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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영암사지에서* 외 4편 / 이동훈

by 丹野 2012. 12. 16.

       

      영암사지에서*

       

      이 동 훈

       

      연암은 요동 벌판에 가

      한바탕 울어 볼 만한 장소라고 했다는데

      영암사지 금당 터 돌계단은

      한눈에 기다림의 장소인 줄 알겠어요.

      턱을 괴고 오래오래 있자니

      별날 것도 빠질 곳도 없는 풍경에 시력이 살아나요.

      쌍사자 석등에서 삼층석탑까지

      서로 바라보되 웬만치 떨어진 거리에

      완만한 경사 따라 마음마저 갸울면

      지붕돌 위 구름 한 장처럼 아득해져요.

      가릉빈가의 날갯짓으로

      햇살 부서지면 전설은 다시 깨어나죠.

      금당 터 돌계단에 앉으면

      기다림도 눈부실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요.

      화사석에 달이 들 때

      무지개계단 밟고 올 이를 위하여

      세월없이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더 기다리고 싶은 거지요.

       

       

       

       

      * 경남 합천군 가회면 소재

       

       

       

       

       

       

      미탄사지에서*

      이동훈

       

       

      사랑을 잃은 것은

      내 안의 가난을 가누지 못한 탓이라고

      깐돌 하나 집어내듯 말했지만

      그게 구차하고 맹랑한 핑계인 줄

      미탄사지에 와서 생각한다.

      쭉정이만 남은 벼는

      꿀릴 게 뭐 있냐며 섰고

      논배미에 앉은 석탑은

      천 년 돌에 새로 뗀돌을 붙접하고 섰으니

      이런 걸 궁상맞다고 하는 건

      못난 사람의 억측일 뿐이다.

      들녘에 어슷비슷한 벼 이삭이

      수런수런 재깔이는 사이

      논도랑에 고만고만한 고마리 꽃이

      홍조 띤 얼굴로 마주하는 사이

      석탑은 들바람 부려 놓고 잠잠한데

      돌 하나 세우지 못하고

      돌 하나 허물지 못하는

      내 안의 가난과 그 가난을

      속상해 하는 마음까지

      달게 삼키는 미탄사지味呑寺址

      경주 발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지난다.

       

       

       

       

       

      * 경북 경주 구황동 소재

       

       

       

       

       

       

      장연사지 삼층석탑*

      이동훈

       

       

       

      처진 어깨를 하고

      처진 소나무*를 보러 가는 길이었네,

      뻗치고 오르려는 욕망을 어떻게 뉘고 섰는지

      가까이 살필 참이었네.

      이정표를 대신하던 동창천은

      산 그림자를 안거나 밀면서 길을 앞서갔네.

      처진 소나무를 지척에 두고

      그만 곁길로 꺾어든 건 비트적거리던 마음이

      한쪽으로 쏠렸기 때문이네.

      돌다리를 지나서 감나무 밭에 이르니

      어둑서니 같은 석탑 두 기가 점점 도렷해지네.

      이편의 탑은 한때 도랑에 처박혔다는데

      저편의 탑을 보다가 알았네.

      무너지고 버려진 이편을 끝내 일으킨 건

      남겨진 탑의 기도였다는 사실을.

      홍시가 익을 때 다시 오라는 말을 뒤로 하고

      돌다리를 돌아나가네.

      처진 마음을 다리 밑으로 흘려보내니

      처진 소나무의

      편안한 어깨가 성큼 다가오네.

       

       

       

       

      * 경북 청도 소재

      * 매전면 처진 소나무, 천연기념물 제295호

       

       

       용장사지 삼층석탑*

        이동훈

       

       

        남산 용장茸長골 가는 길에 일행끼리 지명에 쓰인 용자의 쓰임에 대해 궁리했다. 자전의 해석은 귀(耳)에 잔털(艹)처럼 수목이 무성한 모습이라는 것인데 그땐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사슴뿔처럼 뻗친 계곡의 모양새에서 용 자가 생겨났을 거라는 말도 나중에 들었다. 이런 지식이 미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더 생생한 깨달음은 따로 있었다. 봉우리에서 한 발 내려설 때였다. 궁둥이를 살짝 까놓은 듯한 언덕바지, 그 끝에 외따로 선 석탑과 처음이면서도 오래 알고 지낸 것처럼 자연스레 마주했다. 석탑이 있는 곳은 하늘과 맞닿은 땅의 배꼽 자리 같기도 하고, 부챗살 모양의 안쪽 중심 같기도 한데 용자의 비밀은 거기에 있었다.

       

        우주와 교신하려고 안테나(艹)를 맞추는.

       

       

       

        잠투정으로 칭얼대던 아이를 겨우 물리고 인화된 석탑을 몇 번이나 보고 본다. 지금쯤 용장골 꼭대기엔 안테나 서고, 발부리 들썩들썩하여 우주와의 소통이 한창이겠다. 내 귀와 더듬이도 뒤늦게 아이를 잡기 시작한다.

       

       

       

       

       

       

      * 경북 경주 남산 소재

       

       

       

      창림사지 삼층석탑*

      이동훈

       

       

      어떤 주문을 외어야

      몸돌의 쌍바라지를 열 수 있을까.

      저 문 안에 들면

      높아도 높바람 없고 누워도 윗바람 없는

      고루고루 뜨스운 세계가

      내밀하게 마련되어 있으리.

      아직 계약하지 못한 날의 밥을 위해

      - 열려라 밥!

      주문을 걸어 볼까.

      바닥이 쉬 보이는 뚜껑밥 말고

      나누어 더 푸짐한 두레밥을 빌어 볼까.

      기단에 내려서서 문을 지키는

      아수라의 갈퀴눈이 물러지거나

      건달바의 종주먹이 느슨해지면

      천 년 비밀을 열어젖힐 듯

      사방의 문고리가 달싹거리지.

      공교롭게도 노루 한 마리

      소나무 그루터기로 뱝뛰어 내려와

      잠시 한눈팔기라도 하면

      문고리는 다시 요지부동이야.

      저녁놀에 불그름히 물든 창림사지에

      밥때 잊고 오래 서 있으면

      사람의 마을로 어서 내려가라고

      둥근 턱으로 미는

      석탑 한 기 있어.

       

       

       

       

      * 경북 경주 배동 소재

       

       

       

       

      이동훈

      2009년 월간 《우리詩》로 등단

      hunii70@naver.com

       

       

      -<<우리詩>> 2012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