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적 에세이, 감성적 시론
나는 왜 시를 쓰는 가
김명기
인간이 한 생명체로 이 땅에 태어나 삶을 영위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저마다의 살아가는 선택의 길이 다를지라도, 우리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공통된 그 무엇을 안고 살아가야하는 과정이 있으니, 그것은 어쩌면 '인연'과 '운명'이 아닐까 싶다.
불가에서는 큰스님들이 대중들에게 설법을 할 때, '인연'과 '운명'을 하나의 '업業'으로 비유하기도 하고, 기독교에서는 신앙을 지니고 있는 이들에게 하느님이 곧 자신을 선택하여주신 은혜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참으로 뭔가 알 듯싶으면서도 어렵고 신묘하기도 한 이 단어는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위에서 이제는 흔히 쓰이는 관념어가 되어 우리네 인생사나 세상사를 논할 때 안줏감으로 자주 등장하는 미스터리의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이 '인연'과 '운명'이라는 단어가 나조차도 마치 동의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지천명知天命' 중턱 고개를 문전에 둔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이 단어 속을 자주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었다. 틈만나면 들여다보니 마치 습관처럼 되었다고나 할까. 그 속에는 지난 시절의 환희와 외로웠던 정적들, 희망과 절망, 용서와 분노, 때론 이유 없는 내 반항의 감성들이 하나가 되어 그리운 정겨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여, 이 '인연'과 '운명'이라는 단어와 친숙하게 되었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유심히 살펴 보노라면, 뭔가 서로가 다른 색채를 지니고 있음을 느끼곤 한다. 좀 억지스러울지 모르지만, '인연'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때론 변화할 수 있는 유동성이 있다면, '운명'은 절대적인 부동성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어찌할 수 없다는 이 절대적인 부동성 '운명'을 이제는 물 흐르듯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기까지에는 참 많은 시간의 강물을 나 자신 속에 소비하며 흘려보내온 것이 아닐까.
지난 한 시대 이 나라의 경제적 파국으로 인하여 많은 시민들이 생활고와 노숙자가 되어야만 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등을 떠밀려 거리를 방황했었다. 나 역시 그 틈 사이에 끼어 한 몫을 차지했다. 서민들이 즐겨 찾던 재래식 시장 거리에 휴업푯말이 늘어날 때마다 자판 위의 동전 한 닢도 못 되는 시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감상이고 현실의 생존을 회피하려는 부끄러운 발상인가를 고민하던 시절, 내 가슴 속에서 무수히 떨쳐버리려 했던 시와의 전쟁, 그럴수록 더욱 잔인하게 은밀히 나의 가슴속을 파고들던 묵언 적병 시!
나보다도 더 나의 가슴속으로 앞서 들어가 나를 지키주던 묵언의 시여!
나는 그렇게 이 길을 왔고, 다시금 또 가야 하는 운명?
이제는 내 주위의 모든 것을 사랑하며 살아가야겠다.
- 계간 시평 『칼리드 맛타와』 2012년 여름호
Fauré / Sicilienne Op. 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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