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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 시인/철학 강의

철학적 니힐리즘 1 / 박이문

by 丹野 2011. 12. 17.

 

철학적 니힐리즘 1

                                 -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박이문

 

 

   한 문학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사상은 직접적인 방법이거나 혹은 간접적인 표현으로 나타난다. 전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실의 수기"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작가가 어떤 이데아를 자기가 만든 가공의 인물들을 통해서 표현하며, 후자의 예로는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은 작품인데, 이런 작품의 주인공들은 자기들의 이데아를 직접 표현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작품에서 나타나는 작가의 사상은 작품 전체를 하나의 간접적 또는 예민적인 언어로 보고 그 속에 숨어 있는 의미, 즉 이데아를 표출해 내어야 한다. 전자와 같은 작품의 주인공들이 사상가로서 자기들과 언어를 통하여 그들의 사상을 표현하는 데 반해서 후자와 같은 작품의 인물들은 사상가가 아니며 언어로 자기들의 사상을 표현하지 않고 그들 인문 자체가 바로 어떤 이데아를 뜻하는 언어로서 존재한다.

 

    2막으로 된「고도를 기다리며」는 극적 사건이 없는 극이며, 이야기라고 말할 이야기가 없는 애기다.

  어느 날 저녁 잎사귀 하나 붙어 있지 않는, 버드나무 하나만이 우뚝 서 있는 적적한 시골길에서 어리석어 보이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만나기로 약속한 것으로 되어 있는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바보 같은 말을 지껄인다. 그러는 동안 그 땅의 임자로 되어 있는 포조가 러키라는 노예같은 자를 끌고 몹시 허대하며 나타난다. 불라디미르는 포조가 고도란 인물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국  착각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그들은 얼마 동안 바보같은 대화를 지껄이다가 사라지고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다시 고도를 기다린다.

그러나 한 참 후에 어떤 소년이 나타나 고도가 그날 저녁은 못 오고 다음날 저녁에 올 것이라고 전한다. 다음날 저녁,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똑같은 장소, 똑같은 시간에 역시 똑같은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따분한 시간을 보내면서 고도를 기다린다. 그러나 끝내 고도는 나타나지 않고 다시 소년만이 나타나서 고도는 다음날에 올 수 있다고 전한다. 이런 소식을 들은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다음날 다시 올 것을 기약하고 그곳을 떠나기로 한다.

 

   이 시시한 얘기 같지않은 얘기 속에는 아무런 철학적인 대화도 있지 않고 그곳에 나오는 다섯 명의 인물이 사상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무식하거나 바보 같거나 어리석다.

  따라서 이 작품이 한 철학적인 의견을 나타내고 있다면, 그것은 주제, 인물 등의 성격, 극이 전개되는 장소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나타나는 상징적인 의미 속에서만 찾아낼 수 있다.

 

  작품의 주제는 말할 나위도 없이 기다림, 더 정확히 말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기다림이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기다리고만 있는 것이다.  당분간 근절된 것이 아니라 그 본능적으로 영원히 '좌절된 기다림'의 상징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기다림의 무용성, 무의미를 말한다.  기다림은 기다리는 것이 이루어짐으로써, 적어도 그런 가능성이 있음으로서나 뜻을 갖게 되지만, 기다림이 근본적으로 근절된다면 기다림은 아무 뜻을 가질 수 없게 됨은 당연한 논리다.  기다린다는 노력의 좌절을 허무, 즉 '니힐' 이라고 불러도 좋다.  만약 인간의 그날 그날의 생활이 죽는 날까지 다음날, 또 다음날의 무엇긴가를 기다리는 연속이라고 가정하고 그와 동시에 죽는 날까지 아무리 애를쓰고 다음날까지 무엇을 기다려도 결국은 그 기다림은 성취되지 않고 이 땅에서 사라져 한낱 흙이 된다든가, 혹은 어떤 벌레의 밥이 될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들의 인생은 예외 없이 허무하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인생을 비롯해서 모든 것이 그저 무의미하게 존재했다가 딴 형태의 물질로 변해 없어진다는 관점을 '철학적 니힐리즘'이라 부른다. 이러한 철학적 사상은 두말 할 것 없이 인생을 철저히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상이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철학적 니힐리즘을 나타낸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베케트가 말하는 인간의 기다림의 내용, 그것이 좌절된 의미 그리고 좌절됨을 알고서도 역시 소용도 없이 계속 기다려야 하는 의미를, 마지막으로그런 상황 속에서 베케트가 본대로의 인간 생존의 모습을 작품 속에서 분석해 보자.

 

  고도 Godot가 기다림의 대상이 되는데 때로는 '그' He를 대문자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또 '그'가 벌을 줄지도모른다는 표현으로 보아 적어도 표면적인 고도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신 God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옳은 해석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 베케트는 진지하게 신을 의미했을까?  해석이 설명하는 고도는 인간의 고통이나 인간 사회의 불의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신은 비록 전능하다 하더라도 무한한 사랑의 상징으로 되어 있는 기독교의 인격신과는 배제된다. 뿐만 아니라 고도는 영원히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인격신으로서 조물주로서의 신과는 맞지 않는다.

