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람의 궁전
사진과 인문학/꽃살문의 꽃이 되다

걸어서 가기, 흥천사 [興天寺]

by 丹野 2012. 2. 13.

 

 걸어서 가기, 흥천사 [興天寺]

 

 

정릉에 이사 오면서 생각했던 것이 집 근처의 유적지를 찾아보기였습니다.

이곳에 사는 동안 걸어서 갈 수 있는 곳부터 천천히 닿으려고 생각했습니다.

2월 첫째 주에는 봉국사에 다녀왔고, 어제는 흥천사와 길상사에 다녀왔습니다.

결코, 무엇을 얻기 위해 그곳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저를 들여다보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정릉 정문을 지나쳐서 북악스카이길 가는 골목으로 들어섰습니다.

목련이 벌써 이렇게요.

몇백 년은 되어 보이는 고목에 기대어 지붕보다 더 높이 올라간 능소화가 보였습니다.

올여름 능소화에 젖어보는 시간을 갖게 되어서 혼자 웃었습니다.

오래된 능소화 꽃빛이 어떤 빛깔일지 벌써 궁금합니다.

정릉 고개를 넘어서니 왼편으로 흥천사길 이정표가 보였습니다.

 

 

 

 

 

흥천사 [興天寺]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에 있는 절

흥천사 극락보전은 서방 극락세계에서 설법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봉안한 법당으로, 조선 철종 4년(1853)에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흥천사는 창건 당시부터 정토신앙의 사찰로 유지되어 왔기 때문에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신 극락보전이 중심건물이다.

 

흥천사는 조선 태조의 왕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능인 정릉(貞陵)을 수호하는 원찰(願刹)로 태조 6년(1397)에 창건된 절이다. 창건 당시에는 서울 도성 안에 해당하는 지금의 중구 정동에 있었으며, 국가적 행사가 자주 열렸고 건물도 170여 칸이나 되는 대가람이었다고 한다.

 


왕비의 능과 원찰을 도성 안에 두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대개는 왕의 능이라 하더라도 성 밖에 두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살아 생전에 왕비를 극진히 사랑했던 태조는 왕비의 능을 궁궐에서 가까운 곳에 마련하였고,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능의 동쪽에 당대의 최대의 가람으로 흥천사를 창건했던 것이다. 흥천사 건립에 참여한 김사행(金師幸), 김주(金湊) 등은 고려말 조선 초의 각종 국가 공사를 시행하였던 대표적인 건축가였다.

 


이처럼 태조가 신덕왕후의 원찰로 창건한 흥천사는 처음부터 조계종의 본사로 번성을 누렸다. 하지만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은 신덕왕후의 능을 도성 밖 북한산 기슭으로 옮겼고 오랜 동안 돌보는 사람도 없이 버려져 있었다. 선조(宣祖) 때에 와서야 신덕왕후의 제사를 이 곳 정릉에서 정기적으로 지내게 되었고, 현종 10년(1669)에는 송시열(宋時烈) 등 대신의 청원으로 능을 수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능과 너무 가까이에 있던 작은 암자를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기고 신흥사(新興寺)라는 새로운 이름의 원찰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 후 정조 18년(1794)에 성민(聖敏)·경신(敬信) 등이 다시 한번 새롭게 중창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그 후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요사를 짓게 되는데, 이때 대원군은 절이름을 '신흥사'에서 원래의 '흥천사'로 복원하도록 하면서 흥천사라는 글씨를 내려 주어 지금도 만세루에 현판으로 남아있다.

 

 

 

 

 

 

 

 

 

 

 

 

 

 

 

 

 

흥천사 극락보전은 철종 4년(1853)에 구봉 계장(九峰啓壯) 스님이 중수하였다. 규모는 정면 3칸·측면 3칸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인 다포양식 건물이다. 돌층계를 정면에 두고 기둥은 창방과 평방으로 결구하고 기둥 사이에도 전ㆍ후면에서는 각 2구, 측면에서는 각 1구의 공간포를 두었다. 정면 3칸에는 꽃살 창호를 달고 좌ㆍ우 뒷면은 판벽이다.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가운데 우물천정을 두었다. 문에는 화려한 꽃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가운데 두 기둥 위에 돌출 되어 있는 용머리 장식이 특징이다.

 


극락보전이란 십겁(十劫) 이전에 성불(成佛)하고 서방 극락세계에서 대중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이다. 이 부처는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중생이 염불을 하고 일념이라도 지심회향(至心廻向)하면 곧 왕생할 수 있게 해주며, 그 때 서방에서 성중(聖衆)이 와서 그 사람을 맞이해 간다고 한다. 그 세계에 살게 되면 다시는 전생(轉生)하지 않으므로 생사(生死)의 윤회(輪廻)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극락보전에는 현세의 고통에서 벗어나 안락하고 살기 좋은 극락의 정토세계로 이끌어 주는 아미타불상과 그 뒷면 벽에 아미타불화가 배치된다.

 


이 극락보전의 구조와 형태는 조선시대 말기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시대 건축의 모범이 될만하다. 이 건물은 19세기 사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화려한 목조 건축으로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 주고 있는데, 서울에서는 희귀한 사찰 건축이므로 매우 귀중하게 평가받고 있다.

 

 

 

 

 

 

 

 

 

 

 

만세루 뒤편에 목어

 

 

 

 

 

 

 

 

 

 

 

 

 


 

 

 

 

 

3169

 

'사진과 인문학 > 꽃살문의 꽃이 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걸어서 가기, 봉국사  (0) 2012.02.13
걸어서 가기, 길상사  (0) 2012.02.13
흥천사 꽃살문  (0) 2012.02.13
정수사 꽃살문  (0) 2011.08.24
이 말을 할 때면 언제나 조금 울게 된다  (0) 2011.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