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니힐리즘 2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박이문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근본적 존재조건 속에서의 인생이 어떻게 베케트에 의해서 유사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잇다.
한마디로 베케트가 보는 인생은 유쾌한 것, 아름다운 것이 못 된다. 첫째로 잎 하나도 없이 말라빠진 나무 하나만의 시골길과 저녁 광경이 유쾌하거나 생동하는 것이 될 수 없다.
2막에서 나뭇잎 몇 개 붙여진 것으로 보아 완전히 죽음의 세계는 아니지만 인생은 근본적으로 쓸쓸한 관점으로 해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에스트라공처럼 인간은 어리석고 무엇인지 알 수 없이 살아가는 괴물이거나 혹은 포조처럼 잔허하거나, 또는 러키처럼 불쌍하거나 혹은 블라디미르처럼 외롭다.
문자 그대로 죽지 못해 사는 이러한 인생은 극히 따분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인생의위태로움이 다음과 같은 베케트의 유사에서 나타난다.
플라디미르 : 아무 얘기나 해!
에스트라공 : 생각하는 중이여,
블라디미르 : 아무 노래나 해 봐!
따지고 보면 따분한 이 '인생이란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찾아오지않고, 아무 데로도 떠나가지 않는' 권태로운 장소다. 그런 권태를 잊기 위해서 블라디미르처럼 얘기를 꾸며 보아야 하고에스트라공, 포조 또는 러키처럼 이상한 곡예를 부려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처럼 따분하고 가련하고 쓸쓸한 생활을 계속 하는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와 같은 질문에 대답이 없다. 이 작품 속의 한 인물이 말하듯이 모든 것은 혼돈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이 엄청난 혼돈 속에서 단 한 가지만이 확실하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들이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뿐인 것이다."
인생이 혼돈이라 함은 인생이 이성으로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혼돈의 인생은 에스트라공이 기억력을 자주 상실하고 같은 사람, 같은 물건, 같은 장소를 하루만 지나도 기억 못 하는 것으로 암시되며 고도를 만나더라도 무엇을 묻거나 부탁해야 할지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로 나타난다. 고도를 기다린다는 사릴만이 확실한 것이지만 물론 고도는 다름아닌 생존에의 궁극적 본능의 상징이다. 그런데 그러한 본능은 결코 완전히 만족시켜질 수 없기 때문에 계속 만족되기를 기다리게 마련이다.
결국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이 무늬미한 굴욕 속에 끊임없이 얽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는 무엇 떄문에 살고 무엇 떄문에 본능에 집착하는지를 모른다. 그렇다고 본능에서 해방될 수 없다. 이와같이 모순되고 난처한 완전히 비극적 인간상황은 몇 번이고 반복되는 다음의 대화에 요약된다.
애스트라공 : 어떻게 하면 좋을까?
블라디미르 : 무얼 해도 아무 소용 없어.
잘라 말해서 우리가 무슨 노력, 무슨 짓을 해도 인생은 죽어 흙으로 썩어 갈 때까지 '한낮 어리석은 잡답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란 결론이 선다.
실존주의적 하이데거는 인생을 뜻 있는 인생과 뜻 없는 인생으로 구별하고 뜻 없는 인생을 가리켜 '어리석은 잡답의 인생'이라 했다. 그의 인생관의 일면에는 어두운 면이 없이 않지만 어떤 비평가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하이데거의 사상은 니힐리즘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잡담의 인생 밖에 뜻 있는 인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읻거와는 달리 적어도 그의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타난 베케트의 인간존재에 대한 견해는 철저한 니힐리즘으로밖엔 볼 수 없다.
인생의, 아니 만물의 존재가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사상, 그 니힐리즘의 의미는 무엇일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죽음에 대한 의식이다. 만약 내가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면 비록 내가 하는 모든 것의의미가 밝혀질 가능성은 언제나 남아 잇따. 그러나 만약 나의죽음이 나에게 있어서 완전한 마지막이 된다면 그러한 가능성은 없어진다.
신도 죽고, 역사에 아무 목적도 없다면, 우주의 존재에 처음부터 아무 목적도 없었다면 이 땅 위에 인간으로서 태어나 역사 속에서 흘러 사라지고 마는 나의 존재에는 아무런 의미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주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고, 죽음을 초월해서 언제까지나 생존하려고 하는 본능에서 해방될 수 없는 우리에겐 이러한 인생관은 심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전통적으로 니힐리즘은 종교, 형이상학, 혹은 여러 종류의 신화를 통해서 부정되고 인생에 의미가 부여되었다. 종교에 있어서는 기독교가 그 좋은 예가 될 것으로서 기독교에 의하면 육체적 죽음이 마지막이 아닐 뿐 아니라, 지상의인생의목적은 천국에 있다고 믿음으로써, 지상에서의 노력이 의미를 갖게 된다.
