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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스크랩] 프리다 칼로

by 丹野 2012. 1. 11.

 
 
 



Frida Kahlo(프리다칼로)

Album : Frida

1. 나의 탄생 My Birth   
2. 전설 Legend   
3. 프리다 Frida   
4. 푸른 뱀 Blue Snake   
5. 해바라기 Sunflower   
6. 여행자 Traveller   
7. 바람의 노래 Ode To The Wind   
8. 러시안 룰렛 Russian Roulette 

 

프리다 칼로의 초현실주의 그림들처럼 서정성과 독창성을 아우르는 마법 같은 색채감을 지닌, 밴드 프리다 칼로의 3집 앨범 [프리다]

라틴, 프로그래시브 포크, 재즈, 사이키델릭 등의 경계를 누비며, 멕시코를 넘어 전세계의 화가로 발돋음했던 프리다 칼로의 삶과 작품에서 한 음, 한 음 채록하여 완성한 컨셉트 앨범

초현실주의 그림들처럼 독특한 색채의 곡들로 채워져 있는 3집 앨범은 타이틀명인 [프리다]라는 이름 그대로 1번 수록곡 `나의 탄생`에서부터 7번 수록곡 `바람의 노래`까지 프리다의 삶과 남편 디에고에 대한 사랑, 그리고 두 예술가에겐 삶과 사랑의 터전이었던 멕시코와 마야, 아즈텍 문명을 중심으로 하여 재즈, 포크, 라틴, 사이키델릭, 프로그레시브 등 다양한 장르가 어우러지고 있다.

특히 여행자(Traveller)라는 곡은 점진적으로 상승하는 분위기나 라스트의 장중한 드럼 연주가 아주 맘에 든다. 마치 파란 만장한 삶의 한 장(章)을 지나, 끝없이 뻗어 있는 길 위에, 다시 서는 사내의 다짐과 같은 곡.

이 곡은 물론 대중적인 곡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보컬이 중심이 되는 곡들과는 달리 이 곡은 중간 부분에 잠시 삽입되는 나레이션을 제외하면 오히려 연주곡에 가깝다. 그리고 실제로 나레이션은 가장 마지막날 녹음 되었다, 마치 용의 눈에 점을 찍듯이.

이번에 수록된 대부분의 곡들이 그러하지만 이 곡은 유난히, 비록 노래는 귀로 듣지만 눈으로 보는 듯한 느낌이 강렬했다. 눈을 감고 이 노래를 들으며 나는 언제나 아득한 사막 위에 서 있는 사내들, 혹은 사내를 그리고 지평선을 떠올렸다.

음악이 시작되면 기타 소리가 나지막하게 긴 여운을 두고 한 번, 두 번, 세 번....소리를 낸다. 천천히 사내는 고개를 든다. 기타 소리가 리듬을 타기 시작하고 그의 눈 앞에 사막이 보인다. 그리고 현악기의 선율이 나서면서 마치 카메라가 하늘로 쏟구치듯이 올라가며 그와 그의 앞에 펼쳐져 있는 아득한 사막을 보여준다.그리고 간간이 놓이는 피아노 소리는 그 아득한 지평 위의 한 점과 같은 사내의 외로움을 느끼게 해 준다. 기타와 현악기의 선율은 점점 고조된다. 그와 사막을 보여주는 카메라 역시 멈추지 않고 계속 하늘로 하늘로 올라간다. 지평선 저 끝까지 이어진,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사막. 그리고 소리가 뚝 멈춘다.

바람 소리와 뒤섞인 한 사내의 나지막한 나레이션이 흐른다, 회상처럼.

먼 바다를 향하는
배를 타고
오늘은 고물에 기대어 낮잠을 잔다

사랑할 그 무엇이 안타까워 나는 여기에 있나
쓸려다니는 낙엽처럼
결국 나조차 나를 기억 못할 건데

나는 또 어쩔라구
이 거리에서 사람을 기다리나

아마도 사내는 사방으로 수평선만이 펼쳐져 있었을 바다와 비정한 도시를 오가며 숱한 거리에서 자신의 삶을 보낸 듯 하다. 그리고 시계 소리, 부산스럽게 오가는 사람들의 발자욱 소리, 웅성거리는 소리들......잦아들면.

