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창작 강의

시는 어디에 있는가 / 이수명

by 丹野 2012. 11. 28.

 

 

 

시는 어디에 있는가 / 이수명

 

 

 

 1. 시는 혼자 있다

     시는 혼자 있다. 시는 언제나, 무엇과도 함께 하지 않는다. 내가 시를 쓰거나 읽을 때, 더욱이 시에 대해서 말할 때, 시는 자신의 출현을 채우기보다는 이를 구경하는 것 같다. 자신이 어떻게 쓰여지고 읽히는지, 규정되는지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시는 자신의 운명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인다. 운명을 거부조차 하지 않음으로써 운명에서 멀어지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요컨대 시는 무엇과도, 자신에게조차도 관련되지 않으며, 그러므로 최후까지 스스로에게 도달하지 않는 것으로 내게는 생각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다. 시는 혼자 있다.

 

     그렇다면 혼자서,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시는 사실상 매순간 모든 작품에 소환되어 나타나는데, 내가 쓰고 있는 시들, 쓰다가 버린 시들, 삭제되었다가 다시 튀어 오르는 시들에 항상 불려 나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작품들에 있지 않다면 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작품이라는 존재를 부정하고 존재할 수 있을까. 존재의 추인을 받지 않은 채 어느 곳엔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 존재하지 않음에서 존재를 유인해 낼 수 있기나 한 것일까.

 

     나는 이러한 생각들이 어떤 실재에 대해서 가정해 보는, 또 다른 관념으로 흐르지 않기를 바란다. 시의 실재라는 것은 시에게는 성립될 수 없는 추상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보다 실제적인 것이다. 스스로와도 같이 하지 않는, 시늬 혼자 있음, 그것은 시가 존재할 수 있는 불가능한 가능의 방식이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노련한 첨병으로서의 자세이다. 그것은 존재의 유보도 아니고, 존재의 추상도 아니다. 시는 언제나 매 편의 시에서 출현한다. 그러나 자신의 출현과 동시에 자유로워진다. 출현으로부터,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나가는 이러한 시의 방식은 내가 시를 홀로 있음으로 느끼는 근거가 된다. 시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자신의 존재마저 아랑곳 않는다. 그것은 존재와 동시에 비존재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 비존재야말로 시의 유일한 존재 방식일 것이다. 시는 존재에 머물지 않는다. 확정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가 어디에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지금 한 편의 시가 쓰여졌다고 해서 시가 반드시 여기에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이 시의 유의미한 근거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시는 자신의 근원을 충족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시는 홀로 있음은, 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음을 가리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시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은 처음부터 난처한 질문이었음에 틀림없다. 시는 시로 구성된 듯한 무엇이면서 동시에 구성되지 않은 듯한 무엇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마도 ~듯하다일 것이다. 구성된 듯하다는 것은 시의 비구성을, 그리고 구성되지 않은 듯하다는 것은 시의 구성을 역설적으로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구성된 듯한 비구성과, 구성되지 않은 듯한 구성이라는 양가적인 특성을 동시에 성립시키고 있는 것이 시라면, 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다소의 해명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이러한 대립이 대립으로 머물지 않고 언제나 가역적으로 되는 시의 세계를 두고 부질없이, 시가 어디에 있는지 물음을 던진 것이 아닐까. 사실상 시가 이 양가성 속에서 무엇을 하려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시의 생산성이라는 것은 이 중 어느 쪽인가에 속해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 있지 않고 이로부터 자유로운 것에 있다고 할 수 있을 따름이다. 말이 스스로 목적이 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말이 풀려 버리는 것, 시는 말을 실현시키면서 말을 회수한다.

 

2. 바깥에

     시가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자리에서 블랑쇼의 인식은 내게 아주 흥미로운 것이다. 블랑쇼는 니체가 한 말, <우리는 진리에 의해 침몰당하지 않기 위해 예술을 가지고 있다>에서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켜 나간다. 블랑쇼가 보기에 이 말은 예술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자신이 전개해 나갈 통찰의 중요한 시발점이다. 그는 곧 니체에 힘입어 <예술가는 진리에 속해 있지 않다. 왜냐하면 작품은 그 자체로 진리라는 것의 움직임을 벗어나고, 어떤 측면에서 작품은 언제나 진리하는 것을 철회하고 의미를 벗어나기 때문이다.>(『문학의 공간』,347쪽)라고 선언한다.

