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시인의 말ㅣ
세상은 너무 많은 말을 들려준다.
그 말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시간만 덧없이 흘렀다.
데뷔 30년 만에 네 번째 시집을 묶는다.
무심했거나 게을렀거나 잠시 외면한 탓도 있다.
세상에서 받은 여러 상처를 여기 기록한다.
다시 볼 수 없는 꽃이 피고 지고 할 것이다.
또 얼마의 시간이 흘러야 할까
2018년 가을
검은 눈 자작나무
조현석
찬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 아침 서산 끝자락 애쓰고 붙잡고 그믐으로 서서히 가는 눈썹달 밤새 나무껍질을 감싸던 달빛의 밀어(密語) 얇게 벗겨져 밑둥 옆으로 켜켜이 쌓인다 어제보다 더 낮은 곳으로 하얗게 덮인다
달빛 사라지고
소리 없이 바람 지나고
푸른 물빛 더 파래지는 순간
더 희게 겉옷 두르는 자작나무들
떠오르는 햇빛 찬란하게 안개 짙은 호수공원 물결 위로 무엇이 슬픔인지, 무엇이 기쁨인지 모를 허공 맴돌던 사연이 새겨진다 화피(樺皮)* 조각들과 가슴 높이쯤 새겨진 검은 눈들이 떠오른다 두둥실 떠다닌다 밤샘한 고해성사의 검은 눈은 깊고 깊다
*자작나무의 흰 껍질은 0.1~0.2 밀리미터 남짓하고 매끄럽고 잘 벗겨지므로 종이를 대신하여 불경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리는데 쓰였다. 옛사람들은 자작나무를 '화(樺)'라 했으며, 영어 이름 '버취(Birch)'의 어원은 '글을 쓰는 나무 껍데기'란 뜻이다.
이별의 고고학
조현석
되돌아오는 길은 어둠의 어디쯤에서 시작될까 한 방울 침으로 퍼져나간 초라한 풍문들아 몸이 마르고 무릎이 꺾일 즈음 등에 새긴 타투처럼 뚜렷한 이별의 상처들
소나기 퍼부은 후 끈적거리는 습기로 달라붙는 이별, 천천히 번지는 황혼이 몸에 감기는 이별, 하나둘 돋은 별이 갑자기 차갑게 만져지는 이별, 급격하게 어두워진 하늘 위로 눈부시게 선명해진 네온사인의 이별
저 어둠들은 모두 썩어버린 구운 달걀의 맛 이별을 맛본 사람들은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지 어디를 가도 어둠의 감옥뿐이라고 늘 어두운 지금이 이별하기에 적절한 시간이라고
울컥
해거름 지나 폐허처럼 적막해진 마을회관 건너편 세탁소 간판의 검붉은 녹껍데기 우툴두툴 일어난 고뇌들 군데군데 실핏줄 툭툭 끊긴 빨랫줄 묵은 시간에 짓눌린 주인 없는 외투 한 벌 덩그라니
갈라지고 바스러진 솔기 끝으로
수없이 뜨고 진 차가운 별, 달빛
바람 없이도 마구 뒤틀린 한 생의 순간
몸 사라진 이후 남은 고독은 독약보다 더 독해
쓰디쓴 독함 삭이느라 한 계절이 다 가고
또 다른 계절도 지나고
기억 희미할 시간마저 더 지나고
떨어져 뒹구는 여러 개의 금빛 단추
부서지거나 전혀 삭지 않는 사리들
허참, 아직은 푸르고 싱싱해
거침없던 바람 흔들거리던 고요마저 무시한 허공의 몸 따스했던 시절 옷섶의 추억도 닳고 닳아 맨들맨들 세상의 기억 모두 감추어버린 처마 밑 침묵의 풍경(風磬) 흔들흔들 오래 멈췄다가 다시 흔들
울게 하소서
조현석
1
고백하건대…… 보았다, 저물녘 슬그머니 다가오던 불안을
가늘게 뜰 수밖에 없는 눈으로 먼저, 향기로운 것은 멀리 하게 되고 매캐한 것만 맡아지는 코로, 그 후는 큰소리조차 제대로 듣지 못하는 귀로
슬그머니 스며들어 번져오는 독기, 온몸 바르르 떨게 했다
구겨진 습자지 위에 펼쳐지는, 얇디얇은 한 장의 황혼
2
지금은 봄밤, 좋다 잠들지 못할 불편한 밤
꼬박 새우느라, 잘못 들어선 꿈의 벽에 머리 받혔다
늦게 든 잠에서 깨어난 너무 이른 아침
전혀 잠을 자지 않은 것처럼, 또는
잠시 눈을 붙였다가 다시 잠 이루려 애썼는데
늦게 기어들어온 악몽에 배반당한 것뿐
부스스 깨어서 멍하니 다시 잠을 잔다고
시시콜콜한 꿈을 꾸며 깨어나려는 잠과 싸우겠다 말했다
오늘 목에 걸린, 혼미한 봄밤을 노래해야지
나오지 않을 목소리로 맨 처음 꿀 꿈을 읊조려야지
