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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조현석 시집 『검은 눈 자작나무』

by 丹野 2019. 1. 19.


  

ㅣ시인의 말ㅣ


세상은 너무 많은 말을 들려준다.

그 말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시간만 덧없이 흘렀다.

데뷔 30년 만에 네 번째 시집을 묶는다.
무심했거나 게을렀거나 잠시 외면한 탓도 있다.
세상에서 받은 여러 상처를 여기 기록한다.
다시 볼 수 없는 꽃이 피고 지고 할 것이다.
또 얼마의 시간이 흘러야 할까

2018년 가을








   검은 눈 자작나무

                        조현석


   찬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 아침 서산 끝자락 애쓰고 붙잡고 그믐으로 서서히 가는 눈썹달 밤새 나무껍질을 감싸던 달빛의 밀어(密語) 얇게 벗겨져 밑둥 옆으로 켜켜이 쌓인다 어제보다 더 낮은 곳으로 하얗게 덮인다

    달빛 사라지고
   소리 없이 바람 지나고
   푸른 물빛 더 파래지는 순간
   더 희게 겉옷 두르는 자작나무들

   떠오르는 햇빛 찬란하게 안개 짙은 호수공원 물결 위로 무엇이 슬픔인지, 무엇이 기쁨인지 모를 허공 맴돌던 사연이 새겨진다 화피(樺皮)* 조각들과 가슴 높이쯤 새겨진 검은 눈들이 떠오른다 두둥실 떠다닌다 밤샘한 고해성사의 검은 눈은 깊고 깊다 
 
 
 
*자작나무의 흰 껍질은 0.1~0.2 밀리미터 남짓하고 매끄럽고 잘 벗겨지므로 종이를 대신하여 불경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리는데 쓰였다. 옛사람들은 자작나무를 '화(樺)'라 했으며, 영어 이름 '버취(Birch)'의 어원은 '글을 쓰는 나무 껍데기'란 뜻이다. 
 
 



이별의 고고학


조현석

 
   되돌아오는 길은 어둠의 어디쯤에서 시작될까 한 방울 침으로 퍼져나간 초라한 풍문들아 몸이 마르고 무릎이 꺾일 즈음 등에 새긴 타투처럼 뚜렷한 이별의 상처들

   소나기 퍼부은 후 끈적거리는 습기로 달라붙는 이별, 천천히 번지는 황혼이 몸에 감기는 이별, 하나둘 돋은 별이 갑자기 차갑게 만져지는 이별, 급격하게 어두워진 하늘 위로 눈부시게 선명해진 네온사인의 이별

   저 어둠들은 모두 썩어버린 구운 달걀의 맛 이별을 맛본 사람들은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지 어디를 가도 어둠의 감옥뿐이라고 늘 어두운 지금이 이별하기에 적절한 시간이라고










   울컥


   조현석



    해거름 지나 폐허처럼 적막해진 마을회관 건너편 세탁소 간판의 검붉은 녹껍데기 우툴두툴 일어난 고뇌들 군데군데 실핏줄 툭툭 끊긴 빨랫줄 묵은 시간에 짓눌린 주인 없는 외투 한 벌 덩그라니  

    갈라지고 바스러진 솔기 끝으로  
    수없이 뜨고 진 차가운 별, 달빛  
    바람 없이도 마구 뒤틀린 한 생의 순간  
    몸 사라진 이후 남은 고독은 독약보다 더 독해
    쓰디쓴 독함 삭이느라 한 계절이 다 가고 
    또 다른 계절도 지나고 
    기억 희미할 시간마저 더 지나고 
    떨어져 뒹구는 여러 개의 금빛 단추 
    부서지거나 전혀 삭지 않는 사리들 
    허참, 아직은 푸르고 싱싱해 

    거침없던 바람 흔들거리던 고요마저 무시한 허공의 몸 따스했던 시절 옷섶의 추억도 닳고 닳아 맨들맨들 세상의 기억 모두 감추어버린 처마 밑 침묵의 풍경(風磬) 흔들흔들 오래 멈췄다가 다시 흔들 












   울게 하소서

 

    조현석

 

 

   1

   고백하건대…… 보았다, 저물녘 슬그머니 다가오던 불안을

   가늘게 뜰 수밖에 없는 눈으로 먼저, 향기로운 것은 멀리 하게 되고 매캐한 것만 맡아지는 코로, 그 후는 큰소리조차 제대로 듣지 못하는 귀로

   슬그머니 스며들어 번져오는 독기, 온몸 바르르 떨게 했다

   구겨진 습자지 위에 펼쳐지는, 얇디얇은 한 장의 황혼

 