마치 잠시 떠올렸던 회상에서 빠져나오듯 기타 소리가 몽롱하게 이어진다. 기타는 마치 지난 기억에서 빠져나올려는 사내의 의식을 표현하듯이 안감힘을 쓴다. 조금 더, 조금 더......번쩍 드럼 소리가 터져 나온다. 사내는 눈을 부릅뜨고, 눈 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사막을 본다. 사내의 가슴 밑바닥부터 저 길의 끝에 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러나 끝까지 걸어가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북받쳐 오른다. 사내는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그래, 이 노래는 파란 만장한 삶의 한 장(章)을 지나, 끝없이 뻗어 있는 길 위에, 다시 서는 사내의 다짐과 같은 곡이며, 또한 이 곡은 또 다시, 새롭게, 길 위에 서는 모든 이들을 위한 찬가다. 드럼 소리, 기타 소리, 모든 소리들이 고조되고 사내는 끝없이 펼쳐져 있는 길의 저 끝을 향하여 걷는다. 사내의 모습 멀리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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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는 1908년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나이 18살때 전차가 버스를 들이받는
큰사고로 척추와 오른쪽다리, 자궁을 크게 다쳤다. 일생동안 35번의 수술을 받았다.
그녀가 평생 그토록 원했던 아이도 갖지 못했다. 사고의 후유증과 고통, 상처등은 훗날 그녀의
미술세계에도 큰 영향을 미쳐 작품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1939년 프랑스에서 열린 멕시코전을 통해 국제적인 화가로 성장했다.
앙드레 브르통을 비롯하여 피카소와 칸딘스키, 뒤샹등으로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로 인정 받는다.


1907년 7월 6일 19살에 멕시코로 이민 온 독일 출신 사진 작가인 기예르모 칼로(아버지)와 멕시코 태생인 마틸데 칼데론(어머니)사이의 셋째 딸로 멕시코 코요아칸 '푸른 저택'에서 태어난다. 풀네임: 막달레나 카르멘 프리다 칼로 이 칼데론 - 하지만 그녀는 1910년 멕시코 혁명이 발발한 그 해에 태어났다고 사람들에게 얘기하곤 한다. 공산주의자로 멕시코 혁명기우와 함께 태어났음을 강조한다.

1913년(6세) 소아마비에 걸려 9개월간 방에만 갇힌 채로 살았다. 외로운 어린시절, 소아마비로 인해 말라빠진 오른쪽다리를 혐오하게 되었다.

1921년(14세) 명문 국립예비학교에 입학해서 서클 '카츄사즈' 활동을 하면서 독서를 끊임없이 했다.

또한 그녀는 카츄사즈를 통해 남자아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정을 실현해 나가는 동지적 성실함을 배우게 되었다.

그 서클에서 그녀의 첫 사랑이자, 오랜 친구가 되는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를 만난다.

1925년(18세) 알레한드로와 프리다가 탄 버스가 건널목에서 열차와 충돌해서 알레한드로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으나, 프리다는 심한 참상을 당했다.(하복부와 척추뼈에 철골이 들어가고, 심한 출혈 때문에 그녀가 살아있는게 다행인데다가 하반신 마비가 되어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1926년(19세) 사고의 후유증으로 고통 속에 나날을 보내며 알레한드로에게 끊임없는 사랑의 편지를 보낸다.

계속 침대에 누워있는 동안 지루한 나머지 무언가를 해보기로 결심,

그녀의 가족들은 천장에 거울을 설치해 주고, 침대에 부착할 수 있도록 특수 이젤을 제작해 줬다.

그렇게 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첫 번째 그림 '자화상'을 완성한 후 알레한드로에게 보냄.

 

1928년(21세) 알레한드로와의 이별, 그러나 이후에는 친구 사이로 평생 서로를 지켜보게 된다.

그해 프리다는 멕시코에서 망명하고 있던 쿠바의 공산주의자 훌리오 안토니오 메야를 알게 되고, 그와 함께 살고 있는 티나 모도티와 깊은 우정을 나눈다. 그리하여 프리다는 티나와의 교류를 통해 멕시코 공산당에 입당하게 되고,

그 이후부터 그녀는 공산당이 조직한 문화 행사 및 정치 행사에도 참여하면서

이 때, 두 번째로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게 된다.

