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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창작 강의

창작의 의의와 실제 / 나호열

by 丹野 2012. 11. 28.

 

 

 

창작의 의의와 실제

- 몇 편의 시를 중심으로

 

 

나호열

 

 

1. 왜 글을 쓰려고 할까?

 

의식하던, 안하던 간에 글쓰기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유난히 표현욕구, 즉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문제를 자신의 개성에 의해 창조하려는 의지가 있다. 자신의 개성이라는 것은 이 세계에 유일무이하게 존재하고 있는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에 다름 아니다. 신대륙이나 무한천공의 어느 별을 처음 발견하였을 때의 짜릿한 경이로움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찾아내지 못한 전인미답 全人未踏이라 할 수 있는 주제의 독특함, 문체의 유려함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천재가 아닌 이상 의도한 대로 수준 있는 창작물을 수확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훌륭한 작가의 생각이나 문체를 모방하는 단계를 거쳐 자신만의 세계관, 문체를 터득하게 되는 긴 시간의 수련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표현 욕구가 지나친 나머지 남의 글을 자신의 글로 둔갑시키는 요령(?)을 부리는 사례가 종종 일어나고는 한다. 이른바 표절이라고 하는 유혹에 빠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이 무엇이 표절인지 가려내자는 데 있는 것은 아니고 무엇이 표절행위를 야기시키는가에 주어져 있으므로 간단히 표절이 의심되는 예시문을 제시하는 것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예시문 ①은 빈 소주병을 아버지의 은유물로 제시하면서 부권상실의 시대를 증언하고 있는 반면에 ②는 빈 소주병을 화자 話者의 심리를 대변하는 상징으로 사용하면서 그로부터 촉발되는 자유의지를 표명하는 단서로 사용하고 있다. 누가 보아도 ①과 ②의 도입부는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 민망스러울 만큼 똑같다. 글을 쓰다보면 자신의 의도에 알맞거나 인용하고 싶은 문구를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대다수의 작가들은 패러디(parody)의 기법을 사용한다. 한 마디로 패러디는 다른 사람의 작품을 모방하면서 이것에 변형을 가하여 풍자의 골계미를 드러내는 시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표절을 피하면서도 자신의 의도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표절이 횡행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글을 쓰려고 하는 목표 또는 목적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데에 문제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정화 淨化(카타르시스)의 상태를 지나 문명 文名을 떨치고 싶은 과도한 욕심이 글을 망치고 사람을 망친다. 그렇기 때문에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나 작가지망생들이 명심해야 할 사항은 자신이 왜 글을 쓰고자 하며 글을 씀으로서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분명한 입장이라는 것에옳고 그름, 좋고 나쁨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음도 또한 명백하다.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면서

속을 비워 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 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시 「소주병」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심연의 바람이 세게 불던 반 나는

문밖에서

내가 흐느끼는 소리를 가슴으로 들었다

 

나가보니

화장실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 바로 나였다

 

새가 되어 날고 싶었다

검푸른 바다 위를

한 마리의 새로 날고 싶어

해풍을 날개에 찍어 바르며

거센 물결 박차고 솟구쳐 올랐다

 

깃털마다 쩍쩍 달라붙던

햇살조각을 떼어

먼먼 수평선 너머로부터 건너오는

세상을, 환하게

더 환하게 색칠하면서

창공을 날아오르는 동안

 

나의 죽지뼈는 점차 멍이 들었다

파랗게 멍든 육신에 신열이 일어

온몸을 꽃밭처럼 열꽃이 뒤덮었다

 

한 점 견고한 적막으로 나부끼는

외줄기의 파도소리,

펼쳤던 날개를

멍든 날개를 이제 접으라 한다

빛을 끌어안고 한 자락 해조음 되어

밀물에 스며들라 한다

 

시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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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상 또는 자신을 향한 절실한 외침의 글쓰기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 행동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문학 인구는 문학의 위기를 경고하는 가운데에서도 그 열기를 여전히 뿜어내고 있다. 경제적 풍요에서 비롯된 여가의 확대는 글쓰기의 생활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였고, 시와 수필의 창작 인구를 급속도로 늘리는데 중요한 동인이 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작품들이 차별성과 독창성을 가지지 못한 채 단순히 자신의 표현 욕구를 충족하는 상태에 머무른다면 이는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역기능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글 쓰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덕목은 자신의 삶에 - 순간 순간 살아가는 감각적 반응에 몸서리치면서 - 절실하게 다가오는 그 무엇을 포착하는 능력의 배양에 있다. 문제의 핵심을 비켜가는 자연에 대한 찬탄, 이별과 그리움, 몸으로 부대끼고 마음으로 문지르지 않은 잠언투의 소회는 외화내빈 外華內貧의 사치를 낭비하게 할 뿐이다. 그렇다면 절실한 외침이란 무엇일까? 정민 교수의 『한시미학 산책』 ( 솔 출판사, 1999)의 열 한 번 째 이야기 「시인과 궁핍」에는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재미있는 답변들이 소개되어 있다. 간략하게 그 내용을 풀어본다면 다음과 같다.