 

     니체와 블랑쇼에게서 공히 나타나는 예술에 대한 이와 같은 태도는 우선, 예술이 비록 철학의 방식으로는 아니더라도 그 근원에 있어서 진리에 관여하고 있다는 식의 전통적으로 통용되었던 예술의 면죄부, 혹은 특권화를 스스로 벗어버린 것이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예술이란 그 자체의 방식으로 진리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라는 통념을 깨고 예술은 진리와 무관하거나 대립적인 것이라는 인식을 들여오게 된 것이다. 이로써 예술이 개연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형이상학에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미학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데, 그것은 예술의 비진리성이라는 테제가 그동안 예술이 형성해 왔던 철학과의 모호한 연대에 대한 날카로운 이반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예술은 진리에 복무하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ㅇ오히려 진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쪽이었는데, 이 의심스러운 예술의 정체가 또렷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블랑쇼가 니체에게서 발전시켜 나간 부분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니체는 <진리에 의해 침몰당하지 않기 위해 예술을 가지고 있다>고 했고, 블랑쇼는 (예술 작품은)<진리라는 것의 움직임을 벗어나고>있다고 표현한다. 미묘한 차이에 주목했을 때 니체에게서의 블랑쇼의 전진은 의미가 있는데, 왜냐하면, 니체의 전언에서는 예술이 진리의 전면화에 대한 (방어적) 예외성으로 설정되었던 것이 블랑쇼에 와서 진리를 <벗어나>는 영역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는 그 영역을 <영원한 바깥인 장소>,<외부의 암흑> 등등으로 일컫는데, 바로 이 <바깥>, <외부>라는 명명들로 인해 진리의 반대편에 비진리라는 예술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계기가 블랑쇼에게서 가능해진 것이다. 요컨대 니체에게서의 예술이 진리의 영역에서의 진리의 무력화라고 한다면, 블랑쇼에세서의 그것은 진리 밖의 영역에서의 진리와의 길항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술의 자리이다. 예술은 진리가 아우르지 않는, 그 너머의 어떤 영역인 것이다.

 

     블랑쇼는 <바깥>의 사유자이다. 그의 특유의 <바깥>의 사유는 예술뿐 아니라 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시를 기본적으로 추방이라 생각한다. 추방이라는 것은 경계 밖으로 던져지는 것이다. 시인은 안에 머물지 않으며 밖으로 추방된 자이다. 그는 자신의 바깥에, 고향 바깥에, 이방인에 속하는 존재이며, 시가 시인을 떠도는 자, 길 잃은 자, 현전과 거주를 빼앗긴 자로 만든다. 블랑쇼가 생각하는 추방은 예술의 비진리성과 관련이 깊다. 이 세계에서 추방되었다는 것은 치명적인 진리가 지배하는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의 바깥에 즉 비진리에, 시가 있고 시인이 있다. 블랑쇼는 이 비진리의 자리를 다시 여러 가지로 표현한다. 진리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바닥, 붕괴, 근거의 부재, 순수한 공허, 등등이 그가 생각하는 추방의 자리이다. 어느 것이 되었든 그는 진리가 작동되지 않는 위험과 혼돈의 장소에 시가 있고 시인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시에 대한 블랑쇼의 생각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예술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가 바깥의 사유를 통해 시의 자리를 드러낸 점이다. 시가 진리의 경계 밖에 있다는 것, 그로 인해 적어도 시의 어느 부분, 분명히 중요해 보이는 어느 부분이 이제 노출되었을 것이다. 시는 진리가 아니며, 우리를 지혜롭게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시를 통해 빛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갈 수도 없다. 그것이 비진리의 자리일 것이다.

 

     하지만 비진리라는 자리를 가리켜 보인다고 해서 그 자리의 윤곽선일망정 뚜렷하게 그어지는 것은 아니다. 바깥이란 무엇인가. 진리가 지배하는 안과 모든 것이 다를 텐데. 그렇다면 그곳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안의 세계처럼 과연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어려움은 다시 시작되는 것 같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곳에서는 궁극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행위는 사건이 되지 못하고, 사건 역시 행위가 되지 못한다. 발생한 것은 시작하지 않고 발생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발생해도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이 흐르고 있는 세계, 블랑쇼에 의하면 시는 이러한 세계에 있는 것이다.

