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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철학 강의

시와 철학 / 박이문

by 丹野 2011. 12. 17.

Xi Pan

 

 

아래의 글은 박이문 교수의 문학과 철학(민음사,1995)에서 옮겨 온 글 입니다. 

 

시와 철학

 

박이문

 


세계 아니 우주의 모든 비밀을 밝힘과 그것의 의미 부여를 진리라고 한다면 진리는 어디까지나 지적/인식적 가치이다. 그런가치에 대한 욕구가 인간의 가장 원초적 인간다움의 속성이라는사실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오랫동안 시적 창작과 철학적사색으로 표현되어 왔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의 가속적 개발/축적과 더불어 시적/철학적 지식은 무용한 사변적 골동품으로 들통난 것같이 보이게 되었다. 오직 과학적 지식만이 세계와 인간에대한 진리를 대표할 수 있다는 확신이 더욱 굳어가고 있는 듯하 다. 시는 세계의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시인의 주관적 감정의 발산에 불과하고 철학의 기능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객관적 진리의 발견과는 상관없이 <개념적 교통 정리>에 국한된다는 새로운 철학적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기술 산업 사회의 달동네에서 수많은 유명/무명 시인들이 시작(詩作)에 밤을 새우고 적지 않은 수재들이 전공을 바꾸기까지 하면서 무용해 보이는 철학적 사색과 담론에 도취하고 있다. 그들은 과학적 진리를 부정하지 않고 과학자들을 경멸하지도않는다. 다만 그들은 과학적 진리와는 다른 진리가 있고 그러한진리를 탐구하는 자신들의 삶 역시 과학자의 삶에 못지않은 가치가 있음을 의심치 않는다. 일반인들이나 철학자들이 오랫동안 믿어왔던 것과는 달리 시 작품과 철학적 저술은 정서적 혹은 지적유희의 오락적 산물이 아니다. 시인과 철학자는 세계와 삶의 진 리에 대해 어느 과학자보다도 진지하며 그러한 진리를 정열적으로 추구함을 그들 스스로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은 옳다.


1 시와 소설

시를 소설이나 희곡 같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한 장르로서 <문학>이라는 지적 활동 범주에 함께 분류하고, 문학을 철학이나 과학과 대조하는 것은 오래 내려온 지식사의 관례이다. 이러한 분류와 대조가 인간의 다양한 지적 활동을 이해하는 데 방법적 편의를 제공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시의 특수한 기능과 나아가서는 시와 철학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시를 소설이나 희곡과 분명히 구분해 봐야 한다.

근대적 과학의 성립과 아울러 과학과 문학의 기능은 재현(인지성)과 표현(비인지성)으로 구별되어 왔다. 과학이 세계에 대한 객관적 정보를 제공하는 데 반하여 문학은 세계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 정서를 표현해 줄 뿐이라는 것이다. 과학적 텍스트의 내용이 사실적factual 서술인 데 반하여 소설이나 희곡과 같은 문학텍스트의 세계는 허구적fictive 상상물이다. 이러한 구별은 옳다. 객관적 사실만이 진리일 수 있고 그러한 진리에 대한 신념만이 지식일 수 있다. 처음부터 허구적 상상물임을 알고 있는 소설이나 희곡의 내용은 결코 진리나 지식일 수 없다. 만약, 소설이나
희곡에 대해서 <진리이다>라든가, 그러한 작품들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제공했다면 그 <지식>은 오로지 은유적 뜻만을 갖는다.

그러나 다 같이 문학에 분류되지만 시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시는 상상의 이야기, 즉 허구가 아니다. 시인이 시에서 의도하는 것은 어떤 상상할 수 있는 경우를 제시하는 데 있지 않다. 그는 자신이 발견했거나 경험했다고 확신하는 어떤 객관적 진실/진리를 재현해 보이려는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언제나 진리이다. 그가 재현하려고 하는 진리가 객관적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적 세계일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시적 의도는 어디까지나 인지적이며 그의 텍스트가 나타내는 것은 외적 혹은 내적 세계에 대한 정보이다. 인식적이라는 점에서 시적 의도는 놀랍게
도 철학이 과학적 의도와 가깝고 소설이나 희곡적 의도와는 멀다.