 

1)시궁이후공 詩窮而後工 : 시는 궁해진 다음에 더 좋아진다

2)시능궁인 詩能窮人 :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한다

3)궁불여달 窮不如達 또는 달이후공 達而後工: 시의 뛰어남과 졸렬함은 궁달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타고난 능력과 관련이 있다.

 

궁窮은 빈곤함을 이르는 말이고, 달達은 능통능숙함을 말하는 것이며 공工은 작품의 우수함을 뜻한다. 문학공부에 열렬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 당신의 귀한 자제가 글쓰기를 업으로 삼기를 원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대부분의 답볍은 안된다는 것이다. 글쓰기가 밥벌이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망도 밝지 않다는 이유!

 

한 마디로 ‘궁함’은 결핍을 자각하는 상태이다. 결핍으로부터의 탈피는 일차적으로 배설 排泄로 해소되고 결핍으로 말미암은 절실함으로 빚어지는 정화淨化로 마무리된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궁함’은 마땅히 경제적 궁핍 뿐만 아니라 끝내 이르지 못할 이데아(理想)의 구현을 간구하는 행위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고 그런 까닭에 일상의 습관적 욕구를 벗어나 이 세계의 구조와 부조화와 괴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시능궁인의 상태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생활의 궁핍 여부와 상관없이 타고난 재능으로 뛰어난 작품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진다. 세세한 실례를 들지 않아도 우리 주변에는 이와 같은 시인, 작가들이 엄존하고 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창작이란 상식에 물든 동어반복의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자신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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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학은 어려워야 하는가?

 

시에는 무슨 근사한 얘기가 있다고 믿는

낡은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시에는

아무 것도 없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생 밖에.

 

믿고 싶어 못 버리는 사람들의

무슨 근사한 이야기의 환상 밖에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의지와 이상 속에 자라며 흔들리듯

그대의 사랑도 믿음도 나의 사기도 사기의 확실함도

확실한 그만큼 확실하지 않고

근사한 풀밭에는 잡초가 자란다.

 

확실하지 않음이나 사랑하는게 어떤가.

시에는 아무 것도 없다. 시에는

남아있는 우리의 生밖에.

남아있는 우리의 생은 우리와 늘 만난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믿고 싶지 않겠지만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오규원, 「용산에서」 전문(『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문학과 지성.1978)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모두 가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노래에 능함은 가수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이지 필요조건은 아니다.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음정과 박자를 정확하게 짚어, 노래의 정조를 잘 표현하는 (達의 경지)것이라면 그와 같은 사람은 부지기수로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래를 듣는 것, 노래를 부르는 것에 즐거움을 느낀다. 가수들은 독특한 음색, 노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평생 노래 부르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고음을 능숙하게 처리하는 가수가 있고, 중저음 밖에 소화하지 못하는 가수들도 있다.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 즐거움을 누리는 시간의 몇 곱절에 해당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일반인들은 노래를 즐기면(배설)그만이지만

노래 부르기를 업으로 삼는 가수들에게는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을 발휘해야만 하는 숙제가 주어져 있다. 자, 당신은 그 어디에 속하는 사람인가? 오규원의 시 「용산에서」는 글쓰기의 과제 앞에 선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생을 어떻게 증언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왜 시가 어려워야 하느냐고? 왜 문학 공부에 매달릴수록 미로 속에 빠져드는 느낌에 곤혹스러워해야 하느냐고? 이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내놓기가 어렵지만, 한 두 가지 추론을 제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첫 째 문학에 필요한 언어의 쓰임새에 대한 이해의 부족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대체로 여섯 가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 중 한 사람인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은(1896∼1982) 이 여섯 가지 요소 중 어느 요소가 강조되느냐에 따라 언어의 기능이 여섯 가지로 분화된다고 보았다.