 

3. 다시

     시와 예술에 대한 블랑쇼의 생각은 분명, 시가 가지고 있는 가장 유니크한 특성을 첨예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가 막연히 진리의 편에 서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실상 비능률적인 처리일 수 있다. 시가 진리에 일조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예상하기 쉽지 않은 복잡한 과정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보다는 시의 <암흑>,<혼돈>,<위험>,<공포> 등등을 진리의 반대편에 설정시켜 봄으로써 블랑쇼는 결과적으로 시의 뇌관을 드러내 보이게 된 것이다.

 

     현대의 미학에 많은 영감을 준 블랑쇼의 사유와 핵심적인 것을 공유하면서도 나는 여기서 한 번의 우회를 해야 할 것 같다. 예술이 진리를 벗어나고 비진리에 속하는 것이라면, 예술은 과연 거짓인가? 하는 동어반복적인 질문을 다시 던져 보는 것이다. 여기서 난점은 다시 나타날 것 같다. 픽션을 거짓으로 설정하는 것이 단순한 일만은 아닌 것이다. 비록 블랑쇼의 텍스트가 진리와 비진리의 내포와 외연에 대한 다중적인 모순을 생략하지 않으면서, 양자의 대립에 대한 부득이한 설정 위에 예술을 비진리에 연관시키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진리를 불편하게 하고 진리를 싫어한다고 해도, 예술을 효과적으로 비진리나 거짓으로 위치짓는 것은 또 다른 함정으로 기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비진리라는 자리의 설정은 진리의 설정만큼이나 예술을 확정짓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것 역시 예술을 가두는 것일 수 있다.

 

     내가 돌아가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시이다. 시는 어디에 있는가 하고 질문을 던졌을 때, 많은 부분을 블랑쇼에 공감하면서도 나에게 남아 있는 문제는 시는 사실상, 진리인지 비진리인지로 그 자리를 영역화시키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서 내게 중요한 것은 이 어려움을 해소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나는 이 전제를 극복하는 것이 극복이 아니라 투항같이 여겨진다. 오히려 시가 진리라기보다는 진리인 듯이 보이는, 또 항상 비진리라기보다는 비진리인 듯이 보이는, 이 한 발짝의 거리, 이탈에서 나는 시라는 것을 느낀다. 시는 항상 무언가로 귀속되기보다는 거기서 떨어져 나간다. 그것은 시가 이 세계가 제시하는 정합적인 구획 속에 놓이지 않는 탓이겠지만, 그보다는 어느 한 편으로의 편입과 완성 속으로 소멸되지 않는 시의 혼자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시는 결정되기 전에 떠난다. 시는 부유한다. 한 발짝의 이탈로 진리와 비진리에 동시에 어른거리면서, 양자를 동시에 편들고, 경계를 움직이게 한다. 이것이 아마 시의 위의일 것이다. 시는 진리의 얼굴을 하고 있는 비진리이거나, 역으로 비진리의 얼굴을 하고 있는 진리로 나타날 것이다. 시가 의미가 있는 것은 이 이중성이다. 불가피한 위장이다. 다만 위장한 것을 모르고 있는 위장일 것이다.

 

     내게 시는 이 모순을 유지하고 있을 때의 시이다. 모순을 제거하고 어느 한 쪽으로 정처하고 있는 시를, 그러한 시에 대한 생각들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순을 생명으로 삼으면서 어느 순간, 시가 진리인듯 느껴지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마찬가지로 시가 거짓인 듯이 느껴지는 것 또한 얼마나 빛나는 일인가. 진리를 무력화시킬 수 있을 때, 비진리 역시 힘을 잃을 수 있어야 한다. 이 회로의 어디에 시가 있는지 면밀히 따져 보기 이전에 회로를 닫아 버리지 않으려는 천진함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므로 시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착상은 안개를 걷어 내려는 방식으로 진행되기보다 다른 방식의 전환이 요구되는 것이다. 문제는 안개를 해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안개를 이동시켜 보는 것에 있을 수 있다.

 

 4. 표면의 탈환

     시가 비진리, 추방된 곳에 있다는 설정이 주는 강력한 효과에도 불구하고 정말 그러한가, 하고 재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 것은 이러한 영역이나 경계의 설정이 다소 철학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라는 느낌 때문이다. 예술, 시를 이야기할 때 철학의 잣대를 가져와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날 필요도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솔직히 말하면 예술과 시가 진리인지, 비진리인지에 별로 관심이 없다.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로부터 도피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리의 자리에서 진리를 중심으로 시를 치우치게 생각한 결과일 수도 있다.

