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높이에서 여성성까지 / 이동훈
- 신현락 시집 『히말라야 독수리』(북인, 2012)
언젠가부터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는 버릇이 사라졌다. 긋든 안 긋든 머리에 남는 것도 별 차이가 없을뿐더러 혹 다른 이에게 책을 넘겨주더라도 쓸데없는 흔적으로 남을 괴롭게 하지 않아서 좋다. 신현락 시인의 『히말라야 독수리』를 읽으며 없어졌던 버릇이 슬그머니 도져 군데군데 밑줄을 남겼다. 쉽게 넘길 수 없는 인상적인 구절이 많았고, 시인이 보여준 사고의 깊이와 폭을 눈으로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전의 시집 『풍경의 모서리, 혹은 그 옆』에서 노래했던, “한 생각을 흔들면 다른 생각이 흔들린다 한 바람에 수많은 갈대들이 흔들리듯이 거미줄 한 올을 흔들면 전체가 흔들리듯이 일파만파로 번진다”(「어섬에서」인용)는 말로 새 시집을 읽는 기분을 대신해도 되겠다.
내내 탐닉하였던 깊은 우물 바닥이 여기입니다 마른 우물의 바람이 여러 생의 지층을 밀어 올려 하늘과 가까운 산정을 이루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의 끝을 이루고 있는 형상이 산정이란 생각만으로도 내 겨드랑이에는 푸른 날개가 출렁입니다
계곡에서 날아오는 한 무리의 독수리를 보며 나는 누구의 몸을 얻어 어느 정신으로 죽을 것인지 생각합니다 죽음이란 가장 가벼운 숨결 하나 날개 위에 올려놓는 일이란 걸 어릴 적 빠졌던 우물물을 다 마시고서도 어렴풋한 기억인데요
지금 바람의 결을 타고 사뿐히 내려앉는 커다란 날개를 보고 서 있자니 끝내 무너지지 않던 손바닥만한 천장이 광활한 우주였음을 알겠습니다 그대가 가진 하늘의 몸을 빌면 또 깊은 우물이 열리는 것은 직립의 존재가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운명임을 받아들입니다
아지랑이 같은 고요의 깊이*를 견디면서 다시 내려 가야 하는 하늘우물의 바닥으로 바람은 여러 생을 지나고 있습니다만 혹시라도 구름의 부음은 흘리지 마세요 독수리 밥으로 던져지는 주검일지라도 가장 높이 나는 새의 가장 푸른 심장이 되는 것입니다.
* 송재학의 시 「황무지란 바람을 숨긴 이름이기도 하다」에서 - 「히말라야 독수리」전문
우물 바닥에서 산정까지, 산정에서 더 높은 하늘까지를 시인이 자주 쓰는 말투로 정신의 높이라고 하자. 하면 그 높이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우선, 날개가 유용해 보이지만 날개는 생각뿐 실제적으로는 주어지지 않는다. “죽음이란 가장 가벼운 숨결 하나 날개 위에 올려놓는 일”이라 했으니 몸이 죽거나 정신이 죽어야 성취가 가능하겠다. 그런즉 이전의 것을 전적으로 부정해야 새로운 단계로 비상할 수 있다는 의미일까. “그대가 가진 하늘의 몸을 빌면 또 깊은 우물이 열리는 것”으로 보아 도구로서의 날개가 없다 하더라도 새로운 지평, 혹은 정신적 높이가 가능함을 내비친다. 하지만 자기가 성취했던 높이가 또 한 번 “하늘우물의 바닥”으로 설정되면서 완전한 높이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음을 느끼게 한다. 산정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곳은 바닥과 다르지 않으며, 하늘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역시 우물 바닥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가장 높이 나는 새의 가장 푸른 심장”이고픈 마음은 여전하다. 어떤 필요가 히말라야 독수리에게 힘찬 날개를 주었듯이 정신의 높이에 대한 갈구, 절대적 자유에 대한 바람이 있는 한 시인은 바닥을 뜨려고 할 것이다. 그것이 또 하나의 바닥에 불과하다고 해도 시인은 히말라야 산정의 독수리와 눈을 맞추고 “고요의 깊이를 견디면서” 때를 기다릴 것이다. 바닥과 정신의 높이에 대한 사유는 「회향 回向」에서도 반복된다.