 

 

                 대상 ④

                    l

발신자 ① - 전언 ③(message)- 수신자 ②

                    l

               경로 ⑤ / 언어 ⑥

 

 

  ① 정보적 기능 : 대상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

② 표출적 기능 : 발신자의 감정상태를 나타내는 언어기능

③ 명령적 기능 : 발신자가 수신자에게 어떤 행위를 하도록 요구하는 것

④ 친교적 기능 : 친밀감을 표시하는 언어기능

⑤ 관어적 기능 : 약어적 기능(의학, 법률 용어등)

⑥ 미학적 기능 : (시적 언어)

 

야콥슨은 ⑥ 미학적 기능이 시적 언어에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시적 전언 ③(message)은 시의 내용(기의 記意)가 아니라 기표 記標 그 자체라고 하는 것은 흔히 우리가 받아들이는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구성되어 있는 단어나 문장이 독립적으로 감각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한다면 우리가 ‘나무’라고 발성할 때(기표) 수신자에게는 다양한 기의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창작자는 ‘나무’를 의지의 상징으로 사용했는데 독자는 ‘나무’라는 기표를 통해 떠나온 고향이 봄날을 상기할 수도 이다. 이른바 의도의 오류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와 같은 기표와 기의의 미끄러짐을 창작자는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론 이와 같은 야콥슨의 이론이 전적으로 타당하다거나 창작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학의 기본적인 속성은 일상적 언어 용법을 넘어서서 언어의 새로운 질감과 의미의 확장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자 하는데 있다고 본다면 이해가 더욱 쉬어질 것이다.

 

이번 정차할 역은 / 이별 이별역입니다/내리실 분은 / 잊으신 미련이 없는지 /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내리십시오/ 계속해서 /사랑역으로 가실 분도/ 이번 역에서

기다림행 열차로 갈아타십시오/추억행 열차는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 /당분간 운행하지 않습니다.

- 시 「이별역」 전문

 

위의 시는 일반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바 있으나 정통적인 시로 평가받지는 못하고 있다. 이 시에 대하여 전해수는 「문제는 다시 ‘대중’이다- 베스트셀러 시집과 시의 대중화」(계간 다층 2006년 여름호)에서 이렇게 논평하고 있다.

 

위 시는 사랑과 이별의 속성을 열차의 운행에 비유하여 제시하고 있는데 그 주제가 새롭지도 않거니와 주제에 대한 시인의 해석이 개성적이지도 못하고 평이한 진술문장과 익숙한 열차의 방송멘트를 변형하여 사용하는데 그치고 있다. 구사된 시어도 이별, 미련, 기다림, 추억 등 소녀적인 취향의 감상적 사랑을 유도하는 것들이고 주제 역시 사랑노래에 집중되어 있다. 일정 독자층에 편승되어 기형적인 문학형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베스트셀러 시집의 큰 단점일 것이다.

 

필연성이 결여된 상상력에 기대는 시를 난삽하게 만들고 감상의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필연성은 논리가 갖추어짐을 말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상상이 아니라 공상 또는 망상으로 주저앉아 버리고 만다. 많은 독자들은 단번에 감각으로 받아들여지는 작품을 선호한다. ‘좋은 시는 쉬운 시이다.’라고 하는 명제는 창작활동에 매진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이루어야 할 숙제와도 같다. 그러나 ‘쉬운 시’는 단박에 읽히고 해독되는 시를 일컫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쉬운 시는 어떤 것일까? 필자는 「쉬운 시의 어려움」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시는 일반적인 진술과는 달리 언어에 옷을 입히는 행위입니다. 시인이 겪어낸 삶에서 우러나는 시의 향기는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쉬운 시'는 그러므로 삶을 벼려내는 시인의 정신이 현실과 부딪치면서 일으키는 섬광과도 같은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한 편의 시에는 고스란히 시인이 가지고 있는 삶의 태도가 담겨져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외면상으로 평이한 구조와 평범한 진술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면서 시가 함의하는 의미의 내포가 큰 시야말로 진정한 '쉬운 시'의 반열에 오른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이와 같이 볼 때 「이별 역」은 쉬운 시가 아니라 말초적 감각에 의존하는 말장난에 가깝다.

