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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한영채 첫 시집 『모량시편』출간

by 丹野 2013. 1. 8.

 

 

 

한영채 첫 시집 『모량시편』도서출판 계간문예, 2012년

 

 

 

 

 

 

 

自序

 

철둑 너머 어머니가 있다

어둑한 길가 귀퉁이에서 불쑥 나타나시던 귀가 길

어머닌 늘 달그림자였다

삶에 지쳐 있을 때

詩가 왔을 때

달그림자는 베토벤의 월광으로 다가왔다

월광은 붉은 길을 만들었다

붉은 길은 외롭고 고독하고 쓸쓸했지만

벅찬 기쁨이었다

내가 詩와 놀 때

어머닌

하얀 시트 위에서 수 년을 기다렸다

내가 뒤돌아 봤을 때

오시던 길로 되돌아가셨다

그녀는 나의 詩였다

간곡한 일기들을 어머님께 바친다

이제

어머니를 놓아 드려야겠다.

 

 

 

 

 

 

 

 

 

입춘

 

한영채

 

 

이파리 까르르 물기 오른다

공원이 바쁘다

백목련 봉긋 울타리 담장을 넘본다

가지 사이 어린 백로 솜털 고르며

푸드득 날갯짓이다

물기마른 가지에 푸른 바람꽃 피워낸다

새털처럼 밝은 오후다

 

봄 지나고

하루 더 살아야겠다

 

 

 

 

 

 

 

모량역

 

한영채

 

 

고요하다 사월 무논 같은

간이역

뒤란 왕벚꽃 무성한 소문같이 꽃비 내리던

낮은 담벼락

차르르 쌓인 그 소문, 꽃비 되어

떠나보낸 대합실

말더듬이 역장의 붉은 깃발과

새벽 호각소리 멈춘 어스름 달빛

운동화 이슬에 흰 코 적시며 논길 걷던,

대구행 비둘기호 출발선

모량건천아화임포영천하양청천반야월

손가락 세며, 미루나무 세며

더듬어 보는 옛길

단석산 그리매 아직도 안녕한지

철길 위에 부려 놓는

시큰한 간이역.

 

 

 

 

 

 

가을, 오어사

 

한영채

 

 

포항 운제산 절벽아래

꽃살무늬 병풍 친 가을 오어사

물고기 깨우는 목어

원효인 듯 혜공인 듯

오늘이 천년인 듯

오어지吾魚池한 바퀴 돌아 헤엄치는 물고기 떼

산등성이 원효암, 자장암 올려다보고 있다

뜨락에 오래된 배롱나무

나목으로 견딘 텅 빈 가을의 중심

절벽 아래 외로운 억새

가을을 통곡하듯

남은 이야기 돌탑에 부려 놓으며

서성이는 낮은 햇살

오어사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

 

 

 

 

 

 

암각화

 

한영채

 

 

화창한 봄날, 울주군 대곡 산231-1번지

강 너머 꼬물거리는

선사시대 그들, 빗살 바위에서 만난다

휘어진 물길 수 천 년 하루 같이

구곡으로 흐르고,

멈추다 흐르는 대곡천 물길

흙발 부처가 옹송옹송 모여 있는 절벽마을

호랑이 늑대 꽃사슴 흑등고래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동해바다를 건너 온

그들 바위에 그린 암각

부엉이 얼굴보다 둥근 망원경 안에 산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각질 분분한 선사시대 소리가 강 건너 있다

21세기 고래가 된 나는

첨범 선사 마을을 건넌다.

 

 

 

 

 

드므가 사는 집

 

한영채

 

  꽃그늘이 포록포록 달포된 강아지를 재운다. 처마 밑 펑퍼짐하게 눌러앉은 독, 옹이진 가슴 불길 잡으려 여태 맑은 물 고집하고 있다 돌계단을 오르자 사랑채 모퉁이 느티나무 옹이, 오도카니 이파리에 쌓여 익숙하다 태풍에 부러진 가지들 고물고물 육 남매 바람 잘 날 없던 곳 할머니 관절염 앓기 전부터 초록은 그늘을 안는다 혼기 지난 시누의 신열같은 골똘함과 내 안의 개울물 소리 일 때 촉수 세운 새싹들 할아버지 손길 느리게 수평을 일군 앉은뱅이 나무의자 둥근 독 속에 비친 그의 파랑들을 기억한다 느티 아래 무순을 뽑아 새댁 입덧 맞추느라 분주한 오후 구름 한 자락 줄장미 담장을 걷다 드므를 다녀간다 오래된 물거울이 훤하다 드므엔 노부부가 산다.

 

 

 

 

 

 

그해 고욤

 

한영채

 

그해 말랑한

고욤나무 일기를 펼친다

흑백 필름, 숨 가쁘게 돌아간다

태풍 지나간 새벽

밤새 흔들려 그 고욤 파리하다

감꽃이 내릴 무렵

그녀의 젖꼭지 같은 고욤꽃

뽀얀 속살 드러내고

가지가 휘도록 부둥켜안는 작은 낯빛

칠월 초닷새 땡볕이 떨어질 줄 모른다

몇 번의 태풍이 더 스치고

새털구름 고욤꽃 위를 나르면

찰진 고것들 말랑말랑

고놈 엉덩이 실하다고

큰 오빠가 가지를 내리칠 때

천 리 밖으로 뿌려지는 향

검은 항아리에 볏짚 올려놓고

가을아, 떠나 보낸다

아릿한 향내

놋숟가락 휘도록 퍼올리다

그해 겨울은 바닥이 났다

 

 

 

 

횡 투옌

 

한영채

 

 

 

한국어 수업을 받는 베트남 그녀, 횡투옌

삶의 촉수가 되어 버린 꽃

엄마와 거닐 던 강둑은

어떻게, 안녕한지

공원 호수에 너울대는 앙다문 꽃잎들

 

적막한 여름 소나무 위로

보름달 비치면

메콩강 바람이 뿌옇게 인다

 

 

 

 

 

 

 

한영채 시인

 

경주출생

방통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6년 '문학예술'로 등단

울산문인협회. 울산시인협회

동리목월 시작나무 동인, 시와사람들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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