골목길 이면도로에 채 녹지 않은 그리움들이 자꾸 미끄러지며 헛바퀴 도는 해빙기의 아침, 연탄재 같은 메마른 슬픔이라도 길바닥에 부리고서야 길은 제 몸 밖으로 나서는 길을 허락한다 갈대숲을 보러 가는 길, 때마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철새는 날아가고’, 구슬픈 피리소리를 따라서 콘도르는 마추피추의 산정에서 날아오른다 더 오를 곳 없는 산정 같은 곳에서도 날아야 할 까닭이 있어야 했음을 그 시절에 짐작이나 했으려나
나에겐 정신의 높이가 그들에겐 삶의 바닥이었으니 그 노래의 슬픈 악보를 이미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 - 「회향 回向」부분
삶의 궁극적 좌표인 줄 알았던 산정이 다시 시작점이 되는 것은 앞의 시와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나에겐 정신의 높이가 그들에겐 삶의 바닥이었으니”라는 시구는 ‘정신의 높이=삶의 바닥’이라는 개인적 차원의 깨달음을 넘어서 있는 듯하다. 평생을 쌓아 올린 나의 정신의 높이라도 더 큰 창으로 보면 앞서 간 누군가의 까마득한 바닥에 불과하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나'와 '그들'을 결부시킨 이유를 딴 데서 찾고 싶다. ‘나’와 ‘그들’, ‘정신의 높이’와 ‘삶의 바닥’은 상호 관련되어 있다. 이편의 욕망과 저편의 결핍이, 저편의 부와 이편의 가난이, 나의 높이와 그들의 바닥이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생각할 것 같으면 공동체의 존재 윤리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다. “서로의 몸을 기대면서 혹은 부비면서 수만 평의 무량한 울음으로 회향하는 갈대숲”이란 표현도 이런 인식을 뒷받침하게 한다. 제목인 회향(回向)이란 글자를 들여다보면. 안으로 돌고(ㅁ) 바깥으로 돌고(口), 한 번 더 돌고 돈다. 끊임없이 방황하는 자아의 모습이다. 그러다 한 쪽을 트고 나간 모습이 향(向)자다. 오랜 방황 끝에 길을 찾아나서는 사람이 시인과 겹쳐 떠오른다. 시인의 길이 포장도로는 아닐 것이고 시인도 그걸 원치 않을 것이다. “길은 불평의 바닥이다/ 불평하지 않으며 길을 다 갈 수는 없다”(「고요의 입구」에서)에서 보듯이 편평한 길도, 침묵의 길도 시인이 지향하는 길은 아니다. 길 찾기는 평생의 과제이고 그 안의 방황은 어쩔 수 없는 시인의 운명이겠다. 이제, 시인의 정신의 높이가 여성상을 접할 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보겠다.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한 3만5천 년의 시간은 화석이 모래로 전이하는 데 충분한 풍량이어서 학자들이 사막의 발원지를 추정하는 근거로 들기도 하지만 밤마다 모래가 바다에 빠져 죽는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 한다 3만5천 년 후, 그 자리는 소금사막의 발원지가 되었다
모래의 여자는 정갈한 소금으로 밥상을 차리고 바람을 기다린다 사막에서 바람을 많이 먹는 종들은 종종 변이를 일으키는 데 그들이 사랑을 할 때는 서로의 입안에 소금을 조금씩 흘려보낸다 사랑을 구하기 위해서 남자들이 여자를 찾아오는 건 소금에 중독된 까닭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래의 동선을 보면 최초의 호모사피엔스가 여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바람의 혀는 감미롭게 모래의 능선을 애무하지만 모래의 여자는 모래만 낳을 뿐이어서 몇 만 년 동안 처녀의 지평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바람이 없는 날에는 가끔 소금이불을 햇빛에 펼쳐놓기도 한다
