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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창작 강의

양생(養生)의 시학 / 공광규

by 丹野 2012. 11. 28.

 

 

양생(養生)의 시학 / 공광규

 

 

 

 예술은 무엇인가? 문학은 무엇인가? 시는 무엇인가? 하고 물어 오면 쉽게 대답을 할 수 없다. 그러나 누가 나에게 '왜 시를 쓰느냐?'라고 묻는다면, 아마 나는 잘 살기 위해, 좋은 삶을 위해, 나를 살리기 위해 시를 쓴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는 한 마디로 양생(養生)을 위한 시 쓰기인데, 몸을 건강하게 하여 오래 살기를 꾀한다는 국어사전의 의미를 나름대로 확장한 것이다.

오래전 인사동에서 차를 우려내는 중국산 자사호(紫沙壺)를 구입하여 사용 중인데, 몸통에 초서로 양신(養神)이라는 음각이 파여 있다. 다른 사람이 오래 사용하여 주둥이 쪽에 금이 간 흔적이 있지만 안정된 자태와 묵직한 색감, 획이 날렵한 음각의 칼끝 맛에 끌려 산 것이다. 정신을 기른다는 양신은 양생과 같은 말이다.

나의 미천한 시력을 돌아보니 양생을 위한 시 쓰기였다. 무릇 시뿐이겠는가? 모든 예술 활동이 양생을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시가 사람의 삶에 재미와 감동과 이익을 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생명력을 유지해오지 못했을 것이다. 몸과 마음에 이익이 되지 않고 즐겁지 않으면 굳이 시를 읽거나 쓰고 편집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생 역정에서 시를 배우고 시와 살아가면서 얻은 양생의 시학은 나의 80대 할아버지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공자는 시에 대한 식견이 상당해서 <시경>을 편찬하여 제자들을 가르친 것이니, <시경> 또한 공자의 시학관이 반영된 책인 것이다.

 

 [정직한 마음이 담긴 시]

양생을 위한 시 쓰기 조건은 가장 먼저 정직한 마음이 담긴 시 쓰기가 아닐까 한다. 인문주의 학문전통을 확립한 공자는 시를 한 마디로 말하여 '사무사(思無邪)'라고 하였다. 시를 생각함에 간사함이 없고, 어긋나지 않으며, 치우침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쉽게 말해 시에는 정직한 마음 이 담겨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공자가 시를 선별하여 <시경>을 편집할 때 기준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시를 창작할 때도 정직해야 한다는 말이고, 시를 읽을 때도 정직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 시를 읽고 쓰고 편집하는데 정직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권력에 아부하는 어용적 시 쓰기는 그만두고라도 유행을 따라 쓰거나 겉멋 부리기, 문예잡지 중심의 추겨세우기나 자기 사람에게 문학상을 챙겨주는 것도 사무사에서 어긋나는 일일 것이다. 주례사 비평이나 시집 뒤의 해설도 마찬가지이다. 나 역시 사무사에 어긋나는 짓을 해왔다.

시에 대한 정직하지 못한 평설 쓰기나, 표현은 그럴듯하지만 진정한 마음과 일치하지 않는 시를 쓰고 발표하는 일이 모두 사무사와 어긋나는 일이다. 과거의 시들을 남에게 내보이기 부끄러운 것은 시에 정직한 마음의 들어가 있지 않아서일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 발표하는 잡지의 경향에 시를 맞추거나 심상과 어법을 남의 시에서 빌려오는 표절을 일삼아오지 않았던가. 이렇게 남에게 보이기 위한 수식을 강조하다 보니 종이만 허비하여 자원만 낭비하는 꼴이 된 것이다.

나는 20여년 전 회사에서 쫓겨나 해고무효소송이라는 송사를 겪은 적이 있다. 사용자측 변호사들이 해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첫 시집 <대학일기>와 <마른 잎 다시 살아나>를 법정에 제출하는 것을 보고 시의 영향력을 실감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수난을 당한 시집을 당당히 내세우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진실과 수식의 일치가 없는 시 쓰기, 겉치레의 시 쓰기였다는 것을 내 양심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집이 나오자 나는 약간은 뿌듯해하고 들떠 있었지만, 한편으로 내 시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후회하고 있었다. 나와 내 시가 겉도는 느낌을 숨길 수 없던 이유는 무엇보다 정직성 문제였다.

