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11.24 03:05 | 수정 : 2012.11.25 09:37
詩도 정치도 쉬워야죠… 詩 읽는 대통령 어때요?
"이웃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그게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울지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누구나 정치를 이야기하는 시절에 정호승을 만난 건 축복이었다. 마침 영하의 겨울이었고, 마침 그의 등단 40년이었다. 시업(詩業)으로 반평생을 뚜벅뚜벅 걸어온 그를 만난 날, 서울광장엔 초대형 성탄 트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트리에 별 대신 십자가를 다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을 거라고 투덜대자, 시인이 빙그레 웃었다.
'정호승은 천생 시인'이라던 신경림의 말이 떠올랐다. 미련하리만큼 별을 사랑하고, 슬픔을 사랑하고, 외로움을 사랑한 탓일까. 예순두 살 반백의 시인에게서 열다섯 살 소년의 미소를 보자 가슴이 뜨끔했다. 사진촬영을 위해 표를 끊고 들어간 덕수궁에서 시인이 말했다. "왜 이곳의 단풍은 이토록 추운 날까지 지지 않고 선연할까요."
정동교회로 이어진 돌담길. 밀레와 고흐, 장욱진을 흉내 낸 삼류화가의 그림들을 골똘히 바라보던 시인에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다. 외로움을 견디는 법에 대해 묻고 싶었다.
- 나무들의 결혼식에 초대받아 낭랑하게 축시 한번 낭송해보고 싶다’는 시인 정호승이 모처럼 덕수궁 뒤뜰에서 만추(晩秋)를 즐겼다. 그는“시인이 시 한 편을 남기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의 대표작들은 시선집‘내가 사랑하는 사람’(열림원)에서 만날 수 있다. / 이덕훈 기자
―등단 40년입니다.
"시(詩)에게 버림받지 않았고, 나 또한 시를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감사할 뿐이지요."
―기념하여 축하하는 자리는 없습니까.
"혼자서, 마음으로 했어요. 내가 제대로 밥값을 하고 살아왔는가, 시 쓰는 사람으로 부끄럽게 살지 않았는가 돌아보면서."
―김용택, 도종환, 안도현 등과 함께 당대 가장 폭넓은 사랑을 받는 시인이자, 누구보다 치열하게 시작(詩作)하는 시인으로 유명합니다.
"중학교 2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 시를 한 편씩 써오라는 숙제를 냈어요. 그때 시라는 걸 처음 써봤지요. 김영랑의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를 배울 때였을 거예요. 하필 저를 지목해 숙제로 써온 시를 읽어보라고 하십니다. 운명의 순간이었죠. 시를 낭송했더니 까까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면서 '호승이 너는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시인이 되겠다' 하셨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 말씀에 굉장히 중요한 '단서'가 있었어요. '열심히 노력하면'이라는. 모든 일이 그렇지만, 시 쓰는 일 또한 노력하는 일이었지요. 이게 시로 써질까, 안 써질까 걱정만 하면 시를 쓸 수 없어요. 되든 안 되든 쓰고 보는 거지요. 많은 시인이 '시가 나를 찾아왔다'고 말하는데, 나는 항상 내가 시를 찾아갔던 것 같아요. 찾아가니 피하지는 않더라고요. 시가 도망가진 않더라고요."
―40년 동안 시집 10권을 내셨습니다. 얼마나 팔립니까.
"육체의 밥으로는 조금이지만, 영혼의 밥으로는 배가 부를 정도는 되었어요(웃음)."
―우문입니다만, 자신의 시 중 어떤 시를 가장 좋아합니까.
"가슴에 늘 품고 다니는 시가 '산산조각'이에요. '산산조각이 나면/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산산조각이 나면/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룸비니에서 흙으로 만든 부처님을 사왔는데, 그것이 방바닥에 떨어져 부서지면 어쩌나, 내 인생이 그렇게 산산조각 나면 어떡하나 두려움을 안고 쓴 시예요. 누구나 인생이 한 번씩은 산산조각 나지 않습니까. 산산조각 난 자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건 굉장히 중요한 문젠데, 그때 산산조각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서요. 내가 써놓고 내가 위로를 받는 시지요. 50세 되던 해에 쓴 것 같아요."