지금도 소금에 중독된 남자들이 모래의 여자를 찾아간다 그러나 소금을 맛본 바람에게 혀를 내맡기다가 대륙을 이동하는 모래의 변종에게 눈을 다치기도 한다. 눈먼 사내들이 사막에서 길을 잃을 때 모래의 여자는 심해의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싱싱한 소금을 그들 앞에 뿌려준다 그렇다고 소금을 한 주먹씩 집어 먹는 건 사막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아무리 극소의 미량이라도 한 알의 소금으로 치사량에 이를 수 있다
사랑을 많이 가진 남자의 입안을 들여다보면 소금바다가 출렁거린다 그들은 죽어서도 썩지 않는 사랑을 찾아 흰 뼈만 남은 몸으로 사막을 노 저어 간다 모래의 여자가 가시나무로 소금을 찍어 인간의 간을 맞추는 것은 이 세상으로 사막이 번져오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 - 「소금사막」전문
“모래가 바다에 빠져 죽은” 자리에 “소금사막”이 생겼고, 그곳에 소금을 부리는 “모래의 여자”가 있다. “소금에 중독된 남자들”은 “모래의 여자”에 이끌려 사막을 헤매고 여자가 찍어주는 소금으로 연명하고 그 소금으로 인해 더욱 위험해지기도 한다. 소금과 같이 “썩지 않는 사랑”을 믿고 사막을 헤매는 남자가 시인일 수도 있겠고, 시인의 운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정작 시인의 영혼이 갈구하는 “모래의 여자”는 여성성의 윤곽만 비칠 뿐 그 실체가 뚜렷하지 않다. “모래의 여자”가 만약, 물기를 얻는다면 시인 앞에 ‘물방울관음’으로 현현하지 않을까 싶다.
물방울 안을 들여다본다 오랫동안 손에 쥐고 있는 버드나무에서 아직도 습한 바람이 분다(중략) 마음의 관음이 버들잎만큼 움직이던 생이 나에게도 있있던 것일까 - 「물방울관음」(수월관음도, 혜허 작) 부분
“아무 때나 오는 해후가 아님을 안다/ 생사의 비단길을 뛰어 넘는 것은 간절함만이 아니다”며 오히려 간절함을 역설하고 있는 이 시는 전시된 ‘물방울관음’ 그림을 보고 나서 쓴 시다. 관음보살이 여성일 이유는 없지만 그림을 찾아보니, 버들가지를 든 가느다란 손과 장신구를 늘어뜨린 맵시와 어린 동자를 그윽하게 내려다보는 시선까지 영락없이 자비로운 여성상이다. 여성 혹은 모성의 부드러운 마음이 불성과 다르지 않다는 말도 있는 걸 보면, 이 느낌이 아주 엉뚱한 것만은 아닐 것인데 시인의 눈은 더 먼 데까지 닿아 있다. 시인은 다음의 해후까지 “기다려야 하는 생이 한 번은 남아 있다”고 했다. “물방울관음을 본다/ 기다림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라 해도/ 이번 기다림의 배경은 오로지 나의 전생”이라며 시인은 눈앞의 관음보살과의 해후가 일회적, 순간적인 만남이 아니라 전생(全生)의 기다림 혹은 전생(前生)의 인연에 따른 것이라고 여긴다. 그림 속 관음보살의 배경이 물방울이라면, “모래의 여자”의 최초의 배경은 바다일 것이다. 물방울이 생명의 상징이듯이 바다 역시 생명과 여성과 모성의 상징일 텐데, 현재의 모습은 물기를 앗긴 사막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시인은 사막을 두고, “화상 입은 모래알처럼 굴러다닌 어떤 생을,/ 상처라 하고, 누구는 출가라고도 하겠지만/ 나는 그것을 사막이라고 부른다/ 목마름에 나를 한 번이라도 보고 간 사람들이/ 치유할 수 없는 내상을 입고 떠나간 건 우연이 아니었다”(「화두」에서)며 사막의 불모성과 함께 에고이즘이나 자의식에 따른 관계의 서투름과 그로 인한 상처를 슬쩍 내비친 바 있다. 