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손이 없다 / 나호열
처음부터 바람이었겠는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인줄 알았겠는가
처음부터 눈이 없었고
처음부터 손이 없었다
몸으로 부딪치고 몸으로 부서졌다
그의 사랑은 처음부터 그랬다
종말은 평화로웠다
없는 그의 손이 꽃을 피우고
없는 그의 눈이 잎을 지게 만들었을 뿐
망월사를 오르다가 비를 만났다 / 나호열
비를 만났다
혼자 오르는 산길에서 따가운 질책을 들었다
아무리 맞아도 멍이 들지 않는 목소리
무심히 지나치는 일층의 방 열쇠가
아직 내게 남아 있다.
그 방의 주인은 이미 자물쇠를 교체했을까
가끔은 열쇠로 열어보고 싶은 그 방
끈질기게 비는 나를 노크한다
밤늦도록 편지를 쓰고
전화를 기다리고
한 번 피고 다시는 피지 않는 난초의 몽우리에
가볍게 내려앉던 먼지들
온갖 풍상을 겪어낸 나무들
오래 전에 흘러간 물의 기억들
비를 만났다
수없이 복제되는 열쇠들
그러나 젖는 것이 두렵지 않다
내가 열쇠를 버리지 않는 한
그 방에는 당신의 첫 편지가 있다
눈 내리는 오후가 남아 있다
그 방에는 늘 푸른 소나무가 있다
감포 가는 길 / 나호열
누구나 한 번은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걸어보게 된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이리저리 구비치는
길의 끝을 보았던 기억
그 길의 끝에는 마음을 다하여
기쁨으로 치면 기쁨으로
슬픔으로 다가서면 슬픔으로 울리는 바다가 있음을
꿈꾸듯 살아왔음을
누구나 기억하고 있다
때 아닌 나비떼
눈 한번 크게 뜨니 성성한 눈발이더니
다시 한 번 눈감았다 보니 너울대는 재들
바다 쪽으로 불어가는 바람을 따라
아름답게 사라져버리는 추억을
데리고 가는 길
새 / 나호열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어디로 가야 하는지
붉게 타오르는 서녘 노을 속으로
새들은 느낌표 같은 몸을 하늘에 새겨두고 사라진다
뚝뚝 그 느낌표들은 어둠을 받아 별로 빛나기도 하고
아득하게 지상으로 차갑게 낙하하기도 한다
흙으로 빚어진 몸은 무너질 때도 아름답다
아무 것도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은 동토에도
살아 꿈틀거리는 빛의 양식이 있을거라고
겨울들판에 내려와 앉는다
하늘 가득하던 느낌표들이
지상으로 다가설수록 물음표로
마치 못이 완강한 그 무엇에
구부려지듯이
바람에 나부끼며 휘어지고 있다
公山城에서 / 나호열
평생을 땅파는 일에 투신한 고고학자와 공산성에 오른다
멀리 내다보는 일이 꼭 앞으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의 굽은 등을 바라볼 때 파묻힌 것들의 숨결을 듣는
수없이 많았던 그의 屈身을 생각한다.
감나무에 매달린 감들이 익을 대로 익어 툭툭 눈물 떨어지던
초겨울 오후에 공산성 꼭대기에 올라 그대를 바라본다
높은 곳에 오르면 더 잘 보일 것 같아서 까치발을 들었지만,
높은 곳에 올라야 그대가 잘 보인다는 말은 거짓이다.
고고학자의 꿈은 될 수 있으면 땅을 파헤치지 않는 것이라고
그가 말한다. 문득, 그가 몇 백 년 전의 비바람이 묻은 기와조각을
다시 풀섶에 내려놓듯이
내 가슴에 깊이 그대를 내려놓을 때, 그대가 내 눈에 창으로 다가선다
익을 대로 익어 툭툭 떨어지는 햇살이 아름답던 초겨울 오후
가슴이 운다 / 나호열
거역할 수 없는 슬픔이 있다
예정되어 있으나 슬그머니 뒤로 밀쳐놓은
정답이 없다고 스스로 위안한
풀지 않은 숙제처럼 달려드는 파도가 있다
못질 소리
똑닥거리는 시계의 분침 소리
바위가 모래로 무너져 내리는 소리
이 나이에 사랑은 무슨
이 나이에 이별은 무슨
가슴이 울 때에는 이미 살아온 날들 보다 더 많은
혀를 닮은 낙엽이 길을 지우고 난 후
거역할 수 없는 슬픔은
그것이 이미 예정되어 있는 슬픔인 까닭
짐짓 잊어버릴 수 있을까
세상을 엿보았던 커다란 오해를 받아들인 까닭
가슴이 운다
높은 처마 끝에 매달아 놓은 풍경이
바람 앞에 속절없이 속을 내놓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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