- 지난해 11월 서울 교보생명‘광화문 글판’에 올라 널리 사랑받은 정호승의 시‘고래를 위하여.
"친구 하나가 외롭다며 힘들어했어요. 아내와 자식, 친구들이 있어도 외롭다는 거예요. 외로우니까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혼한다고 해서 외로움이 사라지지 않지요. 사랑하면 새로운 외로움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외로움은 극복하는 게 아니라 견디는 거예요."
―왜 수선화입니까.
"수선화의 꽃대가 참 연약해요. 인간의 연약한 모습과 같지요. 그 꽃대 위에 핀 연노란 꽃잎을 보니, 외로움에 빛깔이 있다면 저런 빛깔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신경림 시인이, 정호승을 만나본 사람이라면 '시는 곧 그 사람'이라는 격언에 쉽게 동의할 거라고 하셨어요.
"아, 그렇지 않아요. 우리 시대에 시와 삶이 하나였던 분들이 있었지요. 윤동주 시인이 대표적이고 이육사 선생도 계셨고. 저 또한 노력은 했지만 시와 삶이 일체 되지 않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웃음). 과욕이니 바라지 않는 게 낫고요."
- 시인 정호승은 바빴다. 인문학 열풍이 시(詩)에까지 번져 전국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한다. 인터뷰한 21일 아침에도 송도의 포스코건설에서 시 강연을 하고 왔다. 사진은 지난해 9월 서울 강일고등학교에서 진행한 인문학 강의. / 이덕훈 기자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이토록 서로 그리워하느냐/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였기에/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사랑이 가난한 사람들이/등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풀은 시들고 꽃은 지는데//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이토록 서로 별빛마다 빛나느냐….'
―정호승의 시는 어렵지 않아 좋습니다.
"등단으로 따지면 난 70년대 시인이에요. 76년 '반시'라는 동인활동을 시작했는데, 창간호 머리글에 '일상의 쉬운 언어로 삶의 구체성을 노래하자'는 문장이 있어요. 60년대 난해한 시들에 대한 반동이랄까. 쉬운 말로 썼다고 해서 시가 쉬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읽는 사람들에게 시가 처음부터 어렵게 다가가선 안 된다고 믿었어요. 김소월의 시가 어려웠다면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았을까요? 만해의 시에는 심오한 철학이 들어 있지만 처음엔 연애시로 읽히지요.
사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시를 읽는 것도 고통스러우면 안되지요(웃음)."
―이동원이 부른 '이별노래', 안치환이 부른 '우리가 어느 별에서',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에 이르기까지 노래가 된 시가 많습니다.
"대중음악, 가곡, 동요, 합창곡까지 합치면 60곡이 넘을 거예요. 저도 어떤 노래가 있는지 다 모를 만큼."
―일부러 노래로 만들기 좋은 시를 씁니까.
"나는 시인이지 작사가는 아니에요. 그런데 시와 노래는 원래 한 몸이지요. 내가 그 한 몸, 시의 음악성을 잘 드러내는 시인인가 보다, 생각은 해봤어요. 한편으로 이 시대의 화두가 소통인데 시와 음악이 만나듯 우리 사회, 개인들의 삶이 사이좋게 어우러진다면 걱정할 게 없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가수 안치환은 정호승 시를 노래로 만들어 앨범을 낼 만큼 열성팬이더군요.
"안치환씨 친구가 결혼을 하는데 그 선물로 '우리가 어느 별에서'에 곡을 붙여 축가로 불러줬다는군요. 식장에서 그 노랠 부르는데 신랑이 하도 울어서 다들 반대하는 결혼을 하나보다 했대요. 그런데 다른 결혼식에 가서 불렀더니 거기서도 신랑이 울지 않으면 신부가 울더래요. 그래서 축가로는 더이상 부르지 않는답니다(웃음)."
―'안치환, 정호승을 노래하다'는 콘서트도 3년째 하고 계시지요?
