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새로운 시 쓰기 1 / 이지엽
1. 21세기 시학의 층위
현재 우리 한국 현대시의 시학의 충위는 대개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1. 서정과 믿음의 시학
2. 생명과 구원의 시학
3. 해체와 모순의 시학
4. 몸과 욕망의 시학
5. 속도와 쾌락의 시학
6. 고독과 죽음의 시학
7. 존재와 성찰의 시학
8. 시대와 삶의 시학
이분류는 21세기에도 그대로 유효할 것으로 판단된다. 1 과 2와 7 과 8이 이 전통에 기대있다면, 8내지 6은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설명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층위은 포괄하여 묶을 수 없는 개성과 지향점들을 내포 하고 있다. 1의 서정과 믿음의 시학은 서정시의 새로운 흐름으로 보인다. 2의 부류가 80년대 이후 특히 90년대에 불기 시작한 생명시의 흐름에 크게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7,80년대 고속 성장의 물줄기는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데 기여를 했지만 동시에 자연과 그 주위의 환경을 심하게 파괴하였다. 이 파괴와 일그러짐 속에서 긍정적인 사유로 생명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노력의 시학이 2의 부류이고, 부정적으로 나타난 성향이 6의 부류이다.
김지하의 '생명'과 최승호의 '공장지대를 차례로 살펴보자.
생명
한줄기 희망이다
캄캄 벼랑에 걸린 이 목숨
한줄기 희망이다
돌이킬 수도
밀어붙일 수도 없는 이 자리
노랗게 쓰러져 버릴 수도
뿌리쳐 솟구칠 수도 없는
이 마지막 자리
어미가
새끼를 껴안고 울고 있다
생명의 슬픔
한 줄기 희망이다
- 김지하, 「생명」전문
김지하의 「생명」은 어미가 새끼를 껴안고 우는 것을 생명의 원형으로 본다. 억지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원초적인 것에 가치를 둔다. 그것들이 세상을 이끌어 가는'마지막 자리'이다
신경림의 「이제 이땅을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를 위시한 「할머니와 어머니의 실루엣」의 시편들, 고은의 「슬픔」을 비롯한 「만인보」의 시편들,고재종의 「면면함에 대하여」를 비롯한 「앞 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의 시편들, 깅용택의 「그 여자네 집」과 안도현의 「그리운 여우」,「바닷가 우체국」의 시집들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 위에 놓인다.
그러나 최승호의 「공장지대」에 오면 그 사정은 달라진다.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몸 안에 공장 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페수와
아이 배꼽에 매달린 미닐끈들,
저 굴뚝들과 나는 간통한 게 분명해!
자궁 속에 고무인형 키워온 듯
무뇌아를 낳고 산모는
머릿속에 뇌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정수리 털들을 하루종일 뽑아댄다
-최승호, 「공장지대」전문
생명의 파괴는 문명의 편리에 편승해 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채로 도시 서민층은 살아가야 한다. "저 굴뚝들과 나는 간통한 게 분명해?" 라는 단호하면서 자조가 섞인 토로는 현대인의 의식과 생활의 비극적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연기가 토해내는 굴뚝
속에서 꾸역꾸역 나타나는 굴뚝 아래
검은 공기 속에서 낙과처럼 추락하는
흰새들의 어두운 하루 애꾸눈 개들이
희디흰 대낮의 거리에서 수은을 토한다
--수은을 먹고 흘리는 수은의 눈물
눈물방울
절벽 같은 천둥번개 같은
--장석주, 「그리운 나라」 후반부
그리운 나라 / 장석주
1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젊은 날의 첫 아내가 사는 고향,
지금은 모르는 언덕들이 생기고
말없이 해떨어지면 모비(墓碑) 비스듬히 기울어
계곡의 가재들도 물그늘로 흉한 몸 숨기는 곳,
이미 십년 전부터 임신 중인 나의 아내,
만삭이 되었어도 그 자태는 요염하게 아름다우리.
시월이면 돌아가리, 그리운 나라
연기가 토해내는 굴뚝
속에서 꾸역꾸역 나타나는 굴뚝 아래
검은 공기 속에서 낙과(落果)처럼 추락하는
흰새들의 어두운 하늘 애꾸눈 개들이
희디흰 대낮의 거리에서 수은을 토한다.
