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었다 / 나호열
바라보면
기쁘고도 슬픈 꽃이 있다
아직 피어나지 않아 이름조차 없는 꽃
마음으로 읽고 눈으로 덮어버리는
한 잎의 향기와 빛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향일성 向日性의
시간의 촛대 위에 담쟁이 넝쿨 같은 촛불을 당기는 일
내 앞에서 너울대는 춤추는 얼굴
그 그림자를 오래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이
기쁘고
또 슬프고
강물에 대한 예의 / 나호열
아무도 저 문장을 바꾸거나 되돌릴 수는 없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 이야기인지
옮겨 적을 수도 없는 비의를 굳이 알아서 무엇 하리
한 어둠이 다른 어둠에 손을 얹듯이
어느 쪽을 열어도 깊이 묻혀버리는
이 미끌거리는 영혼을 위하여 다만 신발을 벗을 뿐
추억을 버릴 때도
그리움을 씻어낼 때도 여기 서 있었으나
한 번도 그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구나
팽팽하게 잡아당긴 물살이 잠시 풀릴 때
언뜻언뜻 비치는 눈물이 고요하다
강물에 돌을 던지지 말 것
그 속의 어느 영혼이 아파할지 모르므로
성급하게 건너가려고 발을 담그지 말 것
우리는 이미 흘러가기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었던가
완성되는 순간 허물어져 버리는
완벽한 죽음이 강물로 현현되고 있지 않은가
흐린 날 / 나호열
아침엔 눈 뿌리고
오후에는 비가 내렸다
이 모든 것이 햇살의 조화
아니면 바람의 장난이다
잎 떨군 우듬지 하나가 어깨를 칠 때
나는 창 안에서 그의 손을 잡고 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차를 놓치고
내젓는 웃음으로
길고 어두운 길을 걸어왔다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과 상처는 멀지 않다
가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간직하려고만 할 때
나는 비로소 긴 이야기의 끝에 등장하는
이름 모를 나그네가 될 것이다.
청풍에 가다 / 나호열
불현듯 앞을 막아서는 안개 때문이라고
뒤늦은 발걸음 뉘우칠 수는 없겠네
한 계절 꽃 피우던 얼굴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까맣게 타버린 씨앗
눈물 대신 발밑에 뿌려두었으니
함부로 밟아서도 성급히 손으로 거두어도 되지 않을 일
청풍은 잠시도 발길 멈추지 못하게 하였으나
나는 보고 말았네
옥순봉 호수에 제 몸을 던졌으나
수심 깊어 기암절벽을 물 위에 그려 놓으니
또 푸른 하늘이 그림자를 비추어 주네
선경이라 한들 하루 이틀 삼일이면 시들하다는
나그네의 말씀을 한 귀로 흘리려 하네
오래 바라볼수록 내 몸에 스며들어
없는 듯 살아 숨쉬는 그대여
너는 슬프냐? / 나호열
왜 그러냐고
어떻게 할거냐고
채근을 하는 사람들에게
오늘은 참으로 할 말이 없다
햇볕 맑은 날
이런 날은 쉬임없이 걷고 걸어
이 세상 끝에
빨래처럼 걸리고 싶다
걸레도, 깊은 곳 가려주던 속옷도 가지런히
한 줄에 매달리면 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깃발일 뿐이다, 아무 것도 움켜쥘 수 없는
작은 손일 뿐이다
이 푸른 하늘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는가
타클라마칸 1 / 나호열
사람아 -
부르면 별들이 우수 떨어지는 곳
사람아 -
다시 부르면 바람만 무너져 내리는 곳
오, 짐승들의 무덤
유폐의 땅
아무도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바람의 집이여
신기루를 좇으며
사라지는 사람들
가슴에 뚫린
머나먼 실크로드여
큰 물 진 뒤 / 나호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늘 다시 푸르고
햇빛은 강물에 뛰어 들어가 은빛 비늘을 반짝였다
사나운 마음이 그런 것처럼
붉은 혀 널름거리던 시간이 지나자
영영 사라져 없어질 것 같던 길이며 작은 풀꽃들
휘었던 어깨를 곧추세우고
어느 사람은 뛰고
어느 사람은 천천히 걷고
어느 사람은 힘겹게 지팡이 짚고 걸어가는 길
그 길 속으로 물의 말씀은 스며들어갔을까
오랜만에 강둑에 앉아 강아지풀처럼 흔들거리며