"어제(20일)도 김제에서 콘서트가 있었어요.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을 찾아가 펼치는 공연인데, 정말 지치지도 않고 열심히들 하더군요. 시 쓰는 일만 힘든 줄 알았더니 모든 삶이 치열해요. 안치환씨 손에 박인 굳은살을 보았지요."
―정호승의 시에는 별, 가난, 새벽이라는 시어들이 자주 나옵니다. 시가 자칫 상투적으로 읽힐 수 있지 않나요?
"나는 시의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주의예요. 원죄가 없는 아이의 순수함과 같지요. 그래서 시에 욕설이 들어가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럴 거면 소설을 써야죠. 별의 이미지를 좋아하는 건 맞아요. 어둠이 존재해야 별이 빛나고, 어느 땐 별을 존재하게 하는 그 어둠이 더 귀하게 여겨지고요. 내 삶에 어떤 어둠이 있다면 시의 별을 빛나게 하기 위한 어둠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하늘에는 눈이 있다/두려워할 것은 없다/캄캄한 겨울/눈 내린 보리밭 길을 걸어가다가/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별들은 따뜻하다…'
한국인의 애송시 100편에 정호승의 '별들은 따뜻하다'를 올린 문학평론가 정끝별은 정호승의 별을 두고 '눈물과 탄식과 비명이 떨어진 자리에 피어나는 꽃'이라고 해석했다. '어두운 현실에서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시인의 의지가 별을 바라보게 하고, 그래서인지 정호승의 시는 가장 낮은 곳에서 밝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등단작인 '첨성대'(1973년)도 별입니다.
"나이 60이 되었을 때 이쯤이면 아호 하나쯤 가져도 되겠다 싶어 지은 것이 '첨성(瞻星)'이에요. 죽는 날까지 별을 바라보고 살고 싶어서(웃음)."
―4번째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를 경계로 정호승 문학이 양분되었다고 하던데요.
"90년을 전후해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했지요. 어둠 속에서 밝음을 보기 시작한 게 그때였어요. 암울했던 시대에 민중시를 써온 많은 시인이 혼돈을 겪었지요. 이삼십대 나는, 시인은 시대의 눈물을 닦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답니다. 오만이었지요. 내 눈물도 닦을 수 없으면서 어떻게 남의 눈물을 닦아주는가, 내가 닦은 시의 손수건에 누군가가 그의 눈물을 닦는다면 그것이 진실에 다가가는 일이 아닌가, 생각했지요."
―그래도 참여문학 성격이 강한 초창기 시집들, 특히 '서울의 예수'(1979년)를 정호승 시의 정수로 여기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에서 5·18까지 현대사의 격동기였죠. 그 시대에 예수가 서울에 왔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며 쓴 시예요. 군사독재와 유신이 있었던 나의 20대는 비극의 시대였지만, 흙탕물에 뿌리를 내린 수련이 아름다운 꽃을 피워올리듯 시 또한 더럽고 혼탁한 고통이 있는 곳에 뿌리 내려야 한다고 믿게 됐지요. 별이 빛나려면 어둠이 있어야 하고, 햇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고, 내가 있으려면 네가 있어야 하는데, 그 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져야 한다는 것도 그때 알았지요."
―정호승의 시가 민중시, 노동시는 아닙니다.
"시의 본질인 서정(抒情)의 물기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생쌀보다는 서정의 물을 부어 밥을 해서 먹는 게 배부르고 든든하니까."
―시인 김승희는 '정호승적 서정'을 일러 '자본주의적 사창가를 처단하는 참혹한 맑음'이라고 했더군요.
"나도 보지 못한 부분이에요. 그 한마디에 내 시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생각을 했죠. 등단 동기인 그녀가 내 시가 가야 할 길을 일러준 셈이에요."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라'는 시구처럼 기독교적 세계관이 엿보이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녔어요. 기독교적 문화가 내 정서를 지배한 이유지요. 불교도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어요. 운주사 와불 밑에 처마바위가 있어요. 부처님이 다섯 분 계시는데 이지러질 대로 이지러진 얼굴을 보고 제가 충격을 받았어요. 민중의 부처였지요. 황폐한 가슴을 드러내고 손을 탁 벌린 부처님 모습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삶은 이렇게 사는 것이다, 일러주시는 것 같았어요."
