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요새 - 2016년 9월, 마닐라
요새의 종탑에는 종이 없다
김경성
멀리서 성당의 종소리가 파문을 일으키며 종탑 속으로 들어온다
강 건너 골목길에서는 릭샤가 지나가고
뿌리를 드러낸 낯선 식물들이 종탑을 오르고 있다
몇 차례의 스콜이 지나갔다
황톳빛 강에서 표류하는 물옥잠이 누우 떼처럼 흘러간다
저기 저 다리 밑으로 지나가면 그대로 바다
물옥잠 꽃 몸 열고 나아가는 바다는 가까이 있고
높게 쌓아 올린 요새에서 바다는 멀다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나무와 길의 이름들,
이따금 울컥 돋아 오르는 기억들과
마음 안에 가둬두었던 것들을 종탑에 매달았다
강 건너 마을에서는 여전히 릭샤가 달리고
천수관음의 손을 가진 부채파초는
바람을 풀어서 만든 종소리를 귓속에 들이고 있다
처음부터 요새는 없었다
마음 안에 쌓아놓은 어떤 두려움이 무너지는지
종소리가 구부러진다
- 계간『시와산문』2017년 여름호
산티아고 요새 - 2017년 9월, 마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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