첫 시집이 나온 지 2년 만에 두번째 시집 <마른 잎 다시 살아나>를 내놓고는 더욱 내 자신에게 절망하였다. 출판업자의 말에 끌려서 시집 출간을 서둘렀던, 시를 대하는 사무사하지 못한 태도가 난 자신에게 큰 후회를 안겨준 것이다. 두번째 시집에 대한 후회는 끊임없이 나를 불편하게 따라다니며 양생을 방해하고 있다. 그 이후로 나는 마음에 정직한 시를 시의 가장 큰 미덕으로 삼고 있다.

 

[전인적 시 쓰기]

그 다음으로 떠오르는 것은 전인적 시 쓰기이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왜 시를 배우지 않느냐고 재촉하였다. 그런 후 "시는 마음을 감흥시키고(可以興), 사물을 올바로 볼 수 있게 하며(可以觀), 남과 잘 어울리게 하며(可以群), 원망할 수 있게 하며(可以怨),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게 하며(邇之事父), 멀리는 임금을 섬기게 하고(遠之事君),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多識於鳥獸草木之名)"고 하였다.

이것은 시의 효용에 대한 언급이면서 동시에 전인적 시 쓰기를 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나는 세상의 원리와 물정, 인간관계를 두루두루 잘 아는 사람을 전인적 지식인이라고 본다. 문약서생으로 책상 위에서 시를 위한 시를 쓰는 사람이 어찌 지식인이고 교양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찌 그들의 마음에서 개인이나 사회의 양생에 도움이 되는 시가 나오겠는가?

계간 문예지 편집자인 나는 최근에 발표되는 시들을 찬찬히 뜯어보는 편이다. 그러나 대부분 의미 정보도 미적 정보도 얻을 수 없는 시들이 천지여서 실망스럽게 책을 덮곤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오랫동안 살아남은 시들을 떠들어보고 음미한다.

사람은 조수와 초목에 대한 교양으로 이들과 어울려 살 때 양생이 가능하다. 그것이 요즈음 강조하는 생태적 삶일 것이다. 그러니 사람과 조수와 초목이 함께 어울리는 화엄의 세계를 이해하고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감동적인 시라고 본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답답해서는,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는 전인적 교양인이 되지 않고서는 올바른 시를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자신의 아들 백어에게 시를 배우지 않으면 담장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서 있는 사람과 같이 답답하여 대화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자신의 아들에게 시를 공부하여 양생의 삶을 살라고 꾸짖는 공자의 마음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양생의 삶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그러려면 시에 사람 사는 이야기가 빠져서는 안 되며, 현실 사회 정세와 담을 쌓고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현실의 정세는 현실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총합이다. 그런데 정세를 판다하는 지식은 학벌이나 학력과 상관이 없다.

세상의 물정과 조수와 초목을 잘 아는 사람이 전인적 지식인일 것이다. 전인적 지식의 태도로 시를 쓰거나 읽거나 편집하는 능력을 지닌다면 시의 반만 가지고 천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세번째 시집은 <지독한 불륜>인데, 이는 자본과 권력 간에 벌이는 불륜을 비유한 것이다. 결국 자본과 권력의 지독한 불륜을 시집으로 경고한 지 1년 만에 우리나라는 파산하여 많은 민중들이 절망에 빠지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사태이다. 그리고 그 여파로 절망한 가장들의 삶을 네번째 시집 <소주병>에 담으려 하였다.

2008년 말, 최근 미국에서 발생한 금융위기로 세계가 휘청거리고 있다. 미국에 경제, 사회, 문화적 종속이 심한 한국은 말할 것도 없이 파산 직전이다. 인간의 과욕과 과잉이 낳은 신자유주의 파탄으로 수많은 민중의 삶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 이러한 정세를 직시하고 정세의 본질과 우려, 거기에 휘둘리는 인간의 이야기를 시로 써내는 것이야말로 나와 남을 살리는 양생의 시 쓰기가 아니겠는가?

 

[사회현실과 호흡]

인생의 문제는 먹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싶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 두 가지로 귀결된다. 그리고 모든 선악의 문제는 이 두 가지에서 파생된다. 따지고 보면 정치, 전쟁, 학교, 혼인, 사찰과 교회 등 세상의 모든 제도가 이 두 가지를 위해 발명된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잘하고 사는 것이 양생의 삶이 아니겠는가?

밥 한 숟가락을 푹 떠서 입에 넣기 전에 밥숟가락을 쳐다보자. 한 숟가락의 밥은 얼마나 정치적인가. 그 쌀값의 단위가 어디서 결정되는가. 농민들은 왜 벼를 불태우고 소를 끌고 여의도로 진격하고, 할복을 하는가.