둘 째 창작물을 감상하는 독자나 청자의 미적 감수 능력의 문제

 

한 작품 안에서 화자와 청자 관계의 설정이나 창작자와 독자와의 거리감은 작품의 질을 결정하는 관건이 된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 화자는 이별을 당하는 여성이며 청자는 이별을 고하며 떠나는 남성이다. 통렬한 이별의 슬픔을 여성적 화자로 채택하므로서 어조 또한 이에 상응하게 된다. 이 시는 이별의 슬픔을 가진 독자들 - 말하자면 이별을 경험한 누구에게나 - 이별을 정화시킬 수 있는 간접체험의 정서를 나눠줄 수 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 바로 청자와 독자를 어느 수준에 놓을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앞서 이야기한 문학의 어려움은 창작에 임하는 사람, 그 창작물을 감상하는 독자들의 능력(지적 능력)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대중문학과 고급문학을 가르는 또 다른 문제를 파생시킨다. 일관되고도 지속적인 문학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일반 독자(대중)들이 토로하는 문학의 어려움에 즉시적으로 동의하고 호응하는 태도도 난제일 수 있다. 그렇다면 막연한 독자의 수준 설정을 어떻게 기획하여야 할까? 「시의 대중성과 통속성」(계간 『다층』 2006년 여름호)에서 권경아가 김창식의 『대중문학을 넘어서』(청동거울 2000)을 인용하여 제시한 ‘평균인’의 개념을 도입할 것을 권유한다. ‘평균인’은 보통사람, 즉 문자해독 능력이나 작품감상 능력, 문화적 체험, 사회적. 경제적 지위, 학력 등 모든 부면에 걸쳐 남들보다 결코 뛰어나지도 않는 평균적인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고 향유할 독자의 수준을 가늠해 놓는 것은 창작활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시 뿐만 아니라 문학 전반에서의 생략과 압축의 기술은 창작자가 독자의 수준을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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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창작 행위는 자기치유이며 자족自足의 경지를 향한다.

 

오늘날의 삶은 시시각각 변화함에 따르는 대응에 지친 나머지 불안과 체념에 휩싸여 있다. 거기에다가 인간을 황페화시키는 물질과 경쟁의 소용돌이는 원칙과 신념을 무력화시키는 자아의 해체를 압박한다. 그런 까닭에 그 어느 때보다도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과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글쓰기는 이와 같은 난관에 맞서 끊임없이 자아를 연마하고 내적 성찰을 추구하므로서 궁극적으로는 자족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한 마디로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세계관을 정립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인생을 주제로 한 몇 편의 시를 통해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창작의 방향을 가늠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삶에 대해 일관된 관점을 견지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자연에 대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상호 호혜의 마음가짐을 가질 수만 있다면 정신적 풍요와 만족감은 이를 데가 없을 것이다. 오규원의 시 「용산에서」에 표명된 바와 같이 시는 우리에게 삶에 필요한 유용한 정보나 깨달음을 주지 않는다. 정보의 획득이나 지혜를 얻으려면 차라리 논어나 장자, 아니면 불경이나 성경을 읽는 것이 나을 것이다. 시는 그런 것을 떠나 어떤 정서의 환기에 기능한다. 기계처럼 주어진 매뉴얼에 반응하는 우리의 감각과 인식에 따끔한 자극으로 경이를 선사하는 것이 이즈음의 문학의 위의이다 .

 

 

ⓛ 인생 / 유자효늦가을 청량리할머니 둘버스를 기다리며 속삭인다“꼭 신설동에서 청량리 온 것만 하지?”

 

②인생 / 나호열

 

밥술이라도 뜨려고 할머니는

어스름 저녁 집을 나선다

전봇대, 담벼락에 남이 볼까

불온한 전단 한 장씩 붙이는 일

아침이면 일찍 동회에 나가

일거리를 배정받는다

불법 광고물을 떼내는 일

전봇대, 담벼락에 붙은 전단이

시치미를 떼고 있다

 

③묵화 / 김종삼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④지친 장례 / 이승욱

 

노래마다 사람이 있네

그 사람 그 노래 부를 때 오래 울었네

돌아서 술 한 잔, 그 다음 죽었네

 

못된 그 여자 바득바득 악쓸 때 천국이 보였네

우리가 못 가본 천국, 아무래도 못 닿을 천국

그녀만 가지고 혼자 염문 뿌리다 갔네

그녀 애달픈 사랑 이승엔 없었네

 

그 밖에도 한량없는 사연들,

나 이 죽은 추억들 묻지 못하고 들고 다니네

어디 좋은 자리 없나? 좋은 자리 없나?