수은을 먹고 흘리는 수은의 눈물,
눈물방울
절벽 같은 천둥번개 같은,
귀기울이면 저 강 앓는 소리가 들려오네
신음하고 있는 700리 낙동강
내 유년의 기억 속 서걱이는 갈대밭 지나
가물거리는 모래톱 끝까지 맨발로 걸어가면
시야엔 출렁이는 금비늘 은비늘의 물살
수백 수천의 새들이 나를 반겨 날고 있었네
지금은 볼 수 없는 그 많은 물떼새들
왕눈물떼새․검은가슴물떼새․꼬리물떼새․대기물떼새……
수염 돋은 개개비란 새도 있었네
물떼새 알을 쥐고 돌아오던 어린 날의 낙동강
내 오늘 한 마리 물고기처럼 회유해 왔네
아무것도 없네, 그날의 기억을 소생시켜 주는 것이라고는
나루터 사라진 강변에는 커다란 굴뚝의 도열, 천천히
검은 연기를 토해내고 있네, 천천히
땅이 죽으면 강도 따라 죽을테지 등뼈 휜 물고기의 강
대지를 버린 내 영혼이 천천히 황폐해 가듯
할아버지랑 그물 망태기를 들고 강에 나가면
참 많은 물고기를 맛볼 수 있었네
잉어․누치․가물치․뱀장어․미꾸라지……
수염 돋은 동자개란 놈도 가끔 보였네
지금 그 물고기들 낙동강을 버렸다고 하네
내가 세제를 멋모르고 쓰는 동안 거품을 물고
내가 폐수를 슬구머니 버리는 동안 거품을 물고
신음하는 강, 그 새 그 물고기들 다 어디론가 떠나
내 발길 바다에 잇닿는 곳까지 왔네, 낙동강구
을숙도를 보고 눈감고 마네, 삐삐삐 삐리삐리 뽀오르르 뽀르삐
눈감으면 바다직박구리 우는 소리가 들려오네.
- 이승하, 「돌아오지 않는 새들을 기다리며」 전문
분신을 꿈꾼 적 있었을까.
음뻑 기름을 뒤집어 쓴 채
검은 기름바다
해초더미에 기대어
이글거리는 유황빛 두 눈알을 꿈벅이며 죽어가고 있는
바닷새
가마우지,
-고진하, 「 훨훨 불새가 되어 날아가게」초반부
이 시인들의 작품에도 여지없이 파괴된 자연이 그려진다. 「그리운 나라」는 고향의 상실감이 반어적으로 그려지고 있고, 「돌아오지 않는 새들을 기다리며>는 무자각적인 현대인들의 생활오염의 실태를 반성하는 자아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으며, 「훨훨 불새가 되어 날아가게」에는 기름 유츌로 죽어가는 "가마우지"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선이 아프게 그려져 있다.
그 아픔은"이제'기름뭉치가 다 된 저 가마우지 몸뚱아리에 차라리 확,불꽃을 튕겨 줄까? / 훨훨 불새가 되어 아무데나 날아가게……"라는 자조와 비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형기의 「병아리」신경림의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현종의 「들판이 적막하다」,김명수의 「적조」김광규의 「늙은 소나무」. 이하석의 「연탄재들」,고형렬의 「거대한 빵」,「컴퓨터 가스」이문재의 「산성눈 내리네」,「오존 묵시록」허수경의 「원폭수첩」연작시편들, 정인화의<여기는 온산 」, 함민복의 「지구의 근황」등의 시편들은 현대문명 속의 일그러진 자연의 모습을 애증의 줄무늬로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편 3 해체와 모순, 4 몸과 욕망, 5 속도와 쾌락의 시학이 새로운 90년의 시 분법을 창출하였다. 해체의 기류는 이미 80년대 부터 시작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성복 의 「그날」은 대표적 자유연상 기법을 보여주었고 80년대 '시운동'동인들은 정치, 사회적 압력의 고통을 언어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하여 여과없이 그대로 분출하였다.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 구나」시편들은 극지점에 달한 양상들이다 이를테면 「호명」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도대체 시란 무엇인가」,「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씨의 어느날」등은 시의 형식에 대한 대담한 실험과 전위적 수법들을 보여주었다. 김정란은「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시집을 통해 새로운 시문법에 도전하였다. 여성의 통과의례를 이미지의 겹침과 쉴 새 없이 소곤거리는 낮은 읊조림을 통해 유감없이 구사하였다. 다르다면 일종의 서사성을 가미한 점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버릇같이 그것을 들여다 보고 있을 때였어요
갑자기 내 몸이 가비엽게 뜨는 듯하더니
어디론가 세차게 빨려들어가기 시작했어요
캄캄하고 비좁은 이큐베이터 속으로!
쇳조각과 전류가 흐르는 네모 상자 속으로!
