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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꽃들의 상처에 관한 이야기 / 신현락

by 丹野 2012. 7. 12.

 

 

 

우리詩시론

 

 

              꽃들의 상처에 관한 이야기

 

 

                              신 현 락

                                       (시인, 우리詩 부주간)

 

 

   원래 봄의 날씨가 변덕스러운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올해

는 유난히 그 정도가 심해서 몸이 잘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3월말까지 평년

보다 낮은 기온 탓으로 인하여 시차를 두고 펴야 할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목

련, 벚꽃, 라일락 등의 꽃나무들이 일제히 개화하는 걸 보면 몸살을 앓는 건 비

단 나뿐만이 아닌가 보다. 사정이 그렇다 해도 목련꽃 그늘 아래에서 푸른 하늘

을 배경으로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목련을 바라보는 일이나 벚꽃 흐드러지

게 핀 가로수 아래를 천천히 걸으며 봄밤의 꽃향기에 취하는 시간은 이 계절에

가질 수 있는 축복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꽃에게 절을 하고 싶다. 한 송이의 꽃

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 밤에 꽃 같은 시를 쓰고, 누군가는 꽃

을 들고 애인을 찾아갈지도 모른다.《 우리詩》3, 4월호의 작품 중에서 꽃에 관한

시가 눈에 띈 것은 순전히 봄 탓이다.

   꽃에 관한 가장 오래된 시를 생각해본다. 김춘수의 존재론적인 꽃이 먼저 떠오

르고, 그 위에 ‘가시는 님’에게 진달래꽃을 뿌려주는 소월의 얼굴이 겹쳐지다가

저멀리「헌화가」에까지 이른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시문학사에서 가장 오래된 구애의 원형이다. 배경설화의 주인공은 수로부인

과 암소를 끌고 가는 노인. 배경설화는 다 아는 이야기이므로 생략하자. 다만 내

가 여기에서 읽는 건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사랑을 향한 인간의 욕망에 대

한 솔직한 긍정이다. 꽃이 핀 장소가 절벽인 것은 삶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노인

의 현실적 처지와 닮았다. 수로부인이 원하는 꽃을 따기 위해 ‘잡고 있는 암소’

를 놓아야하고, 목숨을 걸어야 하지만 노인은 기꺼이 꽃을 꺾어 바치겠다고 한

다. 단 노인에게도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이라는 조건이 있다. 암소는 노

인에게 전재산일 것이다. 아무리 사랑이 좋다지만 전재산을 포기하고 구애하는

데 아무런 조건이 있을 수 없다. 수로부인은 허락하고 노인은 꽃을 따다 바쳤다

는 행복한 결말로 배경설화는 마무리 된다. 신분과 나이에 상관없이 사람들은

누구나 꽃을 받고 싶고, 꽃을 주고 싶어 한다. 그러한 순수한 사랑의 소통방식의

원형을 담고 있기에 천년 이상을 두고 이 노래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

닐까.

  자연을 통한 타자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성향은 서정시의 전통이다. 자연을 풍

경화하고 자연에게서 위로를 구하는 서정적 문법은 현대시에도 여전히 유효하

다. 그렇지만‘현대의 독자들이 과연 그러한 시를 읽고 공감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직면했을 때는 선뜻 긍정적인 답을 할 수 없다.

  몇 년 전 예외적으로 많은 판매부수를 기록한 시집『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

이다』에 수록된「木蓮」은 현대의 젊은 시인들이 꽃/자연을 보는 방식을 전형적

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루에 누워 자고 일어난다

12년 동안 자취自取했다

 

삶이 영혼의 청중들이라고

생각한 이후

단 한 번만 사랑하고자 했으나

이 세상에 그늘로 자취하다가 간 나무와

인연을 맺는 일 또한 습하다

문득 목련은 그때 핀다

 

