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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丹野의 깃털펜/시집『내가붉었던것처럼당신도붉다』

길을 잃었네

by 丹野 2019. 8. 12.




     

     

    길을 잃었네 

    김경성

     

     

    유적 같은 몸에 피어난 만첩홍매

    벌들의 소리가 사백 년 고목의 검은 몸속으로 들어가네

    몇천 번이나 뒤척거리며 꽃의 무늬를 새겼을까

    지금 피어있는 꽃은 백 년 전의 꽃이 아니고

    이백 년 전의 꽃도 아니라네

    그보다 더 오래 사백 년 전으로 들어가

    몸부림치며 기다리던 꽃이라네

     

    나무의 눈이 가장 깊게 내려앉은 곳을 파고 들어가면

    닫힌 우물에서 차오르는 물의 길이 있어서

    꽃자리마다 목이 메일 만큼 진한 향기가 있지

    저 꽃들의 눈에 내 눈을 맞추고

    금기된 시간 속으로 들어가면

    몇백 년 동안 보았던 것들을 내게 다 말해줄 수 있을까

     

    새들과 나비와 벌과

    젖빛 향을 내뿜으며 시간의 무덤을 헤치고 나와서

    소름 돋은 내 발등에 꽃향기를 흩뿌리네

     

    등걸에 기대어 귓속으로 매화향을 맡네 

    나는

    어디로

    어디로

     

     

     

     

    - 『우리詩』2013년 1월호

     

     

     

     

     

     

     

     


     

     

    미암매 - 2012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