나는 그 속에서 바보같이 킬킬대고
잽싸게 지껄이고 거짓말하고 미소짓습니다
나는 이 속에서 온갖 죄악과 부패를 배웠습니다
그래요,언제부터인가 나는 무감각한 한 대의
티브이일 뿐입니다
- 장정일, 「새로운 자궁」전문
장정일의 시편들은 충격적인 속도와 만나고 있다. 거의 단발마적으로 내뱉는 "창녀인 나의 어머니가 / 나를 죽였어요!" / (파랑새)등의
언표는 과거의 인습과 전통에 대해 가차 없는 질타를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자궁」역시 세차게 흡입해 버리는 현대문명의 이기를 '자궁'이라는 신성성과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 이도발성은 유하의 「바람부는 날은 압구정동에 가야한다」에서도 나타나며, 서림의 「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에도 일정기류로 흐로고 있다
몸과 욕망의 시학적 흐름은 정진규와 채호기로 대표된다. 전자가 「알詩」의 시집에서 깊이 있게 보여준 생명의 단초에 대한 원형적 추구에 있다면, 후자는 성의 도덕성과 기존 질서에 대한 거센 반감에서 출발한다. 전자의 性이 생명의 성이라면 후자는 욕망의 성인 셈이다. 「알詩」시집은 현상학적의 둥근 세계의 완벽함, 건강한 생명들, 허공과의 진화, 존재와 재생의 순환적인 구조를 우리 삶의 원형 상징인 '알'을 통해 하나의 전범을 마련하였다
우리 문학에 있어 존재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고민은 한국전쟁 이후라고 봐야 온당할 것이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인간에 대한 혐오와 상황에 대한 무기력은 실존의 문제를 상당히 자연스럽게 우리생활 중심으로 가져왔다. 대표적인 작가들로 장용학과 김춘수를 들 수 있다. 김춘수의 「꽃」으로 대표되는 존재론적 성찰은 확실히 우리의 시단을 한 단계 부상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는 그의 시에서 자주 자유연상의 기법을 도입하고 「처용단장」시편에서부터는 무의미시를 주장하기도 하여 존재론적인 성찰의 본류로 깊숙히 파고 들지 못하는 한계를 지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90년대에 들어 「마음의 수수밭」「오래된 골목」을 비롯한 천양희의 시편들과 「바닷가의 장례」로 대표되는 김명인의 시들은 존재와 성찰의 길 찾기에 부쳐진 대표적 결과물들이다.
시대와 살의 시학은 산업화의 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신경림의 「농무」(1973) 조재일의「국토」(1975), 김준태의 「참깨를 털면서」(1977) ,정희성의 「저문강에 삽을 씻고」(1978),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1984)등은 이를 대표하는 시집들이다.
특히 박노해는 임규찬의 지적처럼 '하나의 문학사로 불릴만한 진폭을 가져왔다.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에 대한 생생한 현장성은 문학 영역 이외의 한국 노동 운동에도 막급한 영향을 주었다
머리띠를 질끈 묶으며
적과 아를 확연히 갈라내여 묶으며
전선에 선 동지들을 한 대오로 묶으며
'결사투쟁' '일치단결' '승리 챙취 ''노동해방'
살아 펄펄 뛰는 구호를 정수리에 새기며
결연한 투지로 비장한 맹세로
떨리는 손길로 머리띠를 묶는다
- 박노해, 「머리띠를 묶으며」후반부
그러나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시대와 삶의 문학적 기류는 확실하게 탈이념화 경향 속에서 급격하게 퇴화되면서 서정시의 흐름에 동승하고 있는 느낌이다. 환경문제와 통일문제에 대한 시대인식의 고통이 장애요인으로 남아 있더라도 말이다.
90년대 여성성의 도저한 분출을 우리는 또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살핀 천양희의 「마음의 수수밭」과 「오래된 골목」두권의 시집이 다소 전통에 기댄 고통과 고뇌의 통과의례에 존재의 성찰을 통한 길 찾기 였다면 최승자, 김정란과 김혜순의 일년의 작업들은 새로운 시 문법과 반전통의 토대 위에 선다.
최정례의 시「창」에는 나뭇잎마저도 '칼'로 인식하는 세상에 대한 진저리처지는 애처로움이 있다.
저건 포플러나무가 아니다
팽개쳐 일그러진 두 바퀴
소리치는 몸뚱이
저건 저건 내리치는 검은 칼
창 / 최정례
저건 포플러나무다
아니 저건 나귀의 두 귀다
저건 잎진 포플러 두 그루다
아니 분명 늙은 나귀의 두 귀다
핏빛 노을은 다 지나갔다
그는 유리창에 매달려 중얼댄다
유리창엔 늙은 나귀가 와 섰다
아득히 멀다
안개 속을
짐을
산처럼 잔뜩 싣고
저 허약한 바퀴로
어떻게 헤쳐가나
유리창 속으로
그는 달아나려 한다
너무 오래 갇혀 있었다
딱딱한 어둠을 뚫고 뛴다 뛴다
어둠 속에 포플러나무
진저리를 치고 날아오른다
오, 날아오르지 못한다
사각의 유리창에 갇힌
나귀, 어리석은 두 귀
저건 포플러나무가 아니다
팽개쳐 일그러진 두 바퀴
소리치는 몸뚱이
저건 저건 내리치는 검은 칼
'포플러나무'와 '검은 칼'의 만남은 민담과 도시적 상상력 교차속에서「햇빛 속에 호랑이」라는 보다 건강한 중첩적 의미망을 형성한다.
이러한 의미망이 시의 행과 연을 의도적으로 단절시키는 「봄 소나기」까지 연결되지만 최정례의 새로운 시쓰기 기법은 현대인의 단절된 자아의 틈새를 파고드는 흡인력을 당분간 유지할 것으로보여진다.
이외에도 죽음이 유예되고 있는 욕망의 그림자와 그 난폭한 잔영들을 애써 잠재우며 희망을 찾아내려는 자세가 아프게 각인된고 있는 이경임「부드러운 감옥」, 너절하고 수상한 일상사의 절벽 가운데 오만 잡것을 애써 끌어안고 있는 이경림의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등은 분명 20세기 세기말적 흐름 가운데 자연스레 배태된 大地의 상징, 여성성의 도저한 분출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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