 

1929년(22세) 42세의 디에고와 결혼했다.

친구들은 스무살 이상의 나이 차이와 디에고의 복잡한 여자 관계를 들먹이며 반대하지만

프리다의 아버지는 그녀의 치료비 지출로 인한 재정적인 압박을 받고 있는 터라 승낙했다.

결혼 후 그녀는 그림을 그만두고 남편을 위해서만 봉사한다.

그녀는 디에고가 추구하던 원주민과 멕시코의 토속성을 직접 집에서 실천했다.

 

1930(23세) 첫 번째 임신, 끔찍했던 교통사고와 선천성 골반 이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어 임신 중절을 했다.

공산주의자들을 디에고가 부르주아화 되었다면서 비난하고 결국 스스로 탈당을 하게 되었다.

디에고의 미국에서의 벽화 작업으로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1932년(25세) 두 번째 임신, 프리다는 디에고에게 아들을 선사하고 싶었지만,

그는 아이를 원치 않았고, 건강상의 이유로 유산. 낙태라는 고통을 알게 된다.

프리다의 어머니가 폐암으로 사망하고 디에고는 플레이 보이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방종의 생활을 시작했으며 프리다는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1934년(27세) 세번째의 유산,

디에고가 프리다의 막내 동생인 크리스티나와 깊은 관계인 것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디에고가 좋아하던 긴 머리를 자르고, 더 이상 테우아나 전통의상도 입지 않았다.

 

1935년(28세) 멕시코로 돌아와 일본 태생의 조각가인 '이사무 노구치'와 사랑에 빠진다.

디에고는 크리스티나와의 관계를 청산한 후였고, 프리다와 이사무의 비밀스런 만남을 알게된다.

디에고의 협박으로 그들의 만남은 끝났다. 프리다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1937년(30세) 망명 생활로 떠돌던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 부부를 도와주게 된다.

트로츠키는 프리다에게 매혹되고 둘의 만남은 사랑으로 발전되었으나 오래가지 않고 관계를 청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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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31세) 프랑스 초현실주의 거장 앙드레 부르통을 만났다.

11월 뉴욕의 줄리앙 레비 화랑에서 첫번째 개인전을 가지게 된다.

브르통은 그녀를 "뛰어난 초현실주의 화가"라고 찬사를 보냈다.

뉴욕에서 젊은 사진작가인 니콜라스 머레이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1939(32세) 앙드레 부르통의 후원으로 파리의 피에르 콜르 화랑에서 전시회를 가진다.

이 전시회에서도 역시 칸딘스키, 피카소 등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의 극찬을 받는다.

남미 화가로는 최초의 루브로 박물관에 그녀의 그림이 소장된다.

머레이와 이별하고, 디에고와의 관계도 악화되어 이혼한 후, 더욱 그림에 몰두하게 된다.

1940(33세) 멕시코 미술관에서 개최된 초현실주의 국제 전시회에 '2인의 프리다 상처받은 식탁'을 출품하고, 디에고는 여자 관계 정리하고, 상대방에 대한 독립성 존중 등을 조건으로 디에고 리베라의 54세의 생일에 재결합한다.

1941(34세)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의 죽음, 프리다의 건강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1944(37세) 석고와 가죽 코르셋으로 몸을 지탱하지 못해 강철 코르셋을 착용하기에 이른다.

1946(39세) 뉴욕에서 척추 수술을 받았으나 고통은 점점 더 심해졌다.

1950~51에는 영국에서 일곱 번의 척추 수술을 받는다.

1953(46세) 멕시코에서 프리다 칼로의 회고 전시회가 열렸는데 개막식날 침대에 실린채 참석했다.

결국 오른쪽 다리 절단 수술을 받았다.

1954(47세) 폐렴이 겹친다. 7월에 휠체어를 타고 공산주의자 시위에 참여했고

정치적 신념을 표현할 각본을 만들기 위해 다시금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54년 7월 12일 일기
"내가 거리로 나간 것이 다행스런 일이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더 이상 고통스런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1954년 7월 13일 자살

1958년 푸른 저택의 프리다 박물관으로 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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