기진맥진이다, 얕은 잠을 건너면서 진을 빼놓는
3
다시 고백하건대…… 저물녘엔 건강하지도 않으면서 건강한 것처럼
흠칫 깨어나자마자 꿈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꿈은 결국 꿈이었고, 꿈에서 벗어난 나와 몸 부대끼며 살아가는 동안 절망은 점점 자라기에
희망의 설렘을 결코 탐하지 않았기에 오래 잠들지 못하고
구겨진 습자지 위에 펼쳐지는, 얇디얇은 한 장의 미명
모나미153 검정 볼펜
조현석
검정 볼펜이 거북 등껍질 같은 손등에서 빙글빙글 도는 곳
예전이나 지금도 시끄럽고 번잡스러워 오히려 적막한 곳
하루하루가 서럽고 잔혹해도 악의 따위는 품지 않는 곳
끔찍한 탄생과 흥겨운 죽음을 수십, 수백 번 공유하는 곳
불치병에 걸려도 치료조차 않고 죽기 직전까지 방치하는 곳
숨이 목에 닿아도 단말마 비명의 유서마저 쓴 적이 없는 곳
말할 수 없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들 난무하는 곳
닳아빠진 사람들은 한 번도 사랑도 죽음도 생각지 않는 곳
끝없을 듯 빙빙 돌던 볼펜이 한순간 멈춰 곧게 일어서는 순간
휘황찬란한 세상의 끝,
빛 아니면 어둠의 기억만으로 남는 곳
불 타는 책
조현석
검은 글만 가득한 세상이다 하루 종일 표지부터 더듬더듬 점자책 읽듯 끝장까지 훑은 뒤 뒤표지를 보면 어느새 검붉은 노을이다 순간 발화점에 다다른 세상을 한 곳에 가두는 자물쇠이다
사막의 노란 불안, 남극의 희디흰 고독, 아마존의 푸른 휴식까지 몸을 거쳐갔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오욕칠정(五慾七情)의 무지개 떴다 뿔뿔이 흩어진 자리에 고통 한데 뒤 섞인다 검은 기름 부은 듯 짧은 순간 타고 남는 것은 잿빛 침묵의 밤이다
언제부터인지 대화는 없다 소통하지 않고 지시만 있을 뿐이고 복종은 선택이다 활자로 박힌 희로애락이 꿈틀거린다 마구 끓어대는 용암이었고 끓는 속을 소화할 길 없어 다시 종이 위에 뱉어내고 만다
오물 가득한 세상, 아직 평온하게 보여지고 책은 덮인 그대로이다
밥 한 공기의 희망
조현석
늦은 겨울 아침과 점심 사이
백반집 한 켠에 앉아
조금 식은 밥을
더 식은 국에 말아 먹을 때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진다
비, 비, 비, …… 빗방울
늙고 성질 급한 나무들은
벌써 알몸 되어 모조리 맞는다
메인 목으로 미끄럼 태우듯 밥알 넘기고
반찬 몇 점 욱여넣은 뒤
젓가락 숟가락 밥상 위에 가지런히 놓고
신발 뒤꿈치 구겨 신고 담배 한 대 물고
백반집 문 밀고 어슬렁거리며 나서는데
이런 벌써 허기가, 또 배가 고파온다
만만하지 않은 세상살이
만만하게 살아가야 하는 법을 배워도
정말 모른다, 기억하려 해도 자꾸 잊는다
지하 사글세방으로 돌아가는 길
든든해지지 않는 그 밥 한 공기의 우울이
순식간에 내린 빗물에 흠뻑 젖어버리고
조금씩 보기 좋은 솜털 같은 눈송이로 변해
얼어붙은 세상을 포근하게 뒤덮어
가끔은 희망이 될 때까지……
자작나무 사진 / 김경성
1963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1988년 '경향신문'신춘문예에 시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 스케치'로 등단했다. 여러 출판사에서 단행본 기획과 편집을 맡아 일했으며 중앙일보사 출판국의 '문예중앙'과 시사월간지 '월간중앙'에서 근무했다. 이후 경향신문 편집국으로 옮겨간 뒤 섹션(매거진X)취재기자를 끝으로 직장생활을 정리했다.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스케치', '불법,…체류자'등 2권의 개인시집과 '사랑을 말하다' 등 여러 권의 엔솔로지에 참여했다. 현재 도서출판 북인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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