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국 통신
강영은
길고 좁다란 땅을 가진 옆집에서 길고 좁다란 닭 울음소리가 건너옵니다 길고 좁다란 돌담이 젖습니다 길고 좁다란 돌담을 꽃피우고 싶어졌습니다 길고 좁다란 돌담 속에서 길고 좁다란 뱀을 꺼냈습니다 길고 좁다란 목에게 길고 좁다란 뱀을 먹였습니다 길고 좁다란 목을 가진 닭 울음소리가 그쳤습니다 비 오는 북쪽이 닭 울음소리를 훔쳤겠지요 길고 좁다란 형용사만 그대 곁에 남았겠지요
비 개어 청보라빛 산수국 한 그루 피었습니다 그대에게 나는 산수국 피는 남쪽이고 싶었습니다
장미의 이름*
당신의 총구에서 장미가 피어나네 당신이 이름 붙인 장미를 위해 장미가 피어나네 줄기에 매달린 잎사귀만 보면 줄장민지 사철장민지 구별할 수 없네
담장을 버린 장미가 담장을 넘네 이름을 버린 장미가 경계를 넘네 가시철조망을 넘은 장미를 보면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별할 수 없네
이름 따위엔 관심 없는 국경선처럼 당신도 한때 붉게 피는 순수를 사랑했잖아, 누구보다 장미를 사랑했잖아, 아무리 외쳐도 당신은 장미를 모르는 얼굴
당신은 당신이 만든 장미만을 고집하네
내면의 어떤 장미가 두 손에 피를 묻히고 검은 복면을 두르게 했나 눈구멍이 파인 장미들, 눈구멍을 파는 장미들
색깔이 다른 장미의 내부에서 전쟁이 시작되네 색깔이 같은 장미의 외부에선 붉은 꽃잎이 흩날리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영락한 이름뿐**
장미는 당신을 파괴하지도 구원하지도 않는데 가시가 피워 올린 신神의 이름이 피를 흘리네 모가지를 떨군 장미의 이름은 차마 말할 수 없네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중에서
이상한 연못
잉어 꼬리와 뱀의 네 발을 가진 흰 용이 지상으로 내려왔네 뱀의 형상을 버린 몸뚱어리는 잉어가 되어 차가운 연못을 제 세상으로 삼았네 비단 같은 비늘이 반짝일 때마다 진흙에 뿌리내린 물꽃이 버짐처럼 번졌네 버드나무는 낭창낭창, 아첨거리는 속성으로 연못을 휘감았네 연못 속 풍경이 휘어질 대로 휘어진 파장에 매혹되었네
미풍이 물결을 휘젓는 날이면 크고 아름다운 누각 아래 잉어 떼가 몰려들었네 “당신은 잉어 꼬리를 잡수어요. 저는 원숭이의 입술을 먹을게요.”* 뾰족한 입술들이 누각의 그림자를 나눠 먹었네
“오늘은 창포꽃 피는 좋은 날이지만, 다음날이면 단풍 들어 시들고 만다오.”** 예언자의 입술이 연못 주위를 떠돌았지만 안개에 둘러싸인 연못 속에는 잉어의 꼬리들이 파닥였네 파문을 싸고도는 은밀한 놀이, 수건돌리기 놀이가 성행했네
연못가에 암매가 피었네 아래쪽에서 뻗어 올라간 큰 줄기가 눈이 먼 바위틈에 곁가지를 내었네 본가지가 되고 싶은 곁가지는 한번 더 방향을 꺾어 못가를 희롱했네
향기를 매단 수간의 모양은 언뜻 보기에 삼절三絶의 구도 같았지만 그것은 잉어가 흐려놓은 연못의 구도, 물고기를 잡아 연명하는 어부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는 연못의 풍경 같아서 어부는 화살을 들어 잉어의 눈을 쏘았네
잉어는 피눈물을 흘리며 하늘로 올라갔네 어둠을 관장하는 검은 용을 애타게 불렀지만 햇살 퍼지는 구름 너머엔 어둠이 없었네 흰 용은 하느님에게 읍소했네 “너는 그때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었느냐?” 하느님이 물었네 “저는 그때 찬 연못에서 물고기로 변해 있었습니다.” 흰 용이 대답했네 “연못에 있는 물고기는 사람들이 잡으라고 있는 것이니 그 어부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고 오히려 너에게 잘못이 있느니라.”
비서를 기록한 오자서는 왕에게 묻네 “지금 모든 것을 버리시고 미천한 백성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겠습니까?” 왕은 마시지 않았다고 하네***
파문과 추문이 끊이지 않는 색향처럼 흰 비단자락 스치는 소리, 물결이 물결을 밟고 가는 소리, 의문이 꼬리를 낳는 세상이 연못 속 풍경과 다름없으니 세상을 경계한 유령들에게 수초水草의 세상을 묻네
색향 대제에 가는 일과 미천한 백성과 술 마시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위험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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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의 「대제곡大堤曲」중의 구절 郞食鯉魚尾 妾食猩猩脣에서
** 이하의 「대제곡大堤曲」중의 구절 明朝風樹老에서
***「사기史記」伍子胥列傳에서
상냥한 시론詩論
바람이 다리를 달아주었어요, 골목을 돌아나가는 검정비닐을 보며 두 다리를 종종거리는 준아, 너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속도를 보여주는구나
아가별이 울고 있어요, 엄마별은 어디 있을까요, 빌딩 사이 뜬 개밥바라기를 보며 두 눈을 글썽이는 준아, 너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밤하늘을 보여주는구나
늑대가 나타났어요, 도와주세요, 불쑥불쑥 어둠을 내려놓는 동물 병원 앞에서 손나팔을 만들어 부는 준아, 너는 짐승처럼 살아있는 어둠을 보여주는구나
엄마는 계단 끝에서 나타나는 거에요, 자, 보세요,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며 전철역 계단을 오르는 준아, 너는 세상에서 가장 긴 계단을 보여주는구나
다섯 살배기 네 말들이 내가 들은 올해의 가장 좋은 시구나
⸺시집 『상냥한 시론』(2018. 7)에서
강영은
1956년 제주 서귀포 출생. 제주교육대, 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중.
2000년 계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녹색비단구렁이』『최초의 그늘』『풀등, 바다의 등』『마고의 항아리』『상냥한 시론』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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