―'별들은 따뜻하다'를 발표한 뒤 7년 동안 시를 한 편도 쓰지 않았습니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오랜 열망이 있었어요. 중학시절 박기준의 '순애보'를 밤새워 읽으면서 어른들의 세계를 엿보는 게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몰라요. 대학(경희대)에서도 줄곧 시를 썼지만 소설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해 조선일보 신춘문예(1982년)에 소설로 당선했고요. 마흔한 살에 직장까지 그만두고 7년을 소설에 매달렸으니 참 맹목적이었죠. 경제적으로 톡톡히 어려움을 겪은 뒤 깨달았어요. 나의 문학적 기질은 소설이 아니라 시 쪽에 있다는 걸. 이러다 시가 나를 버리겠구나 싶어 다시 시작 노트를 펼쳤지요."
―7년 만에 나온 시집이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입니다. 제목만 보면 연애시 같습니다.
"사랑이란 단어는 삼류로 읽힐 수 있어 위험하지요. 그럼에도 제목을 그렇게 한 것은 인생의 가장 큰 화두는 역시 사랑이었기 때문이에요. 고통의 뿌리에는 모두 사랑이 있었지요. 당나라 선승 중에 임제선사라는 분이 있어요. 그분이 제자들에게 '공부하다가 죽어버려라' 그래요. 죽을 힘을 다해 공부하라는 뜻이지요. 그 말이 내 가슴을 쳤어요. 우리는 제대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에 연연하고 고통받고 있지 않습니까."
- 1973년‘첨성대’로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을 때 아버지 정창현(오른쪽)과 찍은 사진 / 조선일보DB
◇아버지의 목욕탕
정호승이 목에 두른 자주색 머플러는 연로해 병석에 누운 부친의 것이었다. 사춘기 아들에게 민중서관의 한국문학전집을 선물한 아버지였지만, 사업에 실패해 지독한 가난을 물려준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인에게 아버지는 그 어떤 시로도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군에서 첫 휴가를 나온 이유가 수평치가 된 사랑니를 빼기 위해서였죠. 봉천동 한 치과에서 2시간 동안 대수술을 하는데 아버지가 꼼짝없이 기다리고 계세요. 내가 군인인데, M1 소총도 쏠 줄 아는 군인인데 말이죠(웃음). 수술이 끝나 어금니에 소독거즈를 한껏 문 뒤 병원문을 나서는데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요. 다 큰 아들과 아버지가 말없이 눈 내리는 봉천동 언덕길을 올라가던 그 장면이 아버지 사랑의 극치로 남아 있습니다."
―다정한 아들이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저렇게 누워계시기 전에는 공중목욕탕 가시는 걸 좋아했어요. 일주일에 한 번 아버지를 모시고 갔지요. 그런데 어느 땐 그 시중이 귀찮아요. 나는 바쁜데 아버지의 행동이 느리니까. 어느 날엔 이태리타월로 등을 거칠게 밀지요. 그 못된 심보를 알면서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 안 하셨죠. 이젠 가고 싶어도 못 가요. 자식이 아버지의 사랑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부뚜막에 놓여 있던 어머니의 시작노트 얘기도 인상적입니다.
"아버지 사업이 실패해 우리 살던 집은 세를 주고 그 옆에 문간방 하나, 부엌 하나 달아 온 식구가 살 때예요. 나는 고등학교 문예반에서 활동할 때인데, 어느 날 부엌에서 어머니의 시 노트를 보게 된 거죠. 가계부 같은 공책에 연필로 소월류의 시를 써놓으셨는데, 아, 어머니의 가슴속에도 시심(詩心)이 있구나, 처음 알았습니다."
―대구 계성중, 대륜고 시절 전국을 휩쓸던 문사였다고 하더군요. 틈만 나면 대구역 노천대합실에서 앉아 사람구경 하셨다지요?
"기차 타는 걸 지금도 좋아해요. 최근에 쓴 시 중에 '나의 기차'라고 있어요. '종착역도 없이 종착역에 도착했다'는 구절이 있지요. 인생이 그런 것 아닐까요?"