   2

   지금은 봄밤, 좋다 잠들지 못할 불편한 밤

   꼬박 새우느라, 잘못 들어선 꿈의 벽에 머리 받혔다

   늦게 든 잠에서 깨어난 너무 이른 아침

   전혀 잠을 자지 않은 것처럼, 또는

   잠시 눈을 붙였다가 다시 잠 이루려 애썼는데

   늦게 기어들어온 악몽에 배반당한 것뿐

   부스스 깨어서 멍하니 다시 잠을 잔다고

   시시콜콜한 꿈을 꾸며 깨어나려는 잠과 싸우겠다 말했다

   오늘 목에 걸린, 혼미한 봄밤을 노래해야지

   나오지 않을 목소리로 맨 처음 꿀 꿈을 읊조려야지

   기진맥진이다, 얕은 잠을 건너면서 진을 빼놓는

 

   3

   다시 고백하건대…… 저물녘엔 건강하지도 않으면서 건강한 것처럼

   흠칫 깨어나자마자 꿈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꿈은 결국 꿈이었고, 꿈에서 벗어난 나와 몸 부대끼며 살아가는 동안 절망은 점점 자라기에

   희망의 설렘을 결코 탐하지 않았기에 오래 잠들지 못하고

   구겨진 습자지 위에 펼쳐지는, 얇디얇은 한 장의 미명

 






모나미153 검정 볼펜

 

조현석


검정 볼펜이 거북 등껍질 같은 손등에서 빙글빙글 도는 곳

 

예전이나 지금도 시끄럽고 번잡스러워 오히려 적막한 곳

 

하루하루가 서럽고 잔혹해도 악의 따위는 품지 않는 곳

 

끔찍한 탄생과 흥겨운 죽음을 수십, 수백 번 공유하는 곳

 

불치병에 걸려도 치료조차 않고 죽기 직전까지 방치하는 곳

 

숨이 목에 닿아도 단말마 비명의 유서마저 쓴 적이 없는 곳

 

말할 수 없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들 난무하는 곳

 

닳아빠진 사람들은 한 번도 사랑도 죽음도 생각지 않는 곳

 

끝없을 듯 빙빙 돌던 볼펜이 한순간 멈춰 곧게 일어서는 순간

 

휘황찬란한 세상의 끝,

 

빛 아니면 어둠의 기억만으로 남는 곳

 






   불 타는 책


   조현석



   검은 글만 가득한 세상이다 하루 종일 표지부터 더듬더듬 점자책 읽듯 끝장까지 훑은 뒤 뒤표지를 보면 어느새 검붉은 노을이다 순간 발화점에 다다른 세상을 한 곳에 가두는 자물쇠이다 

    사막의 노란 불안, 남극의 희디흰 고독, 아마존의 푸른 휴식까지 몸을 거쳐갔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오욕칠정(五慾七情)의 무지개 떴다 뿔뿔이 흩어진 자리에 고통 한데 뒤 섞인다 검은 기름 부은 듯 짧은 순간 타고 남는 것은 잿빛 침묵의 밤이다

    언제부터인지 대화는 없다 소통하지 않고 지시만 있을 뿐이고 복종은 선택이다 활자로 박힌 희로애락이 꿈틀거린다 마구 끓어대는 용암이었고 끓는 속을 소화할 길 없어 다시 종이 위에 뱉어내고 만다  

    오물 가득한 세상, 아직 평온하게 보여지고 책은 덮인 그대로이다











밥 한 공기의 희망


조현석




늦은 겨울 아침과 점심 사이  
백반집 한 켠에 앉아 
조금 식은 밥을  
더 식은 국에 말아 먹을 때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진다  
비, 비, 비, …… 빗방울 
늙고 성질 급한 나무들은 
벌써 알몸 되어 모조리 맞는다 

메인 목으로 미끄럼 태우듯 밥알 넘기고 
반찬 몇 점 욱여넣은 뒤  
젓가락 숟가락 밥상 위에 가지런히 놓고 
신발 뒤꿈치 구겨 신고 담배 한 대 물고 
백반집 문 밀고 어슬렁거리며 나서는데 
이런 벌써 허기가, 또 배가 고파온다 
만만하지 않은 세상살이 
만만하게 살아가야 하는 법을 배워도 
정말 모른다, 기억하려 해도 자꾸 잊는다  

지하 사글세방으로 돌아가는 길 
든든해지지 않는 그 밥 한 공기의 우울이  
순식간에 내린 빗물에 흠뻑 젖어버리고 
조금씩 보기 좋은 솜털 같은 눈송이로 변해 
얼어붙은 세상을 포근하게 뒤덮어  
가끔은 희망이 될 때까지……  





자작나무 사진 / 김경성








조현석


조현석 시인, 출판인

1963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1988년 '경향신문'신춘문예에 시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 스케치'로 등단했다. 여러 출판사에서 단행본 기획과 편집을 맡아 일했으며 중앙일보사 출판국의 '문예중앙'과 시사월간지 '월간중앙'에서 근무했다. 이후 경향신문 편집국으로 옮겨간 뒤 섹션(매거진X)취재기자를 끝으로 직장생활을 정리했다.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스케치', '불법,…체류자'등 2권의 개인시집과 '사랑을 말하다' 등 여러 권의 엔솔로지에 참여했다. 현재 도서출판 북인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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