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대한 몇 개의 단상들 # 01
장석주
시
시는 깨달음도 의미도 겨냥하지 않는다. 어떤 시는 사물을 꿰뚫고 지나가는 직관의 순간을 보여주고, 어떤 시는 상상력의 다체로움과 오묘함을 보여준다. 시는 칼날 없는 칼이요. 실재가 없이 춤추는 그림자다. 그래서 시는 무소불위하고 자유자재하다. 미당은 그런 경지에 닿은 시인이다. 미당의 시중에도 눈썹이 나오는 시들이 좋다. 잘 알려진 「동천 冬天」도 좋지만, 비교적 덜 알려진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도 좋다. “사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그 암무당 손때 묻은 징채 보는 것 같군. 그 징과 징채 들고 가던 아홉 살 아이- 암무당의 개와 함께 누룽지에 취직했던 눈썹만이 역력하던 그 하인아이 보는 것 같군. 보는 것 같군. 내가 삼백 원짜기 시간 강사에도 목이 쉬어 인제는 작파할까 망설이고 있는 날에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나 ……” (서정주,「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싸락눈이 내리는 날이다. 검은 눈썹에 하얀 싸락눈이 달라붙는다. 그 싸락눈을 맞으며 암무당이 앞서고, 그 뒤를 징과 징채를 든 아홉 살 난 아이가 따른다. 하인 아이는 암무당 집의 신분 서열에서 개와 동렬이다. 아홉 살 난 하인 아이는 사람의 세계가 아니라 가축의 세게에 속해 있다는 뜻이다. 하인 아이는 비천하다. 그러나 싸락눈 내려 눈썹을 때리는 세상에서는 신분의 차별도 덧없어진다. 암무당도 하인 아이도 개도 싸락눈의 세상에서는 평등하다. 오직 싸락눈 내리는 어떤 날의 풍경에 빙의가 되어버린 마음, 즉 비천한 노동에 매여 사는 일에 시들새들해져 불현듯 그것들을 작파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평지돌출되어 있을 뿐이다. 싸락눈 내리어 눈썹을 때린다. 암무당집 하인 아이나 삼백원 짜리 시간강사 노릇에 진절머리를 내는 ‘나’는 어느덧 싸락눈 내리는 날 암무당과 징과 징채를 들고 암무당을 말없이 뒤따르는 하인 아이로 변신한다. 신분격차를 무찔러버리는 그 풍경의 빙의 속에서 가까스로 어떤 세계상이 드러난다.
새 세상에는 수많은 새들이 있다. 동고비, 곤줄박이, 붉은머리오목눈이, 쇠박새, 노랑텃멧새, 되새, 노랑할미새, 방울새,종달새ㅡ 꾀꼬리, 뻐꾹새, 쑥국새, 딱딱구리, 멧비둘기, 쇠찌르레기, 물까치 …… 새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는데ㅡ 잘 먹고 잘 산다. 신기한 일이다. 이 사랑스런 난봉꾼들! 나는 새들을 질투한다. 질투에 눈이 멀어 천진난만한 존재들의 명성에 공연히 흠집을 내보는 것이다. 사소한 것들을 빌미 삼아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건다. " 새, 어떤 규율도 따르지 않는 무리, 새, 허공의 영재英才들, 새, 깃털 붙인 질항아리, 새, 작고 가벼운 혈액보관함, 새, 고양이와 바람 사이의 사생아, 새, 공중을 오가는 작은 범선, 새, 지구의 중력장을 망가뜨린 난봉꾼 새, 떠돌이 풍각쟁이, 새, 살찐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가벼운 육체, 새, 뼛속까지 비운 유목민들, 새, 똥오줌 아무 데나 싸갈기는 후레자식, 새, 국민건강의료보험 미불입자다," (졸시, 「새」) 하늘에 나는 새를 두고 질투에 눈이 멀어 늘어놓은 트집들이다. 명민한 시인이자 비평간느 이 시에 다음과 같이 점잖은 문장을 덧붙인다. 시의 행동을 다르게 번역하면 이렇게. 새, 규울을 물 말아먹은자, 전깃줄에 일령횡대로 앉아 있는 범생들, 깨지기 쉬운 질그릇, 누군가 던진 혈액봉투, 자식 잡아먹는 애비의 바로 그 자식, 두 개의 작은 돗을 편 배, 하늘로 되던진 뉴턴의 사과, 떠돌이 악사, 거식증 환자, 골다공증 환자, 날아다니는 변기통, 그런데 마지막 행은 번역되지 않는다. 저 난감한 문장을 들여다보노라면, 불현듯 새가 시인의 별명임을 알게 된다. 돈을 안 냈으니 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는 게 아니다. 그에게도 돈도 없고 혜택도 없는 거다. 최저생계비 저 아래 사는 시인이 아직도 많다. 그에게 지로용지와 독촉장과 최고장을 보내지 말라, (구ㅠㅓㄴ혁웅, 2011년 5, 17 중앙일보, 「시읽는 아침」) 시는 꿈보다 해몽이다! 권혁웅이 말하는 바 시는 "난감한 문장들" 일텐데, '새'를 '시인'으로 바꿔 읽음으로써 그 불투명의 난감함을 단박에 명쾌한 그 무엇으로 전환해낸다. 멋진 해석이다. 비평과 해석은 시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집에 오는그 많은 시잡지들을 읽다보면 소 잡는 칼로 닭을 잡는 비평가들이 부쩍 많아진 듯하다. 비평가가 시의 난감함을 이기지 못한 탓인데, 그것은 비평가가 시인의 내공에 못 미치는 까닭이다.
-계간지 「시와정신」201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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