저 목련의 발가락들이 내 연인들을 기웃거렸다

이사 때마다 기차의 화물칸에 실어온 자전거처럼

나는 그 바람에 다시 접근한다

얼마나 많은 거미들이

나무의 성대에서 입을 벌리고 말라가고 서야

꽃은 넘어오는 것인가

화상은 외상이 아니라 내상이다

문득 목련은 그때 보인다

 

이빨을 빨갛게 적시던 사랑이여

목련의 그늘이 너무 뜨거워서 우는가

 

나무에 목을 걸고 죽은 꽃을 본다

인질을 놓아주듯이 목련은

꽃잎의 목을 또 조용히 놓아준다

그늘이 비리다

                       - 김경주,「 木蓮」전문

  

  ‘목련꽃’을 ‘나무에 목을 걸고 죽은 꽃’이라고 말하는 김경주 시인의 어법은

김소월, 박목월보다는 이상을 닮은 듯 보인다. ‘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는 박목월 시인의 뒤에서 목련의 ‘그늘이 비리다’고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 다가갈 수 없’어‘ 이상스런 흉내’를 내는 이

상만큼이나 낯설다. 목련은 시인에게 낭만적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내상’을

입은 자아의 초상으로 전이되어 나타난다. 시인은 ‘이빨을 빨갛게 물들이던 사

랑’, 즉 순수한 사랑을 타자화 하고 ‘인질을 놓아주는’ 나무처럼 조용히 혼자

남는다. 꽃과 대상의 관계보다 꽃 자체에 시선이 집중되므로 김경주의 꽃은 소

통의 꽃이기보다는 고립의 꽃이라 할 수 있다. 김경주의 꽃은 자연 혹은 타자와

의 동일성을 거부하고 자아와 치열한 내전을 치룬 상처 입은 영혼의 다른 이름

이다.

  이상이「오감도」를 신문에 발표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항의를 하여 연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으나 현대의 독자는 서정적이지도 않고 난해하기까지 한 위

의 시집에 적극적인 호응을 보내 주었다. 이러한 경향의 시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이라도 독자들의 자연에 대한 감수성과 의식이 이전과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젊은 시인들과 독자가 옛날과 같은 자연친화적인 시

에 호감을 가지지 않는 사실을 인정할 때가 온 것으로 보인다. 도정일 교수의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를 되돌아본다. ‘산성비가 내리는 시대에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눈 오는 밤 숲에 머물어」를 읽으며 예전처럼 행복해 하는 독자

가 있을까?’라는 그의 회의와 물음은 지금도 퇴색하지 않았다. 그의 의견에 전

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꽃 피는 봄밤에도 산성비에 사물이 삭아 내리는

현실이 동시에 존재하는 사실을 모르는 독자는 없다. 그러한 독자의 마음을 움

직이는 시를 쓰기 위한 시인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주경림 시인이 연꽃을 보러 저수지에 가지 않고 ‘비닐하우스 연못’을 찾아간

것은 이러한 고민의 결과이다.

 

 

초정리 연꽃마을, 비닐하우스 연못에는

어미와 떨어진 씨앗들이 누워 있다

아직 잠 속에서 깨어나지 못해

까맣게 웅크린 씨앗들,

점, 점, 점점점……

 

 

그 씨앗들의 눈이 오목하게 3mm 정도 잘려져 있다

그들도 상처의 힘으로

빨리 자랄 수 있도록 자극을 받는 것일까

그들의 몸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로 커질

백련, 홍련, 사시연, 어리연꽃, 노랑머리연꽃 등을

상상해 보다가

 

문득, 내 몸도 씨앗 한 톨에서 비롯되었음을,

이 세상, 또한 새카만 씨앗 한 톨에서 커졌음을,

울음소리라고는 조금도 들리지 않는 신생아실에서

씨앗 한 톨에 압축된 생애를 읽어본다.

