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만 시집『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고요아침 2019년 3월
시인의 말
이삿짐 페지더미로 실려 나갈 뻔한 시 서른 몇 편
건졌다. 여기저기 흩어진 시들 모으고 근자 시를 더
했다. 부끄럽고 여린 고백들, 근 삼십 여 년 동안 쓴
시들을 묶고 보니 나도 참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든
다. 이쯤에서 잠시 앉아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랑도 그리움도 부질없이 다만, 살아있었으면 좋겠
다. 기회를 준 열린시학사에 감사하다.
2019년 3월
고성만
방랑자
고성만
방방하게 가두어 놓은 물거울에 몰골을 비춘다 논
옆 계곡 산개구리 뒷다리 같은 여자가 샤워 하는 모습
을 발뒤꿈치 들고 훔쳐본다 아직 물이 찰 것인데
허공에 둥지를 틀고 빗종빗종 울어대는 새 몸의 일
부를 뚫고 나오는 순
하얀 날개를 따라 훨훨
낡은 옷 벗어버려 활활
나를 낳아준 건 강 길러준 건 산 어느 거리의 누룩
이 뜨고 어느 저자의 음식이 익어가는 지 자고로 얻어
먹는 것도 용기라 하였거든 오늘 양식이 걱정되거든
꽃 피고 지는 안부를 묻지 말 것이며 내일 잠자리가
걱정되거든 백로 둥지 튼 청산을 그리워하지 말 일
이제 그만 편히 쉬거라
아픔도 습관이니
어떤 날 하루는 너무 바빠서 나를 돌아볼 겨를이 없
고 어떤 날 하루는 너무 한가해서 너를 위로할 시간이
없다
저녁 강물소리
고성만
얼마나 많은 바람이 부딪혀야했나
찰랑찰랑 저 강물
내 귀를 적시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빗방울이 춤춰야했나
물총새는 청호반새는
구구절절 울어야했나
저 강물 멈추지 않게 하려고
얼마나 많은 이파리들이 반짝여야했나
저 강물 지키기 위해
동자개는 미꾸리는
얼마나 많은 눈물 뿌려야했나
저 강물 아름답게 빛나게 하기 위해
햇살은 달빛은 가로등은
얼마나 오래 빛나야 했나
너의 곁에 눕기 위해서 나는
얼마나 오래 꿈꾸어야했나
달의 가슴
고성만
그 숲에서 새들이 날고 꽃이 울었다 백골단에게 쫓기던 5월, 그녀와 함께 막다른 골목 가게의 셔터를 밀고 들어갔는데 그 속에 잔뜩 긴장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치약을 짜서 코 밑에 발라주는 그들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날 밤 낯선 여인숙에서, 그녀의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가슴에서는 물냄새가 났다 내 심장도 왼쪽에서 쿵쾅거렸다 시름시름 앓던 그녀가 고요의 바다*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잠깐 왔다 사라지는 통증이겠거니 했는데 오래 오래 새들이 날고 꽃이 울었다
달의 가슴 왼편에 그을린 자국이 선명하다
고마리
고성만
어느새 시린 물 쪽으로 자욱한 저녁 안개 기적소리
따라 자전거 타고 가다 멈추니 또 다시 강변
가득하다 눈물 마른 자국같이
소금쟁이서방과 우렁각시가 살았다지 소금 팔러간
서방 밤낮 기다리며 밥을 짓는 각시 불땀 좋은 소나무
참나무 등걸 쑤셔 넣으면 동글동글 탐스러운 항아리
들
각시가 보고 싶은 서방은 구름 타고 바람 타고 돌아
왔으나 옹구는 없고 분홍빛깔 낳아놓은 알들 김 난다
고봉밥처럼
지질이 못난 것들만 남아
미련만 남아
지리산 민박집
고성만
갈수기의 하동호수 지나 위태와 양이터재 사이에서 몇 번 망설인다 가다 돌아오더라도 어차피 가야할 길인걸
마당에 장작 쌓인, 노부부가 운영하는 민박에 들어서서 계십니까? 외쳤는데 별나도 큰 기척에 스스로 놀라 묻는다 여기가 어디쯤이죠?
물방울 떨어지는 대숲
팬플룻을 부는 바람
아침식사 준비 되었네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밥을 먹고 올라오다가 벤치에서 문득 마주친 여자, 자기 앞의 生* 옆에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먼 산 바라는 눈길이 머쓱하여 방으로 들어와 배 깔고 엎드려 전하는 소식, 남쪽 섬 등대길 동박새여 밤새 안녕하신가
* 에밀 아자르.
모든 섬은 원래 뭍이었으나
고성만
해는 거대한 용광로 속으로 떨어지는 한 점
꽃잎 같아
위도 송이도 안마도 상낙월도 하낙월도 대각씨도 소각씨도……
너와 함께 지은 집에서
빠꿈살이*하듯
굴 따고 조개 잡으며
어느 날 하루는 만돌린 들고
나명들명
어느 날 하루는 아코디언 들고
들명나명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만큼 깊어졌으니
절벽 아래 갯바위로
조약돌로
모래알로
부서지리
* 소꿉장난.
고성만
1963년 전북 부안 출생.
1993년 광주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199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올해 처음 본 나비』『슬픔을 사육하다』『햇살 바이러스』
『마네킹과 퀵서비스맨』『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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