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는 사라지지 않는다 / 김경성
그때, 붉은 바람이 어디서 불어왔는지
바람결에 몸을 맡긴 수많은 사람들 모두 붉은 마을로 갔다
춤을 추는 바람은
수백 년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민흘림기둥의 섬세한 무늬까지 모두 읽고 난 후
기왓장 안쪽 어골무늬 어디쯤 그대의 손금이
묻어있는 내밀한 곳까지 붉은 물을 들여놓은 후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붉음도 너무 깊으면 검은 빛이 된다
울음 스며들어 그을음 가득한 보광전 아래 계단의 연꽃문양
시들지 않는 꽃잎 아직도 선명하고
키 큰 석등이 있던 자리 그 불빛 아직도 환하게 비추는 듯하다
폐허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심장 근처쯤 다가갔을 때
흰뺨검둥오리 한 쌍 물소리를 내며 발 아래쪽으로 날아갔다
맑은 양수 봄볕 받아서 눈부셨다
수만 권의 책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붉은 마을로 사라져간 사람들의 말이 회랑을 돌아서 흘러 다니고
몸 가장 깊은 곳에 아직도 살아있는 우물 하나 품고
아무도 없는 폐사지에 심장소리 쿵쿵 울린다
장엄한 꽃을 피워 올리는 집이었던 기억이
깊게 암각 되어있는 건물의 기단과 초석
여기 저기 흩어져서 폐허의 몸속으로 핏줄처럼 깊이 들어가 있다
산벚꽃 꽃잎 부도탑에 내려앉아
처연하게 마르는 봄날,
오래 앉아있으니 그대가 꽃잎에 새겨놓은 붉은 마을이 보였다
꽃잎 내려놓고 길 떠나는 바람의 깃을 잡고
붉은 마을로 들어가는 길로 들어섰다
- 김경성 시집 < 와온 > 2010 에서
출처 : 淸韻詩堂, 시인을 찾아서
글쓴이 : 동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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