                           - 주경림,「 연꽃 신생아실」전문.《 우리詩》4월호

 

 

 

  현실에서의 꽃은 이 시처럼 인간에 의해 상처받고 복제되어 상품으로 판매되

어 나가는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속도는 상품의 성패를 좌우

한다. 옛날과 달리 사람들은 자연의 생태적 시간을 기다릴 만한 여유가 없다. 비

닐하우스 연못이라는 인위적인 공간에서 식물이 속성으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유전자를 조작하기도 하고, 그것도 모자라 개화를 촉진시키기 위하여

니퍼로 씨앗의 눈에 상처를 낸다. 자연에 가해진 인위적인 폭력이라고 할 수 있

겠다. ‘ 연꽃 신생아실’은 오늘날 꽃에 관한 리얼리티의 한 단면을 예리하게 포

착하는 장소이다. 연꽃 씨앗은 생명/자연의 제유이며, 비닐하우스 연못은 문명/

인공적 자연의 제유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비닐하우스 연못과 같은 공간으

로 왜소해졌지만 시인의 시선은 그 잘려진 눈의 상처에서 싹을 틔우는 힘, 생명

의 힘을 읽는다. 상처의 힘으로 꽃이 핀다는 이 시의 전언에 나는 공감한다.

  현실에서의 꽃/자연은 상처를 품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그 상처투성이의 꽃

을 들고 사랑을 고백하는 청춘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 사랑과 더불어 자연

은 시의 오래된 원천이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시에서 사랑과 자연이 그만큼 진

부한 주제라는 뜻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왜 자연인가?

  현대시에서 자연은 문명비판적 대안으로서 생명의 본질을 담보하고 있으며

여전히 시인에게 영감과 깨달음의 젖줄을 제공하고 있는 유효한 자원이라는 데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90년대 이후 현재까지 우리시의 담론을 관

통하고 있는 핵심적인 용어는 여성, 몸, 일상성, 자연, 생명 등이다. 이러한 경향

의 시들은 생태시, 생명시, 자연시, 여성시, 일상시, 도시시라고 불리우며 포스

트모더니즘, 페미니즘, 에코페미니즘, 해체주의와 결합되면서 우리 시의 지형도

를 매우 다양하게 수놓고 있다. 구소련의 붕괴 이후 우리 문학의 무게중심은 사

회학적 상상력에서 생태학적 상상력으로 옮겨갔다는 사실은 이제 새삼스런 이

야기가 아니다. 이러한 현상이 과연 바람직한가에 대한 의구심이 전혀 없는 것

은 아니다. 그렇지만 생태학적 상상력은 그 동안 역사와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

압받아 왔던 여성과 자연을 재발견하여 우리 시의 중심부로 자리하게 해준 주요

동력원이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여성과 자연의 핵심은 생명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의 개념은 자연처럼

광범위하여 한마디로 말하기는 매우 곤란하다. 인간은 하나의 생명체로서 생명

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생명에 대해 경험을 하고 있고 많은 것

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막상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되면

적절한 대답을 찾기가 어렵다. 생명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는 흔히 생명을 생식과 복제능력이 있는 유기체에 한정한다. 그러나 시인

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일찍이 정현종 시인은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한 숟가락 흙 속에

미생물이 1억 5천만 마리래!

왜 아니겠는가, 흙 한 술,

삼천대천세계가 거기인 것을!

                     -정현종,「 한 숟가락 흙 속에」부분

 

 

  이 시는 ‘한 숟가락의 흙 속에’ ‘1억 5천 마리’의 미생물이 살고 있다는 정보를

독자에게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니다. 물론 새로운 정보를 접한 독자

는 놀라움을 느낄 수도 있다. ‘ 한 숟가락의 흙 속에’  ‘1억 5천 마리’나 되는 미생

물이 과연 살고 있는지에 관해 의심해 볼 수도 있다. 그것의 진위를 확인해 보는

일은 과학의 몫이다.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다음에 있다. ‘ 흙한술’, 그

작은 세계에 ‘삼천대천세계’, 즉 우주가 들어있다는 이야기를 이 시는 전해주고

싶은 것이다. 시인은 과학자와 달리 생명을 개별적인 유기체로 파악하는 대신

전체적인 관점에서 파악한다. 미생물뿐만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흙도 시인에

게는 생명의 한 부분인 것이다. 전체는 부분과 부분의 합이 아니라 부분이 곧 전

체일 수 있는 것, 이러한 생각은 ‘하나의 작은 먼지에도 시방세계十方世界가있고

삼매가 들어있다.’고 보는 불교의 가르침과 동일선상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하

찮게 여기는 ‘흙 한 술’이 오염되는 것이 시인에게는 우주가 오염되는 것과 같

은 의미인 것이다.

