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에서 저녁까지
⸺진주성에서
엄원태
1
저 바람에는
묵은 서책 냄새가 배어 있다
마음이란 물결은 또 몇 겁을 흘렀던가
봉두난발, 저 연둣빛 잎, 잎들
죽은 이들의 위패는 오래 낡아가지만
소나무는 구부러져 비로소 자리를 잡고
마삭줄 덩굴은 제 몸을 태우고서도 다시 벽을 타고 일어선다
기껏 한 생에 지나지 않을 기억 몇 점,
서늘히 내다 말리는 강변의 늦은 오후
2
석류꽃 떨어진 그늘에서
잃어버린, 청춘의 오롯함을 보네
다홍 오간자 겹치마 같은 꽃잎 조각들
바스러져서도 차마 붉은
지레 늙은, 상처의 날들 들여다보네
언제 한 번 활짝 펴 본 적 있냐고
제대로 반짝, 빛나던 시절 있었냐고
날은 하마 저물고,
생은 적멸까지도 이토록 아름답구나
⸻계간 《시산맥》 2018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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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원태 / 1955년 대구 출생. 1990년《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침엽수림에서』『소읍에 대한 보고』『물방울 무덤』『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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