 

     나는 여기서 블랑쇼의 <바깥>의 통찰을 보다 문학적으로 이동해 보려한다. <바깥>을 진리 밖의 비진리에 연관시키기보다는, <표면>이라는 항으로 수평 이동시키는 것이다. 블랑쇼가 바깥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추방, 무의미, 불확실, 혼돈과 같은 것들이다. 그는 이와 같은 <진리가 아닌 것에 본래성의 한 본질적 형태를 관련시키려 한다>(앞의 책, 349쪽)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들을 비진리의 자리에 수직적으로 배치하는 것은 그가 원하지 않는 판단과 가치를 개입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판단은 예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인 것에 속할 것이다.

 

     나는 블랑쇼가 말하고 싶었던 것을 문학적으로 전횡하여 <표면>으로 표현해 보고 싶다. 표면은 바깥으로 함의했던 혼돈과 불확실을 그대로 보유하면서도 바깥보다 <추방>의 의미가 약해진 것이다. 추방된 곳이라기보다 표면은 일차적인, 우선적인 거류지이다. 따라서 바깥보다 더 전면적이고 광범위하게 편재해 있다. 우리는 표면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거느리는 것, 거느리지 못하는 것, 그러한 것들이 모두 뒤섞여 있는 곳이 표면이다. 표면은 짧거나 길게 부유하는 것들, 부유하는 것에 기생하는 것들, 한편으로 용이하게 걸러져 버리는 것들이 떠다닌다. 아니, 걸러지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표면은 전부다. 그리고 모두가 속해 있는 이러한 표면은 의미 이전의, 존재의 세계이다.

 

     표면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세계의 전모이다. 이것이 세계이다. 감추어진 것은 사실상 없다. 하지만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감추어진 어떤 것을 찾는 것이 우리의 관념이다. 물론 찾는 것은 감추는 것을 전제로 하므로, 우리는 사실상 찾는 것이 아니라 감추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면은 하나의 덧붙여진 체계이다. 인간에게 지속되어 온 이 질서는 우리를 강박하는 기제라고 할 수 있다. 이면이야말로 진리가 깃드는 곳이 아닌가. 진리는 아마도 이면을 담보로 한 인간의 상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면의 자리, 인식의 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상상은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리라 드러나 있는 것을 감추는 역할을 해온 것이다.

 

     나는 왜 예술이, 문학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라는 오랜 오해 속에서 움직여 왔을까 문득 생각해본다. 표면을 보지 않으려 하면서 이면을 제조하고, 상징으로 무거워지는 것을 문학의 독창성으로 여겼을까 궁금해지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가 만들어 낸 것에 스스로 묶이면서 자유를 반납하는 것, 이러한 경향과 시는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와 정반대로 눈앞에 있는 것, 드러난 것을 드러나게 하는 것, 이 강력한 직접성이 바로 시이고 예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무거운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꾸 이면으로 정향되어 추방과 추방의 깊이를, 관념과 인생의 심연을 가리키는 시에 끌리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 한순간 시적인 것으로 통용될 수는 있지만, 시는 시적인 것에 갇히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시는 표면을 찾아 움직인다. 지속적으로 시적인 것으로부터 도피하면서 표면으로 올라가 그 무심한 격랑과 무차별 속에 떠다닌다. 그물이 잔뜩 드리워져 있는 이면에서 벗어나 일시적이고 번뜩이는 표면을 탈환하는 것, 표면으로의 탈출, 이것이 시의 생명이다. 표면은 눈이 없다. 아무것도 구별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광대한 표면이 무엇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표면은 알 수 없는 영원한 사물의 세계인 것이며, 여기서는 인간도 사물인 것이다. 사물은 진리를 모른다. 사물은 원래 의미가 없다. 하지만 진정 공포스러운 것은 의미이지 무의미가 아닐 것이다.

―― [현대시학](2012.3월호)

 

 

 

출처 / 세상과 세상 사이

 

 

 

 

 

3547

'나호열 시인 > 詩 창작 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작의 의의와 실제 / 나호열  (0) 2012.11.28
양생(養生)의 시학 / 공광규  (0) 2012.11.28
정치의 계절에 시를 논하다  (0) 2012.11.28
[스크랩] 산을 오르는 이유  (0) 2012.11.28
절해고도  (0) 2012.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