  근대 이후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연을 개발과 이용의 대상으로 생각해왔다. 그

결과 몇 천년 동안 서정시의 터전이었던 자연이 오염되었다. 그렇지만 오염된

세계에서도 꽃은 핀다. 꽃을 피우는 것이 꽃의 운명이듯이 한 송이의 꽃에서 우

주적 생명성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다. 한 송이 꽃이 오염되

는 현실을 누구보다도 아파하는 존재가 시인이다. 그러므로 자연이 더 이상 자

연스럽게 존재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시인이 숲속으로 가지 않고 비닐하우스나

시멘트 건물을 찾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꽃이 핀다

시멘트 바닥을 뚫고

봄볕 따사로운 오늘 불쑥,

상판대기를 내민다

뻔뻔스럽게 고갤 쳐든다

뿌리부터 빨아올린 간절한 물기로 솟아오른다

(…중략…)

자지러지게도 핀다

지려고 핀다

꽃이

핀다

                    - 김연성,「 단단한 꽃」부분,《 우리詩》3월호

 

 

 

  시인이 보는 현실은 이렇다. 꽃은 ‘시멘트의 바닥을 뚫고’핀다. 거기에 무슨

거창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시인은 ‘뻔뻔스럽게’  ‘상판대기’를 내

밀고, ‘ 핀다’고 한다. 꽃을 보고 ‘뻔뻔스럽게 핀다’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 꽃의

얼굴을 보고 ‘상판대기’라고 말하는 것을 보는 것도 처음이다. 꽃이 뻔뻔스럽게

피는 것은 시멘트 때문이다. 시멘트보다 더 견고한 현실의 벽 때문이다. 그 시멘

트바닥은 현실의 바닥이다. 유산된 아이를 가루로 만들어 좀더 오래 살아보겠다

면 캡슐로 만들어 먹는 인간성, 문명의 바닥이다. 그 더럽고 견고하고 구질구질

한 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꽃의 얼굴이 시인의 눈에 어찌 예쁘게 보이지 않으랴

마는 시인은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경우 ‘뻔뻔스럽다’는 말은 꽃을 향

한 시인의 최상의 예의이다. 그래서 꽃은 ‘뿌리로부터’ 빨아올린 ‘간절한 물기

로’ 시멘트를 뚫고 ‘자지러지게’ 피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의 꽃이고 날 것 그대로의 자연이다. 이 시는 ‘지려고 핀다’는 화

자의 개입이 있기는 하지만 자연의 상처를 과장하지 않고, 동일화의 메카니즘에

빠지지 않으면서 현실공간에서의 꽃의 양상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꽃의 의미는

분명하다. 자연이 훼손되고 문명의 벽이 더욱 단단해질수록 꽃은 더욱 악착같이

종족을 번식하기 위해 핀다. 비록 생명의 씨앗이 시멘트 바닥에 떨어진다고 해

도 꽃은 피고 또 핀다. 상처를 오히려 성장의 동력으로 삼는다. 꽃의 생명성과

순환의 리듬은 시멘트로 둘러싸인 세계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그늘은 태양의 벌레 먹은 자국이다

빛의 무덤이다

 

사람만이 촛불을 켠다. 그럴까?

 

보라, 보라!

보랏빛 맥문동꽃

가느다란 대궁에 수백 수천

성냥알처럼 핀

 

그늘꽃

빛의 이면엔 그늘이 있다는 듯

배후가 환해야 세상이 따뜻하다는 듯.

