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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나호열 / 그 사람 外

by 丹野 2011. 11. 8.

 

 

 

그 사람 / 나호열

 

『담쟁이 덩굴을 무엇을 향하는가』중에서

도서출판 청맥 1989

 

 

 

그 사람 / 나호열

 

그 사람이 보고 싶었다
아무 일도 없는데
그저 바람으로 흘러가는 주소를
생각해 보았다
한나절이 지나고
숨을 곳
곳곳이 찾아보았으나
방금 떠났다고 한다
어디로 간다는,
행선지도 없이
신발 문수를 감추고
같이 모여 있으나
뿔뿔이 흩어져 갈
정류장에서
그 사람이 보고 싶었다
따스한 무덤 같은 별들이
여기야, 여기야
오천 년 전의 눈빛을
은근히 보내고 있었다

 

 

冬蘭 / 나호열

 

 

반쯤

흰 살을 드러낸

웃음의 뒷길을

그믐달이 가고 있다

 

음지로 뻗는 푸르름

치아가 이쁜

은장도

하늘을 물고 있다

 

 

 

 

 

가을 나무에게 / 나호열

 

 

 

울지 말아라
지난해 움텄던 자리에
다시 새 잎이 돋고
슬픔 위에
따스한 손으로
다시 슬픔이 얹힌다

갈 곳 없는 산새가 버린
먼 하늘
세상을 가득 채운
수식어가
하나 둘
떨어진다

 

 

 

 

 

어느 날 / 나호열

 

 

 

시간은 휴지처럼 지나갔다

아무에게도 보여지지 않은

속 마음

더렵혀지면서

버려지면서

아, 쓸쓸한

이 마약냄새

 

 

 

산사에서 / 나호열

 

 

 

풍경소리에도 자그맣게 흔들리는
달빛이
걸음을 옮기고 있다

천 년을 내내 눈 떠 있는
석불의 입술은
앞산 나무들을 흔드는
바람이 되고
싸락거리는 소리
반야심경을 읊으며
냇물로 흘러간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갈림길에서 흔들리는
그믐의 달빛

두드릴수록
허물어져 내리는
육신의 모서리를
가을벌레 울음으로 잦고 있는
투명한 목숨줄
달빛을 타오르고 있다

 

 

 

 

 

 

바위에게 / 나호열

 

 

얼음이기를
언젠가는 풀려지기를
가시로 돋힐 말씀들
안으로 던지며
기다렸다

물에 설탕을 넣듯이
달콤해야 할 시간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떠나자
떠나버리자
물빛으로 던지는 속말들은
푸른 이끼로도 돋지 못하고
차가운 체온을
가슴에 담아
먼 바다에
던져버린다

 

 

 

 

 

 

편지 · 1 / 나호열

 

 

 

여기 두고 가리라
오랜 햇살과 바람을 거느려
낙엽같이 메마를 내마음
황급히 달려오는 그대 발자국에
산산히 부서질
철 늦은 기다림
여기 벗어두고 가리라

 

 

 

 

 

/ 나호열

 

 

 

나는 끈 하나로 남는다
어디를 지나왔을까
되살려지지 않는
물음만이
허공을 끌어안은 채
허물을 벗어 던진다

긴 겨울밤의
길을 떠난
그 자리
처음과 끝의
매듭만 굵게 잡힌다

 

 

 

 

 

 

 

 

바다를 향한 세 개의 판토마임 / 나호열

 

 

 

1
밀어본다

당겨본다
표적을 빗나간
총알의 투덜거림,
질긴 귓속말로
두드려 본다

전원끊긴 자동문
투명한 저 너머
움직인다
한 사람이 제 몸에
못질을
해대고 있다

퍼렇게
바보같이

  2
안는다
보듬어 안는다
비어있는 항아리를
끌어안는다

내 마음을 담을 수 없는
바다
아무리 해도 내 가슴에 담겨지지 않는
항아리
던져버리자,
힘껏 한 세상이
침묵 속으로
깨져 버린다
체온이 식어 버린다

  3.
끝까지 기다려봐
눈감지 말고
한꺼풀
또 한꺼풀
벗어던지는
저 알몸
마지막을 기다려봐

빈 곳이란
빈 곳
철석이는 소리
반질하게 닦여져서는
또르르
바다로 굴러가는
마음 한 덩이

 

 

 

 

 

귀가 / 나호열

 

 

 

놀라운 폭발을 보고 있다
그릇에 담기지 않는
눈물의 파편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서는
하나가 되어 터져버린 광경을
시린 별빛으로 보고 있다

 

 

 

 

-『담쟁이 덩굴을 무엇을 향하는가』 도서출판 청맥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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