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대한 몇 개의 단상들 # 02
장석주
종달새
버드나무 가지에 물이 오르고 가지마다 매달린 잎들은 연녹색이다. 호수의 넘실대는 물은 푸르고, 영산홍은 붉다. 공중에는 종달새가 높이 떴다. 어느 맑고 따스한 봄날이다. 이 봄날의 완벽함에 방점을 찍는 게 바로 종달새의 청아하게 울리는 울음소리다. 공중에 제 맑은 울음소리를 뿌리는 종달새는 그 울음소리로써 생명의 약동을 노래한다. 종달새의 울음소리가 화니하는 것은 이 세계가 죽은 것들, 즉 바위나 꺾인 나뭇가지, 고압선 철주나 콘크리트 건축물들과 같이 부동하는 딱딱한 사물들의 세계가 아니라 뛰고 날며 움직이는 생명들의 세계, 말랑말랑한 생명의 놀라움과 기쁨으로 가득 찬 우주라는 사실이다. 이 종달새의 울음소리를 듣고 시인은
"반짝이는 울음의 의상을 보아라"(문태준, <종다리> 라고 적는다. 시인은 무미의 초연함 속에서 시가 번쩍, 하고 나나타는 찰나를 붙잡는다! 종달새의 울음소리는 우리에게 어떤 형이상학적 암시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계의 찰나, 생명의 기척만을 드러내는 표면이기 떄문이다. 아무런 심연도 갖지 않은 그것은 찰나의 반짝임으로써 영원성의 덧없음을 암시할 따름이다. 귀바퀴에 와서 편종처럼 맑게 울리는 종달새의 울음을 울음의 반짝이는 의상으로, 즉 청각적 이미지를 시각적 이미지로 바꿔내는 이 능력이 바로 시인의 울트라 상상력이다. 이 한 구절은 100권의 시집에 실린 1000편의 시가 실어오는 의미의 비중과 맞먹는다.
하이쿠
하이쿠를 즐겨 읽는다. 하이쿠는 의미의 기승전결이 없고 내부가 텅 비어 있는 기호들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시의 원시적 흔적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의미를 지향하지 않고 오히려 의미로부터 달아난다. 하이쿠는 짧게 말해지는 것, 기의를 머금지 않은 기표의 덩어리다. 하이쿠는 단지 17자로 완성됨으로써 씌여진 것보다 씌여지지 않는 부제의 영역에서 공허의 놀라움을 보여주는 지구상에서 가장 짧은 시 형식이다.
그것은 의미의 배제, 의미의 면제에서 의미를 일으켜 세운다. " 이 숯도 한때는 희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타다토모)라는 하이쿠를 보라. 이 한 줄의 시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헛되다. 의미가 응결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하다. 검은 숲에서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로 뻗어나가는 연상만이 시의 전체로서 위연하다. "허수아비의 뱃속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있네" (이싸)라는 하이쿠는 어떤가. 이것에도 의미는 없다. 들판에 허수아비가 서 잇꼬, 가만히 귀 기울이나 그 허수아비 뱃속에서 귀뚜라미 한 마리가 울고 있다. 이렇듯 지나가는 가을의 쓸쓸한 한 순간에서 세계의 어떤 기미를 포착한다. 그뿐 일체의 의미를 보태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이때 하이쿠는 단지 기표들의 모음, 순수한 우연의 파편에 지나지 않는다.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하이쿠에서 근원 없는 반복행위, 원인 없는 사건, 인간 없는 기억, 닻줄 없는 언어를 인식한다" (<기호의 제국>)라고, 좋은 시들은 항상 최소의 언어로 최대의 의미라는 장력을 보여준다. 젊은 시인들의 시들이 대체로 지나치게 장황하다. 시잡지에 나오는 그 많은 시편들이 언어를 남용하고 있다. 그토록 많은 언어들로 최소의 의미만을 수집하는 시들을 읽을 때 나는 쓸쓸해진다. 언어가 많고 장황해질수록 시는 볼품없어진다. 반면에 언어의 쓸데없는 낭비를 줄이고 언어의 내핍을 실헌할 수 있는 시인일수록 좋은 시를 쓸 수 있느 가능성이 커진다.
태양초
"붉고 메마른 것이
우리에게 왔다.
금엽金葉 햇빛을 쪽쪽 빨아먹고
혈소판마저 투명해졌구나,
가난하고 천하면서 뻣뻣한 것,
너는 봉향을 잊었구나,
비릿한 게 마르면
가슴 더 붉고
기억은 가벼워지는가!"
(졸시,<태양초>)
처음 백석시집을 접했을 때 모국어의 우너형을 만난 듯싶었다. 백석의 시에 나오는 평ㅁ북과 평안남도를 아우르는 풍부한 서북 방언들, 웅숭깊은 정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 한 삶의 깊은 데로 꿰어보고 나오는 그 내성의 목소리에 흠뻑 빠져들었다. 백석의 시는 표준어가 도무지 가 닿을 수 없는 아슬한 경지에 다다른다. 백석의 시는 소리내어 읽어보면 국어의 맑은 울림소리에 단박에 매혹당할 수밖에 없다.
"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나 면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아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면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 <남산의주 유동 박시봉상>)라는 구절을 가만히 소리내서 읽어보라. 그 활달한 소리값과 소박한 뜻이 하나로 포개져서 전달된느 절묘함에 무릎을 칠 수밖에 없다. 국어의 맑은 울림소리에 실어 보내는 시적 전언들은 우리 감각의 갱신을 요구한다. 백석의 시들은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을 비비고 두드려 깨운다. 그 오감의 흥겨움 속에서 싱ㄺ기의 즐거움을 한껏 드높이는 것이다. 우리 가난한 마음의 맑은 푯대로 삼을 만한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의 이미지는, 미당이 적어낸 이 어둡고 우중충한 세상을 단박에 화창하게 만드는 "우리 코자딸년들이나 그 조카딸년들의 친구들의 웃음판"(서정주,<상리과운>)의 이미지와 견줘도 한 치도 빠지지 않을 만큼 어여쁘고 빼어나다. 시골에 내려와서 산 지 어느덧 열 손가락을 다 꼽아도 남을 만큼 세월이 지났다. 우연히도 이웃 농가에서는 고추 농사를 주로 지었다. 고추 농사는 병충해가 잦아서 쉽지 않다. 그 난관을 이기고 빨갛게 익은 고추들을 따서 가을 금볕에 널어놓은 농가에서는 범용한 풍경을 바라보는 것도 가슴 벅찬 바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마다 고추를 따서 말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얻은 시가 <태양초>이다. 금볕에 마르는 붉은 고추들의 신수가 훤했다. 그래서 나는그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난하고 천하면서 뻣뻣한 것"들은 어디서 와서 이렇게 붉게 익어 가는가, 라고 뜬금없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졸시<태양초>는 "나는 이 세상을 살어 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백서, <흰 바람벽이 있어>)" 라는 백석의 절창에 바친 오마주이다.
-계간지 「시와정신」201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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