형이상학의 좋은 예로서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인데, 학설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가이스트(정신)의-- 엄격한 과정으로서 이곳에서의인생은 이와 같은 형이상학 우주적인 목적과 속결됨으로써 뜻을 갖게 된다.
한편 우리들은 국가, 문화, 인류, 가족, 사랑 등의 신화를 통하여 현재의나의 행위나 노력, 나의--죽음에 어떠한 뜻을 부여한다.
불행인지 혹은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오늘날 종전대로의 신을 백 퍼센트 그대로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어떤 신화를 통해서 오로지 인간이 다른 어떤 동물도 할 수 없는 자기--같은 행위를 의식적으로 할 수 있음으로써 그의 위대성. 숭고성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웬만한 지성인이면 위에 든 바와 같은 가치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는의식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종교나 형이상학적 신념을 통해서 혹은 신화로밖엔 볼 수 없는 초월적 가치의 희생을 통해서, 심리적으로 우리들의 인생이 무의미하지않다는 느낌을 갖게 될 수 있음은 확실하다 하더라도, 그러한 의미는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개인의느낌에 불과하지 사실은 아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객관적 의미는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다. ]
결국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앞서 말한 대로의니힐리즘, '신의 죽음'을 선고한 니이체가 말하는 바의니힐리즘, 베케트의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볼 수 있는 니힐리즘을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이다.
철학적 니힐리즘, 즉 인생을 떠나서는그 아무 것에도 목적이 없고 언젠가는 죽게 마련인 인간의 일평생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 목적이 없다고 해서 우리는 베케트나 그 밖의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절망해야 하고 죽으면 그만인 인생은 반드시 초라하고
가엾고 고통스럽고 우울하고 따분한 것이어야 하나?
베케트가 암시한 것과는 달리, 톨스토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애당초 논리적으로 볼 때 인생을 떠난 인생 밖에서 의미나 목적, 즐거움이나 절망이 있을 수 없다.
모든 가치, 모든 의미는 오직 내가 살아 있는 한에서만, 내가 살아서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한에서만 뜻을 가질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언젠가는 죽어서 이 살, 이 심장이 썩은 흙물이 되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내가 죽은 다음 나는맛있는 음식, 즐거운 음악, 정다운 친구, 독서의 즐거움도 갖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지금까지 노력해서 닦아 온 여러 가지 앎이 완전히 한낱 백일몽처럼 무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또 한편, 어찌해서 이 무한한 시간 가운데서 하필이면 내가 지금 살 고있는 시공 속에 나는 태어나서 죽어야 하는지를 알 길이 없다.
무엇 때문에 인류가 태어났고 왜 우주가 존재했나를 알 수가 없다. 나에게 있어서 위와 같은 현상은 오직 거창한 수수께끼로 헤아릴 수 없이 깊고 어두운 신비로 밖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절하고 있으며, 내 꼴은 비참한가? 나는 꼭 절망해야 하고 비참해야만 하는가? 물론 머지 않아 내가 부토가 되고 외롭게 쓸쓸한 들에 묻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본능적으로 서운하고 허전해짐은 물론이다. 그러나 베케트가 강조한 것처럼 이와같은 사실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정말 영원히 살아야만 한다고 가정하자. 그 얼마나 따분하고 무서운 일이랴. 내가 언젠가는 죽어야 하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일장춘몽 같은 나의 인생은 신명이 나고 아름답고 즐거울 수 있으며 눈을 감고 죽으려 떠나는 날까지 나는 헤아릴 수 없는 의미로 가득 채워질 수 있다. 행복된 환상보다는 불행한 현실이 더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
베케트가 그린 인간은 가련하면서도 우스꽝스럽다. 그는 인생을 희비극의넌센스로 보았따. 그러나 이러한 인간상은 오직 인생 밖에서 인생을 바라봄으로써만 가능하다. 행인지 불행인지는 알 수 없는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인생을 떠나, 인생 밖에서만 내다볼 수 없다. 우리는 트래직 토믹한 인생을 힘껏 살아감으로써 그것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다.
순전한 사상사적 입장에서 볼 때 「고도를 기다리며」는 두 가지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 같다.
첫째, 그것은 소박한 과학문명에의 결정적은 비평으로서 소박한 진보에 대한 낙관적 태도에 종지부를 찍는다. 인간의 문제, 인간의 행복이 과학의 발전으로만 종지부를 찍을 수 없다느 것을 웅변적으로 상징해준다.
둘째, 우리들은 하나의 정직한 인생의 거울로서의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들이 의식하지 못했거나 혹은 오로지 일상적으로 알았던 우리들이 갖고 있는 한 면을 구체적으로 역력히 체함함으로써 보다 더 우리들 자신의 보다 참된 모습을 의식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정말 보람 있는 우리들의인생은 적나라한 우리들의 거짓없는 모습을 지각함으로써 시작될 수 있다.
(p 182 ~ p 187)
출처 / 문학과 철학 - 박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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