 

  차츰 설명이 되겠지만 퍽 이단적인 해석이 될지도 모르나 필자는 고도를 인간이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그 자신의 존재조건의 상징으로 봄으로써 작품 전체에 보다 정연한 해석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가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이고도 필요한 조건은 인간의 힘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초월할 수 없는 전지전능한 신의 개념과 일치한다.  고도를 기다리는 노력이 근절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인간의 존재조건은 그가 살아있는 이상 아무리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가 없다는 뜻이 되겟다.

 

 그렇다고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고도로 상징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조건이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만족을 모르는 생존에의 본능'이다.  생명으로서의 인간은 딴 모든 생물체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만족을 모르고 언제나 더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려는 본능에서 벗어 날 수 없다. 왜냐하면 생존이야말로 근본적인 조건 가운데서도 가장 근본적인 생존조건이 아닐 수 없기 떄문이다. 다음과 같은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대화는 위와 같은 해석을 뒤받침해 준다.

 

 

에스트라공 : 정확히 뭘 고도에게 부탁할 것이여?

블라디미르 : 글쎄, 뭘 부탁해야 할지 몰라.

에스트라공 : 우린 꼭 매여 있는 게 아니여?

블라디미르 : 매여 있다니? 누구한테 매여 있단 말이여?

에스트라공  : 고도한테 말이여.

 

  우리들의 생존의 근본조건으로서의 생존에의 본능에서 우린 떠날 수 없다. 죽을 때까지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이러한 상황을 떠날 수 없다. 우리들은 그저 본능에 따라 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뜻 보아서 인간은 동물과 같은 본능에 지배되는 동시에 그러한 본능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때로는 초월하고자 하는 능력과 또 다른 본능이 있다.  동물과 달리 살아가는 기쁨과 괴로움을 의식하는 인간은 경우에 따라서 자기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버리고자 하는 욕망을 갖게 된다.  즉, 생명에의 본능을 초월 혹은 .....살하려는 부정적 또는 소극적인 욕망을 갖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와 같은 인간 특유의 욕망을 '죽음에의 욕망'이라 불렀다.  

 

 그러나 '죽음에의 욕망'은 사실 따지고 보면 죽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욕망의 뒤집혀진 표현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설사 자살을 실제로 여행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비참한 경우에 놓여도 아무리 가까운 날에 내가 죽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또한 인생에 대한 어떤 이론적인 가치를 전혀 갖지 않는다 해도 절대다수의 인간은 생명에 대해 동물로서의악착 같은 애착을 초월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우리들의 모습은 다음과같은 대화에 예를 찾을 수 있다.

고도를 기다리다 못해 지치고 그냥 살아가는 것에 따분하고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에스트라공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블라디미르와 나눈다.

 

에스트라공 : 우리 목매달아 죽어 버리면 어때?

블라디미르 : 뭘로?

에스트라꽁 : 자네 끄나블 한 가닥 갖지 않았어?

블라디미르 : 아니......,

에스트라공 : 그럼 우린 목매달아 죽지도 못하겠네.

 

  비록 우리들은 살아가는 데 의의가 있다거나 그런 데서 신명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비참하고 따분하다는 것을 의식하게 될 때라도 생존에의 본능, 즉 고도에게 묶여 있는 것이다.  몇 번이고 똑같이 되풀이 되는 다음의 대화는 윙서 본 바와 같은 인간의 상황을 웅변으로 요약해서 보여 준다.

 

에스트라공 : 돌아가세.

블라디미르 : 안돼

에스트라꽁 : 뭣 때문에 안 돼?

블라디미르 : 고도를 기다려야 해!

 

  고도의 상징적 의미를 인간의 생존에 대한 본능으로해석한 우린느 "고도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뜻을 좀 더 캐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고도를 본능으로 해설 할 떄 "본능을 기다리면서"라는 말로 바꿔 쓸 수 있게 되는데, 이러한 표현은 문자 그대로는 말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다림'은 어떤 결핍된 대상에의 욕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채워지지 않는 생존에의 본능에 묶여져 나오지 못한다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 기다림을 갖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 뜻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생은 덧없는 기다림 그 자체가 된다. 따라서 우리가 기다리는, 즉 그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는 궁극적 집착의 대상은 반드시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어도 좋다

 

이와 같은 사실은 종수를 갖지 않은 사랑,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 아닌 딴 초월적 세계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데에 관심을 가질 정신적 육체적 여유마저도 없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항상 내일을 위해 다음 해를 위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아 역력히 증명된다.

위에서 나는 베케트의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가 궁극적 목적이 없이 어쩔 수 없는 본능에 매달려 살고 잇는 인생의 근본적 존재조건 혹은 양상을 표현하는 것임을 밝히고자 했다.

이에 우리는이와 같은 근본적 존재조건 속에서의 인생이 어떻게 베케트에 의해서 유사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p 176 ~ p 181)

 

 

출처 / 문학과 철학 - 박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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