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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고성만 시집 『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by 丹野 2019. 3. 22.





고성만 시집『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고요아침 2019년 3월







시인의 말


이삿짐 페지더미로 실려 나갈 뻔한 시 서른 몇 편

건졌다. 여기저기 흩어진 시들 모으고 근자 시를 더

했다. 부끄럽고 여린 고백들, 근 삼십 여 년 동안 쓴

 시들을 묶고 보니 나도 참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든

다. 이쯤에서 잠시 앉아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랑도 그리움도 부질없이 다만, 살아있었으면 좋겠

다. 기회를 준 열린시학사에 감사하다.


2019년 3월

고성만










방랑자


  고성만


  방방하게 가두어 놓은 물거울에 몰골을 비춘다 논

옆 계곡 산개구리 뒷다리 같은 여자가 샤워 하는 모습

을 발뒤꿈치 들고 훔쳐본다 아직 물이 찰 것인데


  허공에 둥지를 틀고 빗종빗종 울어대는 새 몸의 일

부를 뚫고 나오는 순


  하얀 날개를 따라 훨훨

  낡은 옷 벗어버려 활활


  나를 낳아준 건 강 길러준 건 산 어느 거리의 누룩

이 뜨고 어느 저자의 음식이 익어가는 지 자고로 얻어

먹는 것도 용기라 하였거든 오늘 양식이 걱정되거든

꽃 피고 지는 안부를 묻지 말 것이며 내일 잠자리가

걱정되거든 백로 둥지 튼 청산을 그리워하지 말 일


  이제 그만 편히 쉬거라

  아픔도 습관이니


  어떤 날 하루는 너무 바빠서 나를 돌아볼 겨를이 없

고 어떤 날 하루는 너무 한가해서 너를 위로할 시간이

없다






저녁 강물소리

 

고성만


 

얼마나 많은 바람이 부딪혀야했나

찰랑찰랑 저 강물

내 귀를 적시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빗방울이 춤춰야했나

물총새는 청호반새는

구구절절 울어야했나

저 강물 멈추지 않게 하려고

얼마나 많은 이파리들이 반짝여야했나

저 강물 지키기 위해

동자개는 미꾸리는

얼마나 많은 눈물 뿌려야했나

저 강물 아름답게 빛나게 하기 위해

햇살은 달빛은 가로등은

얼마나 오래 빛나야 했나

너의 곁에 눕기 위해서 나는

얼마나 오래 꿈꾸어야했나








달의 가슴

 

   고성만

 

 

   그 숲에서 새들이 날고 꽃이 울었다 백골단에게 쫓기던 5, 그녀와 함께 막다른 골목 가게의 셔터를 밀고 들어갔는데 그 속에 잔뜩 긴장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치약을 짜서 코 밑에 발라주는 그들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날 밤 낯선 여인숙에서, 그녀의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가슴에서는 물냄새가 났다 내 심장도 왼쪽에서 쿵쾅거렸다 시름시름 앓던 그녀가 고요의 바다*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잠깐 왔다 사라지는 통증이겠거니 했는데 오래 오래 새들이 날고 꽃이 울었다

 

   달의 가슴 왼편에 그을린 자국이 선명하다

 

 






고마리


고성만


  어느새 시린 물 쪽으로 자욱한 저녁 안개 기적소리

따라 자전거 타고 가다 멈추니 또 다시 강변


  가득하다 눈물 마른 자국같이


  소금쟁이서방과 우렁각시가 살았다지 소금 팔러간

서방 밤낮 기다리며 밥을 짓는 각시 불땀 좋은 소나무

참나무 등걸 쑤셔 넣으면 동글동글 탐스러운 항아리


  각시가 보고 싶은 서방은 구름 타고 바람 타고 돌아

왔으나 옹구는 없고 분홍빛깔 낳아놓은 알들 김 난다

고봉밥처럼


  지질이 못난 것들만 남아

 

  미련만 남아






지리산 민박집

 

 고성만



   갈수기의 하동호수 지나 위태와 양이터재 사이에서 몇 번 망설인다 가다 돌아오더라도 어차피 가야할 길인걸

   마당에 장작 쌓인, 노부부가 운영하는 민박에 들어서서 계십니까? 외쳤는데 별나도 큰 기척에 스스로 놀라 묻는다 여기가 어디쯤이죠?

 

   물방울 떨어지는 대숲

 

   팬플룻을 부는 바람

 

   아침식사 준비 되었네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밥을 먹고 올라오다가 벤치에서 문득 마주친 여자, 자기 앞의 * 옆에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먼 산 바라는 눈길이 머쓱하여 방으로 들어와 배 깔고 엎드려 전하는 소식, 남쪽 섬 등대길 동박새여 밤새 안녕하신가

 

 


  * 에밀 아자르.

 

 

 


모든 섬은 원래 뭍이었으나

 

 고성만



해는 거대한 용광로 속으로 떨어지는 한 점

꽃잎 같아

 

위도 송이도 안마도 상낙월도 하낙월도 대각씨도 소각씨도……

너와 함께 지은 집에서

빠꿈살이*하듯

굴 따고 조개 잡으며

 

어느 날 하루는 만돌린 들고

나명들명

어느 날 하루는 아코디언 들고

들명나명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만큼 깊어졌으니

 

절벽 아래 갯바위로

조약돌로

모래알로

부서지리

 

 


  * 소꿉장난.

 

 





고성만 


1963년 전북 부안 출생.

1993년 광주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1998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올해 처음 본 나비』『슬픔을 사육하다』『햇살 바이러스

       『마네킹과 퀵서비스맨』『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