―군복무 시절 시인 김현승 선생에게 습작시를 보냈더군요.
"일등병 휴가 때 숭실대 연구실로 찾아갔지요. 선생님이 끓여주셨던 진한 커피향을 잊지 못해요. 생전 처음 보는 청년이 군복을 입고 찾아왔는데도 다정하게 맞아주셨죠. 고독은 신의 영역도, 인간의 영역도 아닌 제3의 영역이라던 말씀이 화두로 남아 있습니다."
―'가난은 눈물이 아니라 힘'이라고 하셨지요. '나는 타이탄 트럭에 짐짝처럼 실려 도시 한복판을 달려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고 싶지 않다'고도 쓰셨고요.
"우리 땐 6개월마다 이사를 다녔어요. 계약기간이 그랬어요. 이사를 서른 번 넘게 다녔을 거예요. 짐칸에 얹혀 미로 같은 도시를 달리면서 세상의 속살을 보았지요. 어느 시인이든 자기의 삶이 시의 자양분이고 밑거름입니다."
―젊은이들은 시가 어렵다고 합니다.
"신경림 선생이 자신의 시로 출제된 중학교 국어시험문제 10개 중 4개밖에 못 맞혔대요. 영혼의 양식이 아니라 공부의 한 방편으로 시를 분석하고 쪼개니 어렵고 재미가 없지요. 인생에 정답이 없듯, 시에 정답은 없어요. 말이 곧 시가 되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시를 마음껏 쓰고 즐기게 해줘야 하는데 안타까워요."
◇오늘도 첫눈을 기다린다
'당신은 눈물을 구울 줄 아는군/눈물로 따끈따끈한 빵을 만들 줄 아는군/오늘도 한강에서는/사람들이 그물로 물을 길어 올리는데/그 물을 먹어도 내 병은 영영 낫지 않는데/당신은 눈물에 설탕도 조금은 넣을 줄 아는군/눈물의 깊이도 잴 줄 아는군/구운 눈물을 뒤집을 줄도 아는군.'
―왜 시를 쓰십니까.
"배고프지 않으려고. 저기 달린 감도, 거리의 낙엽도, 이른 봄에 피는 산수유도 모두 영혼의 양식이지요. 그것들을 가지고 시인은 다시 '시'라는 영혼의 양식을 씁니다. 인간으로서 아름다워지기 위해. 육체가 추해지고 늙어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내 영혼과 정신이 추해지면 정말 부끄러울 거예요."
―정치의 길로 간 시인들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시인을 시 안에 가둬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나는 싫지만, 내가 싫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비판할 순 없지요. 그들이 선한 일을 이룰 수도 있고요."
―시인은 어떤 대통령을 원합니까.
"시를 읽는 대통령. 시를 쓰는 대통령이라면 더욱 좋겠지요(웃음)."
―이 시대의 무엇이 시인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까.
"새 건물을 지으려고, 자동차 길을 내려고 나무를 베어내는 것. 이웃을 너무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요즘은 지하철에서도 서로를 함부로 바라볼 수 없지요. 노숙자들을 위해 강연한 적이 있어요. 그들이 쓴 글을 읽었지요. 글도 좋고 글씨도 너무나 잘 써서 놀랐어요. 한 그루 나무를 대하듯 서로를 따뜻하게 바라본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10번째 시집인 '밥값'의 에필로그에 '지금까지 써온 시보다 앞으로 쓸 시에 대한 기대감으로 눈부신 오늘 아침을 맞이한다'고 썼습니다. 정호승에게 시를 쓰게 하는 힘은 무엇입니까.
"은사인 조병화 선생의 산문 중에 '시는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 살아가는 데 조금 위안이 될 뿐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이 들수록 그 말씀에 굉장히 공감해요. 저는 첫눈은 그걸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온다고 믿어요. 이제는 마지막 첫눈을 기다리는 시점에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마지막 첫눈을 기다리며 시를 써야 하는 삶이라면 좀 더 열심히 써야겠다,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 가슴에 쓸 게 더이상 없다, 죽어도 좋다라고 자부할 만큼 열심히 써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삽니다."
출처 / 세상과 세상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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