내 일생이 그만 길게 늘어진 장례행렬 같다네

 

하관을 하고 땅 속으로 꺼진 사람도

어느 날은 엉금엉금 땅 위로 기어 나왔다네

제발 네 손에 잠들게 해다오

야야 네 손에 편히 잠들고 싶다

망자들의 부활이 나를 또 울린다네

 

무거워라 내 일생, 그들을 옮기는 지친 장례행렬

번쩍이는 비석도 없이, 새겨둘 유문도 없이

내 속에 묻힌 사람들 너무 많다네

 

⑤노을 /최영철

 

한 열흘 대장장이가 두드려 만든

초승달 칼날이

만사 다 빗장 지르고 터벅터벅 돌아가는

내 가슴살을 스윽 벤다

누구든 함부로 기울면 이렇게 된다고

피 닦은 수건을 우리 집 뒷산에 걸었다

 

⑥인생 / 이기철

 

인생이란 사람이 살았다는 말

눈맞은 돌멩이처럼 오래 견뎠다는 말

견디며 숟가락으로 시간을 되질했다는 말

되질한 시간이 가랑잎으로 쌓였다는 말

연애도 했다는 말

여자를 안고 집을 이루고

자식을 얻었다는 말

그러나 마지막엔 혼자라는 말

그레서 산노루처럼 쓸쓸하다는 말

 

⑦인생 / 최영미

 

달리는 열차에 앉아 창 밖을 더듬노라면가까운 나무들은 휙휙 형체도 없이 도망가고 

먼 산만 오롯이 풍경으로 잡힌다해바른 창가에 기대앉으면겨울을 물리친 강둑에 아물아물아지랑이 피어오르고시간은 레일 위에 미끄러져한 쌍의 팽팽한 선일 뿐인데인생길도 그런 것인가더듬으면 달음치고돌아서면 잡히는흔들리는 유리창 머리 묻고 생각해본다바퀴소리 덜컹덜컹총알처럼 가슴에 박히는데그 속에내가 있고 네가 있고아직도 못다 한 우리의 시름이 있는가까웠다 멀어지는 바깥세상은졸리운 눈 속으로 얼키설키 감겨오는데전선 위에 무심히 내려앉은저걸하늘이라고 그러던가 

 

  ① 유자효의 「인생」 ②나호열의 「인생」③김종삼의 「묵화」는 인생에 대한 어떤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삽화 같은 풍경 하나를 제시할 뿐이다. 그렇지만 그 풍경들은 한결같이 어떤 우수 憂愁를 풍기고 있다. “꼭 신설동에서 청량리 온 것만 하지?”라고 나누는 대화를 통해 전해지는 메시지는 꼭 세월이 빨리 흘러갔다는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노년에 들어서도 생계를 위해 밤이면 불온 전단지를 붙이고 낮이면 그것을 다시 떼어내는 모순과 하루 종일 함께 일한 소 목덜미에 손을 얹는 할머니들은 각기 다른 존재이면서도 세월에 삭아가는 비애를 공유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⑥인생 (이기철)은 ‘~ 이다’ 의 단호한 어조를 통해 인생의 비애를 조소하듯 그리고 있다. ④지친 장례 (이승욱)과 ⑦인생 (최영미)은 장례나 여행의 경험(기차)에 자아를 투입하여 즐거운 전망이 보이지 않는 젊은이들이 느끼는 삶의 단면을 파헤치고 있다. 내 기억 속에 들락거리던 사람들의 죽음(무거워라 내 일생, 그들을 옮기는 지친 장례행렬)이나 낭만과 경외에서 패퇴하여 (전선 위에 무심히 내려앉은/ 저걸 /하늘이라고 그러던가) 물질화 되어버린 하늘을 우러를 대상을 잃어버린 삶을 비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⑤노을 (최영철)은 자연현상인 노을과 초승달을 각각 피와 낫으로 대비하면서 삶을 (만사 다 빗장 지르고 ...함부로 기울면 안된다)굳은 의지로 버텨내야만 한다는 광물적 이미지로 재현하고 있다. 7 편의 시는 어떤 사건의 발생부터 결과에 이르는 인과론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부분을 통하여 전체를 상기시키는 효과에 치중하고 있다. ‘인생은 허무하다’라는 명제는 상식에 다름 아니다. 앞서서 시가 정서의 환기이지 깨달음이나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바 있거니와 동일한 명제를 다른 언어의 장치나 배열, 운용에 따라 각기 다른 정서로 드러내는 것이 시의 효용임을 일곱 편의 시를 통해서 자각할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일 것이다. 여기에 한 마디 덧말을 붙인다면 일 곱 편의 시의 내면에는 비장미 悲壯美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글쓰기는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며, 불신과 갈등으로 얼룩진 인성 人性을 회복하는데 바쳐져야 한다. 우리의 망막에 눈물을 걸치지 않으면 세상은 허상으로 가득차 버린다. 살아있음에 대한 경의와 슬픔을 견뎌내는 혹독한 시련 후에 피어나는 것이

비장미라고 하는 꽃이며 열매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이 글은 동두천 여성문학회 【소요문학회】의 창작활동의 활성화를 위해 기고한 것이며,『소요문학 』(2012)에 게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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