이별이란 말을 버리기로 했다
무심한 듯 떠 있는 구름은 어제의 흙탕물
흙탕물을 먹고 사는 작은 물고기들
이 세상에 영원히 떠나가는 것은 없다
눈이 밝지 못해 회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 뿐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눈물 대신 손을 흔들자
큰 물 진 뒤 세상은 기다림의 푸른 손들로
다시 무성해지기 시작했다
신탄리행 / 나호열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사람 없다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는 사람 없다
가슴 서늘해지는 끝이라는 말
더 이상 갈 수 없는 마지막 역에서
얼마나 나는 부끄러워지는가
온기 가득했던 한 잔의 차를 다 마시기도 전에
작별의 편지 한 장 다 쓰기도 전에
이렇게 당도해버린 낯 선 곳에서
산 속으로 숨어드는 길섶에 무성한
찔레꽃, 하얀 찔레꽃
그 찔레꽃이 죽어 햇빛을 접은 나비로
출렁거리는 내 그림자를 밟는다
사람이 아득하여 숨을 필요도 없는 閑村에
벌거벗어도 깊어보이는 시냇물은 어디로 가는가
산정을 넘어가는 구름에서 내릴 때
차표는 필요하다
이 생에서 내릴 때 나는 아카시아 향을
시냇물 소리를, 애기똥풀의 작은 꽃잎을
내 영혼의 역을 지키는 그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
수취인 불명의 편지처럼 붉은 화인을 안고
나는 다시 나에게 돌아오고 있다
바람으로 달려가 / 나호열
달리기를 해 보면 안다
속력을 낼수록 정면으로 다가서서
더욱 거세지는 힘
그렇게 바람은 소멸을 향하여
줄기차게 뛰어간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나의 배후는 바람으로
바람으로 그대에게 다가간다는 것을
달리기를 해 보면 안다
소멸을 향하여 달려가는 바람과 멀어지면서
나 또한 잠시라도 멈추어 서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싶지만
앞으로 떠밀어내는 힘 때문에
더 멀리 달려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언제가는 풀썩 무릎 꺾고 주저앉기 위하여
거친 숨 몰아쉬며 그대 이름 부르기 위하여
세상에는 그렇게 어딘가를 떠나온
도착해야할 집들을 잃은
꽃들이, 나무들이
바람으로
바램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사월의 일기 / 나호열
말문을 그만 닫으라고
하느님께서 병을 주셨다
몇 차례 황사가 지나가고
꽃들은 다투어 피었다 졌다
며칠을 눈으로 듣고 귀로 말하는 동안
나무속에도 한 영혼이 살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허공에 가지를 뻗고
파란 잎을 내미는 일
꽃을 피우고
심지어 제 머리 위에 둥지 하나 새로 허락하는 일까지
혼자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파란 하늘에서 떨어진 별처럼
주먹만큼 빛나는 새 한 마리가
잠시 머물고 간 뒤
사월의 나무들은 일제히
강물 흘러가는 소리를 뿜어내고 있다
말문을 닫으라고
하느님이 내린 병을 앓고 있는 동안
황사 지난 후 / 나호열
눈길이 머무르는 곳
멀다
손길이 가 닿는 곳
이제는 멀다
아침이면 알게 되리라
밤새 창문에 머리 부딪치며 외우고 또 외웠던
경전의 마디 다 부질없었음을
부질없었으나 그것이 아무도 살지 않는 사막에서 온 것임을
그 가볍고 가벼운 것이 우리의 눈을 감게 만들고
다시 한 번 세월의 더께를 거두게 하는 것을
꽃에 유황 냄새 가득하다
강가에서 / 나호열
물비린내가 난다. 거기 누구? 잠시 멀어졌다가 이내
돌아오는 풀 냄새. 무엇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 머물겠다고 뿌리내리려는 꿈이 꿈틀거리며
울고 있다는 것이다. 더듬거리는 손에 정적이 잡혔다가
저만치 안개로 달아나 버리고 훅, 흐느낌처럼 물비린내가
난다. 살아, 꿈틀거리는 살냄새. 그물을 뚫고 나오는
비릿한 달빛, 멀리 돌아와 가 닿은 포근한 가슴에 등으로
달아 두고 벙그는 꽃잎의 마음을 읽는다. 짧은 생을
마감하는 고추잠자리의 꿈을 지웠다가 다시 허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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