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었네
김경성
유적 같은 몸에 피어난 만첩홍매
벌들의 소리가 사백 년 고목의 검은 몸속으로 들어가네
몇천 번이나 뒤척거리며 꽃의 무늬를 새겼을까
지금 피어있는 꽃은 백 년 전의 꽃이 아니고
이백 년 전의 꽃도 아니라네
그보다 더 오래 사백 년 전으로 들어가
몸부림치며 기다리던 꽃이라네
나무의 눈이 가장 깊게 내려앉은 곳을 파고 들어가면
닫힌 우물에서 차오르는 물의 길이 있어서
꽃자리마다 목이 메일 만큼 진한 향기가 있지
저 꽃들의 눈에 내 눈을 맞추고
금기된 시간 속으로 들어가면
몇백 년 동안 보았던 것들을 내게 다 말해줄 수 있을까
새들과 나비와 벌과
젖빛 향을 내뿜으며 시간의 무덤을 헤치고 나와서
소름 돋은 내 발등에 꽃향기를 흩뿌리네
등걸에 기대어 귓속으로 매화향을 맡네
나는
어디로
어디로
- 『우리詩』2013년 1월호
미암매 - 2012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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