물방울관음 같은 구원의 여성상에 시인이 이끌렸다 해도 그것뿐 실제로 여성상이 시인을 더 나은 경지로 안내하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현실의 너와 나는 흠도 있고 흉도 있다. 모든 존재는 고뇌와 상처가 있게 마련이고 그건 구원의 여성상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구원의 여성상이 아름다움과 유혹, 구원과 파멸의 이중성을 가진 지상의 여자로 내려올 때 더 치명적인 여성상이 된다. 이상의 연인이었다가 정인택의 아내가 되고, 박태원과 재혼하여 그가 시력을 잃자 소설을 받아 적었다는 권순옥이 그런 여성일까. 니체의 천재와 광기를 끄집어내고, 릴케에게 끊임없이 사랑의 시심을 불어넣고, 한 예술가를 절벽으로 가게 한 살로메가 그런 여성일 것도 같다. 시인에게 살로메가 있었는지 수수께끼로 남겨 두고 자신을 가깝게 멀게 지나간 여성들을 여우로 표현한 시를 보자. 한 편의 독특하면서도 재 미난 동화를 만나는 느낌이다.
나는 성장소설을 쓰지 못 한 채 늙었다 나의 아름다운 여우는 무색계이 언덕에서 고개를 돌려 그윽한 눈빛으로 묻는다 뭐 하니? 살았니? 나는 마흔여덟 살, 나머지 한 손에 들고 있던 고구마를 여우에게 준다 여우도 배가 고프다고 나는 믿는다 솜털이 부드러운 새끼들을 위하여 귀를 쫑긋거리며 폴짝폴짝 땅을 팔 것이다 배가 부르면 털을 고르며 어떤 날은 사막의 드라마를 보거나 북극의 음악을 듣겠지
여우에게 불멸을 꿈꾸며 찾아다니던 암장이 나, 라는 말을 못 한다 할지라도 나와 여우 사이에 놓이는 것이 일생이라는 것쯤은 안다 네 생의 굽이굽이 여우비 찬란하게 내릴 것도 - 「여우」부분
“나는 생의 전환기마다 여우를 만난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인생의 단계 단계마다 만나는 여우에 대한 인상을 풀어놓는다. 특히 인용한 마지막 구절에서 웃음이 살짝 나온다. “새끼들을 위하여/ 귀를 쫑긋거리며” 땅을 파는 존재, 짬이 나면 드라마와 음악을 들으며 소일하기도 하는 여우의 모습이 너무 익숙하다. 바로, 어머니와 아내의 모습이다. 막연하고 신비로운, 구원이기도 하면서 고통이기도 한 ‘모래의 여자’와 아름다움과 자비로 더없이 환하지만 세속의 내 여성과는 구별되는 ‘물방울관음’을 를 떠나 시인이 마주한 현재의 여성상이 여우다. 여우가 암장을 찾아 거듭나려는데, 그 암장이 ‘나’라는 것이 동화의 끝을 어둡게 하지는 않는다. 사랑은 서로의 무덤 자리인 동시에 아늑한 꿈의 자리며 2세를 통해 부활하는 자리가 아닌가. 신현락 시인은 전 시집 『풍경의 모서리, 혹은 그 옆』에서 스스로를 ‘내 안의 여자’로 표현한 바 있다. 내 안에 여우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겠는데 이러한 여성성이 이웃과 세상으로 확대되어 「반경」,「헬리콥터」와 같은 울림이 있는 시가 나왔을 것이다. 책을 덮어도 시인이 보여준 정신의 높이가 내게로 옮겨 오지 않는다. 괜히 밑줄만 그어 시를 어지럽혔다. 지우개로 얼룩을 지우고 풍경의 모서리 그 옆에 두련다. |
- 출처 / 우리詩진흥회 - 미발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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