2 과학적 진리와 시/철학적 진리

인지적이라는 점, 즉 세계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표상하고자 하는 점에서 시나 철학의 의도는 과학적 의도와 동일하나, 각기 그것들의 인식 대상과 인식의 목적에서는 서로 다르다. 한편으로 과학의 인식 대상이 물리적으로 환원될 수 있는 존재에 한정되는데 반하여 시나 철학의 인식 대상은 물리적 존재만이 아니라 인지, 반성, 사색 등 모든 정신 활동을 총괄적으로 포함한다. 다른 한편으로 과학적 인식이 그 대상의 조작과 이용이라는 공리적 목적을 깔고 있는 반면, 시나 철학적 인식은 그 대상 자체를 아무런 목적과도 상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지한다는 점에서 비공리적이다.

과학의 인식 대상인 물리 현상은 오직 양적으로 처리되고 <과학적 방법>이라는 획일적 논리의 기계적 틀 안에서 처리되므로 그것의 실용적 조작을 가능하게 한다. 과학이 자부하는 진리의 객관성이란 그 인식 대상의 진상이 아니라 과학적 인식의 실용적 효과를 지칭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학적 인식과 진리는 어디까지나 공리적 전략을 가장한 것이다. 이와는 달리 시나 철학의 인식 대상인 모든 정신적 현상은 그 성질상 양화(量化)할 수 없고, 따라서 일정한 논리적 틀에 획일적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언제나 개별적인 성격을 탈피할 수 없다. 따라서 시나 철
학의 대상은 어떤 수학적 공식에 의해서도 서술될 수 없다. 이와 같은 시나 철학의 인식 대상에 대한 서술은 그 대상을 기계적, 즉 과학적으로 조작하여 실용화할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나 철학은 공리적 목적과는 상관없이 그러한 인식 대상을 조작/변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개체로서 파악하고자 한다. 과학적 인식이 공리적이고 과학적 진리가 전략적 의미를 가졌다면, 시나 철학적 인식은 무상적이며 그것들의 진리는 관조적임을 말해 준다. <진리>의 가장 원초적 의미는 <존재 자체의 구현>이다 과학적 지식은 공리적 목적에 비추어 조작된 과학적 방법의 틀에 맞는 신념이다. 그렇다면 과학적 지식은 진리와는 원천적으로 멀다. 오히려 시나 철학적 지식이 원래적 의미로서 진리일 수 있다. 그런데도 과학적 지식은 벌써 오랫동안 진리의 모델로 통해 오고 있으며 이러한 진리의 개념은 나름

대로 유용하게 통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학적 인식이나 진리>의 개념을 거부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똑같은 <진리>라는 말이 과학적 맥락과 시나 철학적 맥락에서 어떻게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가를 명확히 의식하는 데 있다. 이 두 가지 진리는 세계/존재에 대한 인간의 두 가지 다른 인식적 태도에 있다. 그것을 각기 편의상 <이성적>, <사유적>이라 부르기로 하자. 다같은 정신의 지적 활동이면서도 이성이 전략적이며 개별적인 존재를 배타적으로 획일화하는 정신 활동을 지칭한다면, 사유는 관조적이며 개별적인 것들을 포괄적으로 존중하는 정신 활동을 지 칭한다. 과학적 진리가 <이성적> 인식/진리를 대표한다면 시나 철학적 진리는 <사유적> 인식/진리의 표본이다.


3  시적 의도와 철학적 의도

시나 철학은 존재하는 대상 그 자체를 있는 대로 표상/재현함으로써 다 같이 즉 <사유적> 진리를 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유적 진리 표상은 언어와 그 표상 대상, 존재와 의미 그리고 의식과 그 대상 사이의 형이상학적 갈등 관계를 내포한다. 시와 철학의 차이는 이러한 갈등의 양면을 각기 대변한다. 시나 철학의 궁극적 의도는 어떤 현상, 생각, 경험 등을 어떤 형태로든가 가능한 그 존재를 조금도 왜곡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표상/재현하자는 데 있다. 이러한 목적은 모든 진리 탐구의 개념속에 논리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시나 철학이 과학이나 그 밖의 다른 형태를 갖춘 진리 탐구와 구별되는 이유는 전자가 후자의 어느 경우보다도 진리 탐구의 정신과 아울러 그러한 탐구에 필연적으로 내포된 근원적 모순/갈등을 가장 첨예하게 드러낸다는 데 있을 뿐이다.

