상에 젖어 들어 탱자나무 가시에도 고이고
숲 깊숙이 들어가서 나무를 휘감고 잎 잎마다 습자지 빛으로 본을 뜬다
달그림자가
미처 닦아내지 못한 나의 눈물을 어루만지며
한마디 말도 없이 방안에 고이는 것을 본 적 있다
오직 어둠 속에서만 일어나는 은밀한 위안
세상의 행간을 연결하는 전봇대의 서늘한 빛마저도 묽게 만들며
잘 벼린 어느 은장도 칼집 속으로 스며들려는지
한여름이면 부풀기도 전에 녹아드는 날이 많아졌다
밤이 지나고 흠뻑 젖어있는 새벽이 오면
지상에서 다시 돋아 오르는 달의 씨앗,
제 몸속에 단단하게 뭉쳐두었던 즙을 꺼내
이름도 모르는 어느 은자隱者의 눈 속으로 들어가
천천히 느리게 차오른다
- 계간 <<미네르바>> 201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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