시인이 사회정치적 호흡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에서 출발하는 다양한 상상력을 통해 사회정치적 폭력과 시장 중심의 사회에서 꿈을 상실해가는 인간에게 자신의 삶과 집단을 재조정하고 희망을 갖도록 부추겨야 한다.

공자는 시 삼백 편을 외우더라도 정치를 맡겼을 때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詩 三百 授之以政 不達), 사방에 사신으로 나가서 혼자서 대처하지 못하면 비록 많이 배운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 亦奚以爲)고 하였다. 시의 실용성, 시와 사회정치와의 긴밀성, 책상물림의 헛똑똑이를 경계한 것이다.

현재 우리의 시인들은 젊으나 늙으나 정치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 무관심으로 정치사회적 상상력을 백안시한다. 왜 시인들은 자신과 집단의 삶의 조건을 결정짓는 사회현실과 호흡하지 않는지 갑갑할 뿐이다. 이것은 정신보다 문자에만 매달리는 태만한 작가정신에서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모든 시인이 지식인이나 지성인은 아니다. 시는 약간의 감성과 상상과 기억과 글쓰기 기본을 익히면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시인이 중요하며, 동시에 중요하지 않다. 시인이 사회의 다른 직업군보다 더 책임있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훌륭한 시는 사회정치적 상상력으로 현실과 호흡을 유발하는 시들이 아니겠는가?

구체적 생활이나 전망이 없는 관념과 말놀이만 무성한 시는 감동을 유발하지 못한다. 물론 허구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시는 개인과 사회에 적절한 꿈과 희망의 언어를 불어넣고 실현되도록 충동질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시인은 정치와 시, 시와 사회 사이의 벽을 상상력으로 깨부수어 사회정치적 상상력과 문학성, 시성이 조화되는 형상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시 쓰기와 읽기를 통해 현실을 도피하고 삶의 위안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도피하고 위안만 받아서는 근본적으로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시인 모두가 정치시, 사회시를 써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사회현실과의 호흡을 통해 현재 인간 삶의 조건을 건실하게 할 수 있는 균형 있는 상상력을 시에 발휘하자는 것이다. 적어도 사회의 책임 있는 성인으로서 시를 쓰거나 시 공부를 하면서 역사의식, 사회의식, 정치의식의 지진아라는 조롱을 받지 말자는 것이다.

 

[재미의 전략 필요]

양생의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재미있게 산다는 것이 아닐까. 오랫동안 혼자되어 아흔이 넘어 돌아가신 할머니가 하던 말이 간혹 떠오른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나를 따라다니면서 항상 "사는 게 재미가 없어, 재미가 없어" 하셨다. 식구들이 자기 일로 바빠 노인과 얘기 상대를 해주지 않으니, 놀거리를 스스로 찾지 못했던 노인은 항상 사는 게 재미가 없다며 한탄하다 돌아가신 것이다.

지금도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서 어떻게 사느냐 물어보라. 그러면 재미가 없다거나 재미가 있다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장사하는 친구에게 재미가 있느냐고 물으면, 일이 잘 풀리는 사람은 재미가 있다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시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공자는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知之者 不如好之者), 좋아하는 자는 즐거워하는 자만 못하다(好之者 不如樂之者)고 하였다. 시에 대하여 알고만 있는 사람은 시를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즐기는 사람만 못할 것이다.

그러니 시를 쓰는 것도 재미가 있고 읽는 것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어디 그런가. 숱하게 쏟아져 나오는 잡지와 시집과 시들 가운데 재미를 주는 것들이 얼마나 될까? 즐기기 위해서 시를 쓰고 읽고 편집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모두 임무, 업무로 시를 하지 않는가? 그러면서 독자가 없고, 문학이 죽었다고 아우성들이다.

나는 현대시의 지루하고 난해한 방법적 관성을 균열시켜, 시가 좀 더 재미있게 독자의 관심을 끌어보자는 '독자 꼬시기' 전략으로 재미시론을 제안한 적이 있다. 이것은 문학의 유희정신을 되살려보자는 것이기도 하지만 시가 읽히지 않는 시의 위기론에 대한 해법적 제안이기도 하였다.