                    - 조삼현「, 맥문동, 사회학」전문, 《우리詩》3월호

 

 

  이 시는 두 가지 점에서 나의 눈길을 끈다. 소재로서의 ‘맥문동’과, 사회학적

상상력으로 꽃을 시화한 점이 그렇다. 과문해서 그런지 ‘맥문동’을 시의 소재로

삼은 시는 읽어본 기억이 없다. 맥문동은 생명력이 매우 질기며 나무 아래 군락

을 지어가며 살아가는 야생초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우아한 자태를 가지고

있거나 아름다운 꽃을 가지고 있지 못한 까닭에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는 꽃이

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도 맥문동이 있으나 이 시를 보기 전까지는 그냥 무

심히 지나쳐버리곤 했었다. 이 시를 읽고 나서 ‘맥문동’을 보는 나의 눈이 달라

졌다. 맥문동은 ‘태양이 벌레먹은 자국’이며 ‘빛의 무덤’, 그늘에서 자라는 작은

야생화이므로 무릎을 꿇어야만 볼 수 있다. 맥문동의 보라색 꽃은 ‘성냥알’을

닮았다. 누군가 불을 붙이면 촛불처럼 타오를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시인은

‘사람만이 촛불을 켠다. 그럴까?’라고 자문한다. 이 구절은 몇 년 전 미국산 소

고기 수입에 반대하며 광화문에서 촛불 시위를 벌였던 사회적 사건을 환기시킨

다. 굳이 그런 의미가 아니더라도 ‘촛불을 켜’는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늘꽃’은 사회의 그늘에서 누가 알아보아 주지 않아도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유이겠다. 그들은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다. 사회는 그늘에서 일하는 그들이 없으면 제대로 유지되기는 어렵지만, 그들

은 일한 만큼 사회로부터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자기의 자리, ‘ 빛의 이면’에서 촛불과 같은 꽃을 피우기 위해 전존재를

바치는 사람들이‘배후’에 있기에 이 세상은 ‘따뜻한’ 것이리라.

  한국시에서 자연친화성은 매우 뿌리가 깊다. 현대시에서도 자연의 심미성을

탐구하고, 자연에서 삶의 이법에 대한 깨달음을 노래하는 경향은 지속될 것이

다. 또한 꽃은 대표적인 자연적 상징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꽃에 관한 다양한 경

향의 작품도 계속 창작될 것이다. 문제는 꽃이 아니다. 꽃이 피어난 장소가 중요

한 것도 아니다. 어느 곳에 있는 꽃을 소재로 하든지 거기에는 시인이 살고 있는

구체적 현실과 새로운 비전이 담겨져야 한다. 다행히《우리詩》에서 만난 몇 편

의 시는 나의 이러한 주목에 값하고 있다. 상처에서 생명의 향기를 읽어내는 시

인의 감각과 사유의 방향에 믿음이 간다. 그렇지만 아직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데는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현실

과 비전이 만나는 지점에서 시적 깊이는 탄생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동일성의

비전은 서정시의 근원적인 세계관이다. 그것을 포기하는 순간, 시에서 물기는

사라진다. 거기에는 마치 폭풍에 비닐은 날아가고 비틀어진 철골만 남은 비닐하

우스처럼 현실의 앙상한 구조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처 입은 꽃을 두고

자연과의 동일성과 위안을 추구하는 것 또한 자기기만이 아닐 수 없다는 데 시

인들의 고민이 있는 것이리라. 자연을 소재로 하여 새로운 시적 개안의 황홀한

순간뿐만 아니라 현실성을 구현하는 시적 깊이를 보여주어야 하는 그 지난한 과

제를 시인들은 모두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신 현 락 시인

■ 199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 시집으로『따뜻한 물방울』『풍경의 모서리, 혹은 그 옆』이 있음

■ 저서로『한국현대시와 동양의 자연관』이 있음.

■ 이메일: shinpoet@empal.com

 

 

출처 / 우리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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