우리는 존재의 진리를 찾는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존재 자체는 진리가 아니다. 존재의 인식 그리고 그러한 인식의 표상만이 진리일 수 있다. 그러나 표상은 물론 의식 상태를 지칭하는 인식 자체도 언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언어는 <의미>로서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사물 현상의 표상은 물론 그것의 존재 의식까지도 필연적으로 <의미>로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의미>는 구체적 존재의 관념화를 뜻하며 관념화는 추상화를 의미한다. 인식의 투명성은 이러한 관념화/추상화의 정도에 따라 상대적으로 달라진다.

존재와 언어의 근본적 구조는 존재를 의식/인식/표상하고자 하는, 즉 진리를 탐구하려고 하는 시나 철학의 기획은 그 자체 속에 극복할 수 없는 두 가지 구조적 모순/갈등/역설을 내포하고 있다. 언어는 그것이 표상하는 존재와 다른 것으로 구별될 때만 성립된다는 데 첫째의 역설이 있다. <나무>나 <사랑>이라는 어휘가 우리에게 무엇인가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실재하는 나무라는 사물과 사랑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무>나 <사랑>이란 말들은 그것들이 각기 나무나 사랑이 아닐 때만, 즉 나무와 사랑과 동일하지 않을 때만 나무와 사랑을 표상, 즉 의미한다는 역설을 낳는다. 둘째의 역설은 이렇다. 의식, 인식, 표상이 구체적 존재의 <의미화> 즉 관념적 <추상화>의 정도에 따라 상대적으로 투명하다면, 어떤 존재에 대한 진리의 발견과 그것의 표상은 그것의 추상화와 변형화, 즉 그 존재 자체가 멀어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성공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존재와 의식, 인식과 언어 사이의 위와 같은 역설적 구조에 비추어볼 때 시와 철학의 차이와 관계가 설명된다. 한편으로 시가 의도하는 것은 진리의 발견과 표상이 동반하는 관념화/추상화/의미화를 극복하고 원초적 존재 자체라고 부를 수 있는 진리의 고향으로의 귀향이다. 존재의 순수성에 대한 잃어버린 동경이다. 시는 우리의 인식을 초월해 있는 존재의 타자적 목소리이다. 시적 언어가 철학적 언어만이 아니라 어떠한 언어보다도 애매 모호하고 난해한 경향을 띠게 되는 것은 그것이 <사물적>이고자 하는 몸부림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러한 동경은 마치 자신의 사랑의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동정(童貞)을 잃지 않고 사랑하려는 기획과 똑같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동정의 포기를 전제하지 않는 사랑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철학이 의도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인식과 표상을 가능한 투명하게 하는 데 있다. 진리를 확보함이다. 철학적 언어가 특히 시적 언어에 비추어볼 때 의미의 투명성을 더 요청하며 실제로 그렇게 나타내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철학이 논리와 의미의 투명성을 강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의도가 성공하면 할수록 철학의 원래의 목적은 그만큼 실패한다. 인식/표상의 투명성은 존재의 관념화/추상화/의미화를 전제한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 달성은 상대적으로 그것이 지칭하는 존재의 구체성/사물성의 희생, 즉 진리의 자기 희생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철학적 진리 추구의 의도는 모순을 내포한다.

시나 철학의 궁극적 목적인 진리의 구현은 그것에 내포된 모순이 극복되지 않는 한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이 존재와 진리 사이의 형이상학적 구조인 만큼 그것의 근본적 극복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나 철학적 정열에 나타난 진리에 대한 이상은 지을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아 있는 가장 바람직한 작업은 시적 철학인 동시에 철학적 시라고 부를 수 있는 언어의 부단한 재창조를 거듭하는 일이다.

시와 철학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위와 같은 확인은 자칭 <시>라거나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다 같이 그러한 본연의 기능을 한다는 말이다. 엄격히 검토해 보면 그렇게도 허다하게 씌여지는 시적 텍스트와 철학적 텍스트 가운데서 극히 소수만이 <시>와 <철학>의 이름이 붙을 자격이 있다.

 

 

 

 

박이문 朴異汶 

서울대 불문학과 졸업.

소르본 대학 불문학박사 . 미 남가주 대학 철학박사. 시몬스 대학 명예교수.

현재 포항공대 교수
저서: <시와 과학> <철학이란 무엇인가> <현상학과 분석철학>

<예술철학> <사물의 언어> <과학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전후>외 다수

 


출처 / 세상과 세상사이 http://blog.daum.net/prhy0801/10594647

  A Comme Amour / Richard Clayder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