문학에서 재미의 문제는 어제와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재미의 전통은 이미 우리의 구비문학이나 연희문학에서는 물론이고 민요와 한시, 선시, 시조 등 전통 시가와 현대시에서도 빈번하게 발견된다. 또 재미를 획득한 작품은 그렇지 않은 작품에 비하여 독자의 관심 속에서 살아남아 오랫동안 후대에 전승될 가능성이 더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에서 재미를 유발하는 목록들은 무엇일까? 단순한 말놀이에서 시작하여 부조리와 왜곡, 악의나 질투, 위선 떨기, 외설과 욕설 등등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희언과 풍자, 우화, 농담, 과장과 축소 등을 통하여 정직한 마음을 절실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재미를 주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시는 또다른 쾌감을 주어야 한다. 어떤 고정된 법칙, 이를테면 재미를 주는 법칙조차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매일 출근해야 하는 노동자처럼 지겨울 것이다. 시의 내용을 도덕이나 종교, 철학, 이념에 종속시키는 것은 사장에게 전신을 조아려야 하는 종업원처럼 즐겁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시인은 아무에게도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아름다운 형식을 만들고, 이를 독자에게 감성 형식으로 던져주어야 한다. 그럴 경우에만 시를 만드는 창작자 자신과 그 아름다운 형식을 받아먹는 독자가 시의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재미의 전략은 시 쓰기에 재미를 의식하고, 당대 시들에서 보이는 상투적 표현과 내용들로부터 전략적으로 도망치는 방법이기도 하다. 당대의 지루한 내용형식과 표현형식에 대한 전복이기도 하다. 그러니 주의할 것은 재미를 강조한다면서 시의 본질을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시의 본질은 무엇인가? 시인의 사유와 감성, 기호를 조화시키고 독자에게 감각적 쾌감을 불러일으켜 양생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동양시학에서 출발]

그러면 양생의 시학을 구축하기 위하여 어떻게 공부를 할까? 서양에서는 문학을 공부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고 <성서>를 읽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동양에 사는 우리의 문학 공부도 대학에 들어가면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하는 나쁜 습성이 있다. 신문학 초기에 서양 것을 공부한 얼빠진 사람들이 우리 강단을 장악하여 문학을 가르치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본다.

나는 이러한 방법을 참으로 이상한, 주체성이 없는 공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선 나는 후배들에게 동양의 제1서인 <논어>의 시학을 먼저 배울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민족 제1서인 <삼국유사>와 민족의 문호들인 이규보와 정약용의 시와 시론들을 중심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물론 서양 것을 무시하는 것은 올바른 공부 방법이 아닐 것이다. 서양의 것도 열심히 공부를 할 필요가 있으며, 서구문학이 한국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이 담긴 동양과 동양 속의 우리의 것을 잘 알고 나서 서양의 것을 소화해나가는 것이 순서라고 본다.

지난 30여 년 가까이 서양 문학이론을 중심으로 시를 배우고 학위 논문도 썼지만 아직까지 정확히 이해가 가는 개념어가 별로 없고 자신이 없는 게 사실이다. 이것은 필자가 공부를 열심히 안 한 탓도 있겠지만 어쩐지 몸에 잘 안 맞아서 그렇다는 생각을 많이 해왔다.

나의 선생님들도 내용을 잘 모른 채 서양 이론으로 시를 가르치고, 나도 잘못 배워서 이곳저곳에 헛소리를 쓰거나 말하고 돌아다니니 후배들도 깊은 울림으로 받아들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동양의 시학을 먼저 공부하고 서양 것을 공부할 것을 강조한다. 동양의 시학에 자신의 시학을 확고히 매어놓고 서양 이론을 공부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그러면 양생의 시 쓰기를 위한 자신의 문학관을 확고히 묶어놓을 만한 동양의 책은 무엇인가? 물어보나마나 동양정신의 원류이자 동양시학의 원전인 <논어>가 아니겠는가. 프랑스문학을 전공한 국내 학자가 공자를 개혁적이고 진보적 인물로 평가한 글을 본 적이 있다.

흔히 유교하면 버려야 할 구시대적 사고라고 생각했으나, 공자의 철학이야말로 개혁적이고 진보라는 것이다. 또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이며, 도피적이 아니라 참여적이며, 병적이 아니라 건강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합리주의자였고 인본주의자였으며 이성주의자였고 현실주의자였고 어떤 면으로 보면 포스트모던적 사상가라고까지 한 것을 기억한다.

<논어>는 유교의 핵심 교본이자 사회, 정치, 경제, 심리 등 학문서이며 윤리 교과서이다. 그러면서 훌륭한 문학 교과서이다. 이 고전으로 여러 시인들과 시를 공부 중인 사람들이 나름대로 양생의 시학을 정립하여보면 어떨까.*

 

 

출처 / 세상과 세상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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